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 주원 선배님.”
“너 많이 다쳤어?”
“이쪽에 통증이 있는데, 다른 곳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윤철호는 무릎을 부여잡고 있었다. 주원은 쭈그려 앉아 그의 상처를 살폈다. 찰과상이 아니라 뼈를 다친 걸 수도 있어 보였다.
“큰일이네. 그나저나 플뢰레팀 다 어디 갔어.”
“제가 많이 뒤처져 있던 상황이라, 아마 저 앞에 걷고 있을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
도혁이 윤철호의 상처를 생수로 씻어 내는 동안, 주원은 플뢰레 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산속인지라 통화 신호가 시원하게 터지지 않았다. 주원은 이리저리 핸드폰을 치켜들면서 신호가 잡히기를 기다렸다.
“이거 잘 안 터지는데.”
“어떡하죠, 선배님.”
윤철호가 겁먹은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에 비해 주변이 급속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심지어 툭, 툭, 가는 빗방울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상황 좀 보자. 철호 너 일어날 수 있겠어?”
“네, 좀 힘들긴 하지만요.”
“철호 형, 저한테 기대요.”
도혁이 철호를 부축했다. 그 짧은 사이 빗줄기가 거세지고 번쩍, 번개가 쳤다. 곧이어 우르릉, 콰광 하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주원이 바닥을 내려다보니 바위와 자갈들이 무척이나 미끄러워 보였다. 또한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빨리 걷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주원은 바위 몇 개를 신발 바닥으로 비벼 본 다음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다. 지금 내려가면 철호 다리에 무리 올 거야. 비가 와서 미끄러운데 또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렇긴 해요.”
윤철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펜싱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첫째도 다리, 둘째도 다리였다. 이 상황에서 빠르게 하산해 보겠다고 속도를 냈다가 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비도 점점 많이 내린다. 가까운 데 비 피할 만한 데를 찾아봐야,”
그때였다. 주원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비스듬한 비탈 아래 있는 작은 산장이었다. 정확히는 대피소 개념으로, 지자체나 소방서 등에서 설치해 둔 것으로 보이는 통나무 건물이었다.
“저기 비를 피해 갈 만한 곳이 보여.”
“어, 진짜요. 산장이네……!”
“얼른 저리로 가요. 제가 철호 형 부축할게요. 형, 저 꽉 잡으세요.”
그들은 점점 굵어지는 빗발을 뚫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산장이 멀지 않아 몇 분 만에 통나무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입구를 살펴보니 지자체에서 관리 중인 임시대피소가 맞았고, 혹한이나 폭우 상황에서 사용하는 용도도 맞았다.
세 사람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창이 하나뿐이라 어둑한 실내는 습하고 추웠다. 주원이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그러자 꽤 넓은 실내가 드러났다. 구석에 문으로 분리된 작은 방이 하나 있었고, 그 안에는 간이 침상이 하나 있었다.
바깥 공간은 전체가 하나의 거실 겸 방이라고 불러도 될, 통으로 된 구조였다. 벽에 달린 수납장에 다가간 주원은 수납장을 열어 안에 든 내용물들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구급 키트와 방독면, 방수 모포와 생수가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여기 물건이 있어. 구급상자랑 모포 있으니까 철호부터 치료하자.”
“고맙습니다, 선배님.”
“고맙긴. 다리 이리 줘 봐.”
주원과 도혁은 윤철호의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런 다음 지쳐 있는 윤철호에게 생수 한 병을 쥐여 주고 모포를 건네며 철호를 간이 침상이 있는 방으로 들여보냈다.
“일단 방에 누워 있어.”
“그럼 먼저 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쉬겠습니다.”
“그래. 감독님이나 플뢰레 주장하고 연락되면 바로 알려 줄게. 일단은 아무 생각 말고 쉬고 있어.”
윤철호가 방으로 들어가자, 바깥 공간에는 주원과 도혁만 남았다. 뒤늦게 피로가 몰려와, 주원은 몸을 좀 눕히고 싶었다.
화장실에는 물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제대로 된 세수가 어려웠다. 주원은 수납장에서 꺼낸 휴지에 생수를 적셔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 냈다.
옷도 갈아입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주원은 안에 받쳐 입어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고, 겉에 걸치고 있었던 국대 점퍼를 입었다.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다는 게 찝찝했으나 땀에 전 채로 자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옷차림을 추스른 그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어……?! 감독님이다.”
“전화 터졌어요?”
“잠깐만. 나 걸어볼게.”
주원은 긴장으로 주먹을 꽉 쥐며 장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놀랍게도 신호가 갔다.
“감독님!”
─ 주원아, 어떻게 된 일이냐. 왜 너랑 애들이 안 보여.
“중간에 철호가 다쳐서 낙오됐습니다. 제가 도혁이랑 철호 데리고 대피소에 와 있고요. 아까는 통화가 잘 안 터지더니 이제 되네요.”
─ 하… 천만다행이네. 십년감수했다. 지금은 구조대가 비 때문에 올라가기 힘들다는데, 철호는 괜찮냐?
“네. 철호는 심한 부상 아니라서 저희가 응급처치해 둔 상태입니다. 애들 괜찮아요.”
─ 그럼 비 그치는 대로 애들 데리고 내려올 수 있겠어? 구조대 말로는 수천봉까지는 내려와야 된다는데.
“부축해서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이후로는 구조대장과의 통화가 이어졌다. 다행히도 큰 사고 없이 돌아갈 기미가 보이자, 주원은 맥이 탁 풀렸다.
그대로 나무 바닥에 드러누우려는데, 도혁이 그를 멈춰 세웠다.
“모포 깔아 드릴게요.”
“우리 각각 하나씩밖에 없잖아. 나 이거 덮을 건데.”
