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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25화 (14/115)

25화.

이제 손을 내릴 타이밍이 됐다. 주원은 도혁의 손을 관찰했다. 그는 신호를 보낸 대로 손등을 보이려 했다.

그럼 그렇지.

주원은 손바닥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허공에서 도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애타는 눈빛으로 주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원은 속이 뜨끔했다. 이 상황에서 일부러 손바닥을 내밀면 못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야, 내가 내고 싶은 거 낸다는데 너 자꾸 왜 이래.

주원이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냈으나 도혁은 한결같이 불쌍한 눈빛을 만들어 보였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음속에서 두 명의 주원이 싸웠다. 이걸 어떻게 해. 눈 딱 감고 쟤랑 한 번만 더 같이 방 써? 아냐. 그랬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산장에서 뽀뽀한 거 잊었어? 아니, 못 잊었지. 근데… 그게 나빴냐고 하면 나쁘지 않았단 말야.

갈등이 치열해져만 갔다. 그 와중에 시간은 흘러 주원이 손을 내밀어야만 하는 타이밍이 다가왔다.

에라이, 모르겠다.

주원은 손등을 내밀었다.

“와, 이번에야 짝이 맞네. 나랑 규영이 형이 한방이고요, 채 선배랑 도혁이가 한방이에요. 진천이랑 똑같은 조합이네?”

민석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주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도혁을 쳐다봤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전 선배가 손등 내미실 줄 알았어요.”

“알긴 뭘 알아.”

“저 때문이셨잖아요. 저랑 같은 방 쓰시려고요. 맞죠?”

“뭐, 인마? 아니야. 그냥 낸 거야.”

“저랑 눈 마주치셨는데.”

“아니라니까?”

둘은 남들 들리지 않게 실랑이를 했다. 멀리서 보기에는 도베르만 한 마리와 골든레트리버 한 마리가 투닥거리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주원은 출국 짐을 싸면서 내내 후회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미우나 고우나 도혁은 또 한 번 제 룸메이트가 되었고, 전지훈련 동안 어떤 수작질을 걸어오더라도 거기에는 일정 부분 자신의 책임이 있었다.

“내 팔자야…….”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캐리어를 채웠다.

한편 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산장 이후 주원과 서먹해질까 겁이 났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룸메이트 정하기 과정에서 과감하게 대시를 하자 그걸 받아 주기까지 했다.

설마 이거 긍정적 신호인가. 도혁의 가슴은 연일 뛰었다. 주원도 자신을 슬슬 좋아해 주는 게 아닐까, 기대감으로 가슴이 가득 차 풍선처럼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 사건을 두고 주원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고, 도혁은 행복한 꿈을 꾸며 진천에서의 마지막 밤이 흘러갔다.

* * *

이튿날, 선수들은 인천공항에서 다큐 7일 제작진을 만나게 됐다.

“안녕하세요! 밀착 취재 다큐 7일입니다. 이번에 저희가 펜싱 국대의 전지훈련 기간 중 7일간 밀착 취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PD가 촬영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프로그램이 워낙 유명해 선수들이 이해하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자유롭게 행동하시면 돼요. 주 5일 훈련하고 주말에는 자유 시간을 가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마저도 자연스럽게 보여 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촬영하고 편집해 방영할 겁니다.”

“저희가 노는 것도 다 찍어 주신다고요?”

“물론입니다. 국대팀이 굉장히 친하다고 알려져 있어요. 스스럼없이 놀고 여행하는 모습도 많이 보여 주세요.”

도혁은 꽤 흥미를 느끼는 눈치였다. 주원은 미디어에 참여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고, 펜싱을 대중에게 알리려면 어느 정도 얼굴이 팔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촬영에 적극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항공기에 올랐다.

주원은 자꾸만 자신의 어깨에 기대려는 도혁을 번번이 밀어내며 여덟 시간의 비행을 마쳤다. 멜버른은 호주 속의 영국이라는 별칭답게 상당히 흐리고 습했다.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야외 촬영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코치진 역시 야외 훈련 일부를 실내 훈련으로 변경했다.

“원래 멜버른은 날씨가 안 좋아. 그래도 갈 만한 데가 많으니까 내가 추천해 줄게.”

셔틀버스 안에서 민석이 도혁에게 멜버른의 기후와 그에 맞는 관광지를 추천해 주었다. 도혁은 깨알같이 그의 가르침을 메모하며 주원과 갈 곳들을 정리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좋다. 이 말씀이시죠.”

“응, 거기 바위들 보면 되게 신기하고 멋있어. 근데 혼자 가려고?”

“어… 아뇨. 주원 선배랑 가고 싶어요.”

도혁이 저 멀리 떨어져 앉은 주원을 살피며 말을 꺼낼 때였다.

“이도혁 선수랑 채주원 선배가 단둘이 투어 가신다고요?”

귀 밝은 다큐 제작진이 도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신이 나 도혁에게 계획을 캐물었다.

“채 선수와 함께 움직이시려고 하는 거죠? 저희가 도와 드릴까요.”

“아, 어떻게요?”

“다 방법이 있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주원에게 걸어가서 말을 걸었다.

