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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24화 (13/115)

24화.

새벽이 되자 희미하게 동이 떠올랐다. 새벽을 알리는 빛이 작은 창으로 들어와 곤히 잠든 도혁을 비췄다. 주원은 그제야 곤히 잠든 도혁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잘 자는 녀석이 밉기도 했고, 또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지만 조용히 자고 있는 도혁이 조금은 귀엽기도 했다.

그렇게 절절하게 고백해 놓고는 애 같은 얼굴로 잘도 자네.

머릿속에서는 어제의 장면이 계속해 리플레이 됐다. 자신을 꽉 끌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던 체온도 마찬가지였다. 떨쳐 내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만큼 그 체온은 절실하고 끈질겼다.

‘선배님. 제가 어리다고 해서 제 사랑까지 어릴 거라고는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제발 멀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나한테 다가와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도망치지만 말아 줘요.’

그리고 이어진 입맞춤.

…평소 같았으면 힘으로라도 밀어내고 뒤통수를 한 대 갈겼을 텐데, 어젯밤은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던 도혁의 눈빛 때문에, 간절한 손길로 자신을 감싸 안는 그 몸짓 때문에.

“아…….”

돌이켜 보니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귈 것도 아니면서 뭐 하러 입술을 비벼. 미쳤었나. 이걸 빌미로 사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이게 바로 나쁜 남자라는 건가? 내가 바로 애먼 사람 설레게 한 다음에 내빼는 나쁜 남자? 아, 싫다.

주원이 두통을 느끼는 동안,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났다. 도혁이 몸을 뒤척이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주원은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흠흠, 일어났어?”

“네, 선배님…….”

도혁은 잠긴 목소리로 중얼대더니 대뜸 주원을 끌어안았다.

“뭐 하는 짓이야.”

“…냄새 좋아서요.”

“좋긴 뭐가 좋아. 비켜라.”

주원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소곤거렸다.

“뭐 어때요. 조금만 안고 있어요.”

귓가를 스치는 숨결이 너무 나직하고 뜨거웠다. 주원은 몸을 비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잖아요. 이렇게 벽이 두꺼운데…….”

“떨어져서 좀 말해.”

“철호 깬다면서요. 귀에 딱 붙이고 말해야죠.”

“야, 너 원래 이렇게 느끼했냐?”

참다 참다 더는 못 참겠네. 주원은 도혁의 명치를 팔꿈치로 팍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처럼 째려봐 주려고 고개를 휙 돌렸는데, 도혁이 손을 뻗어 왔다. 큰 손이 주원의 뺨을 감쌌다. 그윽한 눈빛과 함께였다.

“네, 느끼해요.”

도혁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주원은 지금이 또 한 번의 뽀뽀 타임임을 직감했다. 이번엔 진짜 도망쳐야 했다.

“하지 마!”

주원이 허둥지둥 자리를 뜨려 했다. 도혁은 팔을 펼쳐 주원을 제 품 안에 가뒀다. 주원은 윤철호가 깰까 봐 차마 소리도 못 지르고 도혁과 침묵 속의 레슬링을 벌였다.

* * *

“철호야, 일어나 봐. 이제 내려가도 되겠어.”

한참 만에 도혁의 품 안을 탈출하고 나서, 주원은 옆방으로 가 윤철호를 깨웠다. 윤철호와 두 사람은 생수로 얼굴을 씻고 바깥으로 나섰다.

어제 폭우가 쏟아졌다는 사실이 거짓말인 것처럼, 날씨는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땅이 젖어 있다는 점이 어제의 난리를 짐작게 할 뿐이었다.

“철호 형, 저한테 기대세요.”

“고마워.”

도혁이 여전히 상태가 안 좋은 윤철호를 부축하기로 하고, 주원이 앞서서 내려가는 길을 텄다. 날이 밝아 그런지 어제는 그토록 찾기 어려웠던 하산로가 잘 보였다.

“쉬었다 갈까요? 괜찮아요?”

“응, 괜찮아. 얼른 내려갈래.”

주원은 간간이 뒤따라오는 후배들을 돌아봤다. 도혁은 윤철호를 챙기느라 열심이었다. 겉보기엔 이렇게 근면 성실하고 선량하고, 마냥 순진해 보이는 놈이다. 그렇지만 어젯밤 자신을 끌어안고 사납게 입 맞추던 모습은…….

생각이 샛길로 샜다. 주원의 머릿속은 다시 도혁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찼다.

입술, 많이 뜨거웠지. 몸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껴안고 있을 뿐인데 불에 덴 것 같았으니까……. 만약에 조금 더 진하게 나를 만진다면,

“선배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 참이었다. 뒤에서 도혁이 자신을 불러 주원은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일이야.”

“저희 다 내려왔어요.”

“응?”

“어제 출발했던 지점이잖아요. 저기 등산로 안내판 있어요. 저기 구조대분들 보이는데요.”

“어……? 그렇네.”

주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헛생각을 하며 내려오다 보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흐른지도 몰랐다.

윤철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주원은 도혁을 한 번 힐끗 보고, 산꼭대기를 한 번 쳐다봤다. 참 별난 산행이었다. 저기서 도혁과 입술을 비비게 될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다.