“같이 하나 깔고 하나 덮으면 되죠.”
“뭐?”
“크기가 꽤 커요. 우리 둘 다 몸 뉠 수 있어요.”
가만 보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모포가 거의 돗자리만 한 크기긴 했으니. 하지만 한 이불 안에 들어오겠다는 말이 못내 신경 쓰여, 주원은 딴청을 부렸다.
“아무것도 안 깔고 자면요, 감기 들어요.”
“…한 번만이다.”
감기 걸릴까 봐다. 이 덩치 큰 놈하고 한 이불 덮고 눕는 건,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주원은 구시렁거리며 도혁이 깔아 준 모포 위에 누웠다. 확실히 맨바닥보다는 편하긴 했다.
그의 옆에 누운 도혁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실실 웃었다.
“야, 우리 MT 온 거 아니야. 극기 훈련 온 것도 아니고.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선배님 옆에 누우니까 좋죠.”
“이도혁. 넌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 어린놈의 자식.”
주원이 도혁을 째려봤다. 그러자 도혁이 팔을 괴고 모로 누워 주원을 내려다봤다.
“뭘 봐.”
“선배님.”
“왜.”
“저 어려요. 맞는데,”
“그런데 뭐.”
“제 마음까지 어린 건 아니에요.”
도혁의 눈빛은 상당히 진지해 보였다.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이 아래 누워 있는 상황이라 약간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주원은 평소 하던 것처럼 도혁에게 면박을 주려 했다.
“네가 안 어리긴 뭐가 안 어려. 철딱서니 없는 주제에.”
“선배님.”
도혁이 서서히 몸을 숙였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코끝을 스칠 정도였다. 가벼운 땀 냄새와 어우러진 페로몬이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진한 이목구비, 자신을 뚜렷하게 내려다보는 눈빛. 주원은 그런 도혁이 낯설었다.
웃지 않는 도혁의 얼굴이란 게, 이렇게 진지했었나?
“주원 선배님.”
“이게 감히 뭐라는 거,”
“한 번 더 말할게요. 사랑해요.”
“…그만해.”
“선배님.”
도혁이 주원을 거듭 불렀다. 그러더니 주원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댔다. 손을 타고 쿵, 쿵 울리는 고동이 전해져 왔다. 주원의 얼굴에 열이 몰렸다. 너무도 노골적으로 살아 숨 쉬는 심장 박동이었고, 지나치게 뜨거운 가슴이었다.
“밀어내지 말아 줘요. 가깝게 다가와 주지는 못하더라도, 제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야… 너는 이런 상황에서 꼭,”
“네. 이런 상황에서도 선배님이 너무 좋아서 못 견디겠어요.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는… 이제 부족해서.”
도혁이 손등으로 주원의 뺨을 쓸었다. 그 손이 너무 뜨거워 주원은 속으로 놀랐다. 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였다.
“야,”
다음 말은 가로막혔다. 입술이 지척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주원은 얼어붙었다. 사고와도 같았던 첫 입맞춤과 다르게, 지금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한 대 때릴 시간도 있었고, 그럴 만한 명분도 있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호통을 쳐도 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요.”
마주친 눈빛이 너무 깊었다. 멍하게 있는 동안, 도혁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야, 너……!”
순간 입술이 닿았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는 밋밋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동작에 주원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
쪽. 다시 한번 입술이 맞붙었다. 주원은 꼼짝없이 두 번이나 입술을 빼앗긴 제 처지가 어이없었다. 그렇지만 아주 가까이 다가온 이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세상 가장 다정한 기운을 담은 이 갈색 눈동자를.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갈색 눈동자 안에 어린 달콤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 안에서 춤추는 애정은, 마치 끝없이 내리는 비 같았다.
“…부드럽다.”
도혁이 중얼거렸다. 한 손으로는 주원의 입술을 문질렀다.
“너… 너,”
“선배님, 방금 저 치려면 칠 수 있었죠.”
“……!”
“밀어내려면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었고요.”
“…….”
정곡을 제대로 찔린 주원은 말문이 막혔다. 이리저리 시선만 피하고 있으려는데, 도혁이 주원을 꽉 끌어안았다.
“야! 비켜.”
“선배님, 고마워요.”
“고맙긴 뭐가 고마워. 너 엄청 무거워, 빨리 비켜.”
“나 밀어내 주지 않아서……. 처음이잖아요, 이런 거.”
두근두근. 도혁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주원의 가슴에 전달되었다.
“민망하게 그런 거 좀 짚지 마.”
“사실이니까요.”
도혁이 소곤거렸다. 주원은 민망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난로라도 쬔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비켜!”
결국은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치 열기에 전염이라도 된 듯 주원의 심장은 도혁을 따라 뛰었다.
“나 잘 거니까 깨우지 마.”
주원이 등을 돌리며 몸을 웅크렸다. 이 공간 안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 * *
비는 밤새도록 내렸다. 도혁은 주원의 머리카락을 여러 차례 쓰다듬다가, 그의 등을 껴안고 잠들었다. 주원은 제대로 자지 못했다. 선잠을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그 이유는 빗소리가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도혁 때문이었다.
내가 어쩌자고 입술을 피하지 않았을까. 미친 짓거리 아닌가.
이성이 돌아오자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해 버린 입맞춤을 무를 재주는 없었다.
내일 아침 되면 어떻게 얘 얼굴을 보나. 주원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그에 반해 도혁은 아주 만족스러운 꿈이라도 꾸는지 쿨쿨 잘만 잤다.
얄미운 새끼. 감히 내 잠을 빼앗아 놓고 자기만 잘 자면 다냐. 주원은 오기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5분도 안 되어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의 반복이었다.
지겨운 폭우만큼이나 지겨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