“채 선수님, 오늘 낮에 잠깐 자유 시간이시잖아요. 이도혁 선수랑 간단하게 투어 어떠세요?”

“도혁이…랑요?”

“네, 저희가 렌터카랑 셀프 캠 준비해 드릴게요. 두 분이 자유롭게 동영상 찍어오시면 돼요.”

하필이면 또 도혁과 한 조가 되었다니 기분이 영 찝찝했지만, 주원의 입장에서는 방송국에서 시킨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바람이나 쐬다 오자. 항상 현지 훈련 올 때마다 여행 한 번 못 즐기고 죽도록 땀만 빼다가 돌아가곤 했는데, 잘됐지.

“네, 좋습니다. 셀프 촬영하고 오겠습니다.”

주원이 오케이 함으로써 일정이 픽스되었다. 스태프가 차량과 캠코더, 간단한 삼각대를 준비해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야 할 코스랑 내비게이션은 차 안에 설치해 두었어요. 그레이트 오션 로드로 드라이브 다녀오실 거라고 했죠? 그냥 일상적인 대화 나누시고, 너무 카메라 의식 안 하시면서 지내시면 되세요.”

“스태프님은 같이 안 가시는 건가요?”

“저희는 김민석 선수랑 안규영 선수님 맛집 투어 따라가기로 했어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스태프가 멀어져 갔다. 주원은 촬영 스태프 없이 셀프 카메라를 찍을 생각에 막막했으나, 어쨌든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도혁이 조수석에 탔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시가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착하면 오후 늦은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빨리 가야겠다.”

“네. 선배님, 잠깐 인터뷰 타임 가질게요. 여기 카메라 보면서 한 마디 해 주세요.”

“어, 전지훈련 와서 이렇게 외출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풍경이 기대됩니다.”

“여러분,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늘 날씨도 좋은 편이고, 주원 선배랑 외출하니까 기분도 반짝반짝 맑네요.”

도혁의 카메라에 비치는 주원의 모습은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근사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대충 걸친 셔츠도,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도 도혁의 눈에는 최고로 멋졌다.

“오늘 저희가 둘러볼 코스는 멜버른 시티를 떠나서 그레이트 오션 로드라는 해안 도로를 달리고요, 12사도 바위라는 아주 멋진 장소로 갈 거예요. 정말 재미있겠죠?”

멜버른 시가지를 벗어나서 해안 도로로 접어들자 풍경이 탁 트였다. 열린 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와, 너무 좋아요, 선배님.”

“나도 간만에 드라이브하니까 좋다.”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쌩쌩 달리며 거침없이 해안 도로를 누볐다.

그들은 가끔씩 차를 세워 놓고 내려 사진을 찍었다. 서로를 한 컷씩 찍어 주고, 도혁은 주원에게 멋진 사진을 건지겠다는 일념으로 거의 바닥에 엎드려 전문 포토그래퍼같이 굴었다. 주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고, 도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선배님, 예뻐요.’라고 말했다.

차마 방송에서 욕을 할 수 없었던 주원은 눈으로 욕을 했다.

“우리 같이 사진 찍어요, 선배님.”

“…그래.”

도혁이 카메라를 들이밀자, 주원은 마지못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도혁이 주원의 어깨를 꽉 붙들고 자기 옆으로 끌어당겨 사진을 찍었다.

훤칠한 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척이나 잘 나왔으나, 주원은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자신의 꼴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반면에 도혁은 사진을 인화해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 놓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사진을 찍었다가, 쉬었다가를 반복하며 한 시간여를 더 달린 끝에 관광객들로 붐비는 스폿이 나왔다.

“여기가 12사도 바위인가 봐요.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 모양으로 봤을 때 맞는 것 같은데요.”

도혁의 말에 주원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해안가로 다가갔다. 인파가 몰려있는 곳을 헤치고 다가가니 덱으로 조성된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서 바다를 보니, 바다 안에 길쭉한 바위가 여러 개 솟아올라 웅장한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짙은 구름 사이로 노을이 지며 한 줄기 빛을 바위에 드리웠다. 마치 대담한 터치로 그려 낸 예술가의 명작 같았다.

“와…….”

도혁과 주원은 셀프 카메라에 풍경을 담는 것도 잊고 그저 감탄했다. 넋 놓고 바라만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진짜 멋있다.”

“저도요. 너무 좋아요.”

두 사람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며 잠시 휴식을 즐겼다. 서로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고 칼싸움 흉내를 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지나 주변이 캄캄해졌다.

“슬슬 차로 돌아갈까?”

“조금만 더 있다 가고 싶은데.”

“시내 복귀해야지.”

주원은 도혁을 달래며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거는데 차체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뭐지? 주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시동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피시식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예 무반응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실내등을 전부 켜고 계기판을 살피려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아까 내리기 전에 내가 실내등을 껐던가? 생각해 보니 끄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렌터카의 배터리가 몇 시간 동안 고스란히 켜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거 설마 말로만 듣던… 배터리 방전? 주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형, 무슨 일이에요?”

도혁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계기판을 힐끔거렸다.

“우리 배터리 나간 것 같다.”

“네?”

주원이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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