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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22화 (11/115)

22화.

“와, 포부가 대단한데요? 하늘 같은 선배지만 내가 한번 이겨 보겠다. 피스트 위에서 완벽하게 쓰러뜨리겠다, 이런 말씀이시죠?”

“네. 뭐, 그렇죠.”

도혁이 은근슬쩍 말끝을 흐렸다.

주원이 듣기에 방금 도혁의 발언은 결코 경기장에서 자신을 쓰러뜨리겠단 소리가 아니었다. 침대에서 날 자빠뜨리겠단 소리잖아. 애써 올라오는 욕을 삼키며 주원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발칙한 후배 맞으시네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기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배님?”

“하하, 절대 안 넘어져야겠다고 생각 중이지.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주원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가들이 키득거렸다.

“두 분 묘한 케미가 있으시네요. 또, 재미있게도 두 분이 룸메이트시라고요.”

“맞습니다. 오늘이 두 번째 밤인데요, 첫날밤에 이어서 두 번째 밤도 기대되네요.”

“밤이 기대되신다니, 이도혁 선수님. 무슨 의미신가요?”

“주원 선배님하고 얼마나 재밌게 이야기 나눌까. 너무 즐거워서 밤을 새우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아,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는 못 해 먹겠네. 주원은 속이 끓었다. 하지만 카메라 앞이기에 주원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고, 카메라 감독 눈에 두 미남자의 투 샷은 그럴싸했다.

“두 분 그림이 너무 좋네요. 앞으로 촬영 기간 내내 붙어 다니는 그림 연출 부탁드립니다.”

기자가 속없는 부탁을 했다. 주원은 방에 들어가면 두통약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시간 인터뷰로 녹초가 된 주원은 마른세수를 하며 1009호 방문을 열었다. 자기 몫의 욕실로 들어간 그는 오늘 하루 얼마나 영혼이 털렸나를 되짚어 봤다.

도혁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는데 명백하게 저를 노리는 인터뷰까지 해 대고. 이 녀석 보통 녀석 아니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욕실에서 대충 샤워를 하고 나왔다.

“오늘 일찍 자자. 불 끌게.”

“네, 선배님.”

얌전하게 대답은 했지만, 도혁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자꾸만 자리를 뒤척였다.

도혁이 말똥말똥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방 안에는 주원의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도혁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원이 잠든 침대로 다가갔다.

희미한 수면등 불빛에 비친 주원의 얼굴은 잘 빚은 조각 같았다. 사납게 치켜뜬 눈도, 찌푸린 미간도 다 사라진 지금. 눈을 감고 있는 주원은 유순해 보이기만 했다.

도혁은 홀린 듯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원의 얼굴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쪽.

주원의 이마에 도혁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전기가 찌르르, 흘렀다.

“으음…….”

주원이 몸을 뒤척였다. 도혁은 살며시 몸을 물리며 쿵쾅쿵쾅 뛰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몰래 뽀뽀해서 미안해요. 근데 오늘 선배, 너무 예뻐요. 나한테 안 지겠다고 바락바락하는 모습이 특히나 그랬어요.

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는 도혁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 *

“로마 땅에!”

“애국가를!”

등산로 입구에 줄지어 선 국가 대표 펜싱팀 남녀 도합 여섯 조. 에페, 플뢰레, 그리고 사브르팀의 기합이 엄청났다. 이들은 오늘 정신력과 체력 함양을 위해 등산을 준비했다.

정규 엔트리 스물네 명 모두 사기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긴장감과 경쟁심마저 감돌았다.

산기슭에서부터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져, 에페 진연후는 뒤 선수들이 앞장서지 못하도록 견제를 펼치기도 했다. 운동선수의 본능이기도 했고, 팀 내 사기를 증진시키려는 행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친 듯한 속도로 산을 타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주원이었다. 원래부터 등산에 특화된 하체 탄력을 지니고 있었기도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도혁이 졸졸 따라다니는 현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선배님, 제발 같이 가요!”

주원은 바로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며 선배, 선배 타령을 해 대는 도혁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말할 시간까지도 아껴 그와의 간격을 벌리고만 싶었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민석과 규영은 B로그를 찍느라 신이 났다.

“우리 주장과 막내 둘 다 엄청나게 빠르네요. 대한민국 넘버원 사브르팀답습니다. 다른 종목 선수들이 따라가질 못하고 있어요.”

“저희는 뭐 하냐구요? 진작 뒤처졌습니다. 하하!”

“늦은 김에 포장해 온 김밥이나 먹고 갈까요? 으하하!”

둘이서 만담을 하는 동안 주원은 거의 정상 가까이 도달했다. 막판 스퍼트를 내면서 그는 에페팀 진연후와 각축을 벌였다.

“너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화내면서 산을 타.”

“아니에요.”

“엄청 열받아 보이는데.”

“더워서 그래요.”

진연후는 에페팀 소속으로, 주원과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라 일찍이 안면을 튼 사이였다. 이쪽도 만만치 않은 미남이었는데, 지난 올림픽에서 나란히 은메달을 목에 건 사이로 세트로 예능에 불려 나가기도 해서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남의 기분을 캐치하는 데는 도사였기 때문에, 지금 주원이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새 일이 잘 안 풀려?”

“…조금 힘드네요.”

“훈련이 안 풀려? 너희 훈련 타임에 합 엄청 잘 맞아 보이던데.”

에페팀, 플뢰레팀과 시간을 나누어 펜싱 경기장을 쓰고 있었으나 가끔 겹치는 시간대가 있었다. 오가며 지켜본 바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는 것이 진연후의 의견이었다.