* * *

조난 사건은 펜싱 국대 사이에서 무용담으로 남아 아주 가끔 회자되며 서서히 잊혔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주원에게는 산장에서의 하루가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어둑한 밤의 입맞춤을 떠올렸다. 다정함 그 자체였던 눈빛, 애절한 손길과 서툰 입술이 어젯밤 일처럼 생생했다.

기억이란 원래 날이 갈수록 휘발되는 존재일 텐데 왜 시간이 갈수록 산장의 기억은 선명해져만 가는지. 주원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그에 비해 도혁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스킨십도 늘었다. 아무렇지 않게 주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숙소에 있을 때 정신을 차려 보면 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가끔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다며 스스럼없이 손을 올렸다. 주원은 얌전히 그 손길을 받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정색하기를 반복했다.

정신 차려, 주원. 뽀뽀 한 번 했다고 휘말려 들지 마.

주원은 자주 자신에게 각성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도혁이 신경 쓰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생각의 바탕에는 도혁이 무섭다는 무의식이 깔려 있었다.

주원이 도혁을 무서워한다니. 지나가는 개가 짖을 일이었지만, 정말이었다. 그는 산장 사건 이후 도혁의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알파인 자신이 어린 알파 놈 품에 안겨 뽀뽀를 당했다. 이 명제만으로 혼란스러운데, 문제는 그때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입맞춤을 잊을 수 없었다는 점은 정말이지 큰 문제였다.

그러니 주원의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혼란과 부정, 복잡 미묘함으로 주원의 머릿속이 가득 찬 나날이 흘러가고, 멜버른 전지훈련이 다가왔다.

“여러분, 우리 멜버른 룸메 정해요.”

여느 날처럼 저녁 식사가 끝나고 4인방이 기숙사 로비에 모였을 때, 민석이 말을 꺼냈다.

“아, 맞다. 내일 출국이니까 오늘 정해야 하는구나.”

규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진천 룸메이트와 별도로 해외 원정이나 경기에 나갈 때마다 룸메이트를 바꾸는 게 펜싱 국대의 문화였다. 4인방 내에서 최대한 다양한 조합을 뽑아내 이렇게도 친하게, 저렇게도 친하게 지내도록 유도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번에도 도혁이 앱 쓸까요? 사다리 타기 프로그램요.”

“음, 아니야. 우리 이번엔 다른 방식 쓰자.”

규영의 말에 주원이 손을 내저었다. 도혁이 맨 처음 진천에 들어올 적에 그 앱을 통해 룸메이트가 되었다. 혹시나 이번에도 그 앱을 쓰면 또다시 그와 짝이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도혁의 말로는 제발 거리를 두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주원은 멜버른 전지훈련에서만큼은 도혁과 한방을 쓸 생각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옆얼굴로 쏟아지는 노골적인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주원은 비장하게 제안했다.

“우리 이번에는 완벽하게 우연에 맡기자.”

“어떻게요?”

“손바닥 뒤집기 알지? 그걸로 정해. 손등끼리 한 방, 손바닥끼리 한 방.”

“그것만큼 단순한 것도 없죠. 난 좋아.”

“나도.”

민석과 규영이 빠르게 찬성했다. 남은 건 도혁 한 명뿐이었다. 그는 잠깐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했다.

“좋아요. 해 보죠.”

저 녀석까지 찬성이군. 주원은 심호흡을 했다. 속으로는 도혁의 손 모양을 빠르게 읽어 반대 모양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동체 시력을 믿는 것이었다.

자, 해 보자고.

“하나, 둘, 셋!”

주원의 구령에 맞추어 네 명이 허공에 손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주원은 규영을 보며 그가 손등을 내밀 것을 추측하고서 손등을 내밀었다. 정말로 규영도 손등이었다.

됐나? 규영이랑 팀 된 건가. 주원이 재빨리 결과를 확인해 보니, 이게 웬걸. 도혁도 손등이었다.

“아, 안 맞았어. 다시 하자.”

그는 실망감을 추스르며 다시 한번 하나 둘 셋을 외쳤다.

이번에는 규영이 손바닥을 낼 것 같아, 잽싸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결과를 보니 규영과 자신이 손바닥, 도혁은 이번에도 손등이었다.

“아……!”

그런데 민석이 손바닥이라 팀이 짜이지 않았다. 주원이 턱에 호두를 만들며 도혁을 쳐다봤다. 그는 눈썹을 이리저리 찡그리며 얼굴로 각종 의사 표현을 하고 있었다.

주원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도혁이 제 손등을 들어 보여 주었다.

도혁은 눈을 깜빡이는 주원을 향해 재차 손등을 보여 주었다. 입 모양으로도 뭐라 뭐라 했다.

설마 지금, 자기 손등 낼 거라고 예고하는 건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딱 그런 것 같았다. 주원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내가 자기 따라서 손등 내밀어 주길 바라기라도 하는 건가? 같은 방 써 줄 줄 알고?

하, 그렇다면 사람 잘못 봤어. 난 지금 너랑 다른 방 쓰려고 필사적인 결심을 하고 나온 사람이라고.

주원은 두 눈에 힘을 주고 도혁을 똑바로 쳐다봤다. 도혁은 마치 기도하는 표정으로 주원을 쳐다봤다. 주원을 믿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뭘 믿고 저래. 하도 황당한 터라 주원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다시 해요. 자, 준비!”

규영이 주원의 손을 툭 쳤다. 주원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허공으로 손을 한껏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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