“…사적으로는 그다지예요.”

주원이 모자를 고쳐 쓰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두 남자는 정상에 도착해 바위에 걸터앉았다.

주원은 주니어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며 의지해 왔던 진연후에게 이 모든 사연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을 짝사랑하는 상대가 도혁이란 사실을 알려 주는 셈이었기 때문에, 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후배의 비밀을 폭로하면서까지 자기 고민을 상담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주원은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잠시 후 도혁이 손을 흔들며 정상에 올라왔다.

“선배님들! 정말 빠르십니다. 이제야 따라잡았네요.”

헉헉거리며 땀을 닦는 그의 표정은 해맑았다. 아주 상쾌해 보이기도 했다.

“제법이네, 이도혁.”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연후 선배님.”

“너까지 TOP3니까 제일 늦게 내려갈 기회 얻었어. 좀 쉬어.”

진연후가 친절하게 웃으며 바위에서 일어나 자리를 가리켰다. 도혁은 환하게 웃으며 닁큼 주원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순간 주원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사람 표정 읽기에 능한 진연후는 그 의미를 빠르게 캐치했다.

아, 또 이러네.

압축하자면 그 정도 뉘앙스였다. 그런데 그게 ‘그래서 싫다.’ 쪽보다는 ‘그럴 줄 알았어.’와 같은 수용, 그리고 ‘네가 내 옆 아니면 어딜 가겠냐.’라는 달관의 의미가 짙어 보였다.

가만히 지켜보자 주원과 도혁은 딱 그 뉘앙스대로 대화를 진행했다.

“아래에서 대체 뭐 하길래 이렇게 늦었냐.”

“선배님이 워낙 빠르셔서 따라잡기가 어려웠어요. 저 두고 그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내가 너 달고 다녀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러니까 좀 빨리빨리 다녀.”

“내려갈 때는 저 놓고 가시면 안 돼요. 그럼 저 진짜 울어요.”

“네가 나 따라잡을 수 있으면.”

주원은 무심한 표정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듯한 태도였지만 결론적으로 도혁과의 동행을 수락했다. 도혁은 대놓고 주원과 딱 붙어 다니고 싶은 티를 냈다.

우리 주원이한테 저런 면이 있었네.

진연후는 의외란 생각을 했다. 늘 후배들 앞에서 위엄이 넘치는 주원답지 않았다. 가끔 짜증을 냈고, 정색했고, 그러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연후는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재미있게 지켜봤다.

* * *

“국가 대표 펜싱팀 산행 재미있게 보셨나요? 다음 B로그도 알찬 내용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좋아요, 뚜슈(터치)해 주세요!”

민석과 규영은 정상에 올라서도 B로그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채 선배, 도혁이도 한마디 해.”

“선배님이랑 등산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내려갈 때 손잡고 내려갈 거예요!”

“난 노코멘트.”

“아, 진짜. 싫다는 고양이한테 치근대는 강아지 같다.”

상반되는 두 사람의 반응에 민석이 껄껄댔다. 주원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어?! 흐려진다.”

그때 규영이 하늘을 가리켰다. 시커먼 먹구름이 멀리서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구름이 엄청 빠른데? 곧 있으면 산도 어두컴컴해지겠어.”

규영의 말마따나 조금씩 사방이 어두워졌다. 에페팀과 플뢰레팀 선수들은 서둘러 짐을 챙겼다.

“애들 챙겨서 내려가자, 주원아.”

“네, 알겠습니다.”

가장 선배인 여자 플뢰레팀 주장이 말했다. 모두 빠른 속도로 하산을 준비하는 가운데 주원도 후배들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빨리 갈 생각 하지 말고, 앞 사람 잘 보면서 따라가. 산이라 금방 해가 저무니까 조심하고.”

“네, 선배.”

“규영이는 민석이 챙기고, 도혁이는 나랑 간다.”

“네!”

둘씩 짝을 지은 다음 규영과 민석이 먼저 출발했다. 그들은 벌써 저 멀리 멀어져 가는 다른 선수들의 뒷모습을 쫓아 걸음을 빨리했다.

“우리도 내려가자.”

“네, 선배님.”

훈련용 산이라 높기도 했고, 산세가 험했다. 또 등산로가 잘 조성돼 있지 않아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지형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같은 상황에서는 무조건 앞사람을 놓치지 말고, 템포를 맞추어 내려가야 했다. 주원은 자기 뒤를 따라오고 있을 도혁을 위해 적당한 속도를 유지했다.

이래서 날씨가 변화무쌍한 산은 위험한 훈련지였다. 이미 피곤이 누적된 상태에서 젖은 땅에 다리라도 헛디디면 부상을 초래할 수 있다. 빨리 내려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서두를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하자, 선수들은 다 같이 당황스러운 듯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주원은 물론 무척이나 힘들었으나, 저만큼 멀어져 가는 민석을 의식하면서도 때로는 뒤돌아 도혁이 잘 따라오나 확인했다.

그때, 숲 저 너머에서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

“무슨 일이야. 거기 철호야?”

“네… 주원 선배, 저예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플뢰레 남자팀의 셋째인 윤철호였다. 그는 무척이나 심하게 넘어졌는지 끙끙거리는 신음을 냈다.

“너 다쳤어?”

“네, 발목 삔 것 같아요.”

주원은 뒤따라오는 도혁에게 잠깐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수풀을 헤치며 윤철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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