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도혁이 렌터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변은 너무 멀고 또 밤이 늦어 긴급 출동을 해 줄 수 없다는 소리뿐이었다. 전화를 끊은 도혁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저, 선배님… 여기서 자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어쩔 수 없으니까요. 이 근처 호텔이 있는지 찾아봐야죠.”
도혁은 내심 이 상황이 기뻤다. 이건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클리셰처럼 다루어지는 상황이 아닌가. 기상 악화로 어쩔 수 없이 한방에 묵게 되는 이런 상황……!
잘하면 오붓한 분위기가 형성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혁은 들떴다. 겉으로는 곤란한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기대심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아. 차 안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일단 멜버른에 연락하고 여기서 하루 보낸다고 말하자고요.”
“알겠어. 내가 전화할게.”
주원은 장 감독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차가 고장 나서 꼼짝을 안 하는데요, 예. 그런 상황입니다. 렌터카 회사에서는 너무 멀다고 긴급출동을 못 해 주겠다고 합니다. 차를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상황이라……. 네, 도혁이는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감독은 알아서 살아 돌아오되 절대로 다쳐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꼼짝없이 이 동네에서의 하룻밤이 결정되었다.
주원은 이마를 짚었다. 오늘 밤 안으로 멜버른 시티로 못 돌아간다니 답답한 소리였다. 스케줄이 꼬인 건 둘째 치고 도혁과 또다시 외딴곳에 고립되었다는 사실이 스트레스를 줬다.
“하아… 일단 인근에 호텔이 있는지부터 찾아봐야겠네.”
“제가 얼른 찾아볼게요. 아, 있다. 여기서 한 3km 걸어가면 관광호텔이 하나 나와요. 시간 늦었으니까 우리 빨리 가요, 선배님.”
도혁이 핸드폰으로 맵을 보여 주며 주원을 재촉했다. 주원은 하는 수없이 간단한 짐만 챙겨 차에서 내렸다. 도혁이 앞장을 서고 주원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갓길로 걸었는데, 길이 너무 어두워 속도가 좀처럼 붙지 않았다.
구름이 달빛을 가려 핸드폰 플래시로는 턱도 없었다. 가로등도 없는 갓길 바로 옆이 방파제라 발이라도 헛디디면 큰일이 날 상황이었다. 거센 파도 소리가 이따금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를 지워 버렸다.
잘 가던 도혁이 우뚝 멈춰 서 뒤를 돌았다.
“왜 그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선배님.”
주원도 우뚝 멈춰 섰다.
“길이 많이 위험해요. 손 이리 주세요.”
“무슨 소리야.”
“너무 어둡기도 하고… 또, 선배 발소리가 안 들리니까 불안해요.”
주원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건장한 성인 남자이다 못해 운동선수다. 그런 나를 마치 손바닥에 올려놓은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는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얼른 손 줘요.”
“어어.”
당황스럽게도 손이 잡혔다. 어두워서 다가오는 걸 못 본 탓이었다.
“야.”
“…한 번만요.”
도혁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주원은 얼떨결에 그 손을 따라갔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도혁이 꽉 잡아 오는 손이 불안함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손을 뿌리치기 애매했다.
그래. 어둡고 위험하니까 일단 잠깐만 손을 잡자.
“잠깐만이다. 밝은 데 나오면 손 놓을 거야.”
그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자신은 여전히 도혁과 정반대에 서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진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마음의 향방은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아직은 도혁도 주원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 * *
그렇게 걷기를 얼마가 지났을까. 거의 30분 이상 걸었을 때쯤, 모퉁이를 돌자 느닷없이 불빛이 보였다. 주원이 호텔을 보고 외쳤다.
“어! 호텔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깔끔한 느낌이었고 하룻밤 묵어 가기에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아, 다행이에요.”
도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노숙은 면했네.”
“전 선배랑 함께라면 노숙도 상관없지만, 선배는 소중하니까요. 얼른 들어가요.”
“그래.”
주원은 도혁의 손길에 이끌려 호텔 정문까지 갔다.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우리 왜 아직도 손잡고 있어?”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이제 좀 놔주라.”
“싫,”
“놔.”
도혁은 머쓱해하며 주원의 손을 놓았다. 주원은 불만 어린 헛기침을 하며 도혁과 거리를 두고 걸었다.
문을 열고 프런트로 향하자 직원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하룻밤 투숙하려 합니다. 방 있을까요?”
“행운아시네요. 주말이라 거의 만실인데 마지막 방이 딱 하나 남았어요.”
“참 다행이네요. 그럼 그 방을 내주세요.”
“그런데 그 방은 더블베드 타입입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침대가 하나라고요?”
“마지막 딱 하나 남은 객실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주원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혁과 한 침대에 누워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다른 호텔을 찾아 떠나기는 무리였고, 몸도 너무 피곤했다. 그는 고심 끝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체크인하죠.”
두 사람은 키를 받아 최고층으로 올라갔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끝 방으로 들어서니 널찍하고 화려한 공간이 나왔다. 창가에는 시폰 커튼이 하늘거렸고, 더블베드 위에는 장미 꽃잎이 풍성하게 뿌려져 있었다. 커플용 객실에 당첨된 것이다.
“와, 너무 예쁘다. 여기서 우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가요.”
도혁은 상기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두통이 와, 주원은 이마를 짚었다.
“막내야, 이 꽃잎 하나도 남김없이 치워라. 커튼도 싹 걷고.”
“그냥 이대로 자면 안 돼요?”
“절대 안 돼.”
주원은 정색하며 가방을 뒤졌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두통약 한 알과 알파용 페로몬 억제제 한 알을 꺼냈다. 약을 꿀꺽꿀꺽 삼키는 그를 보며 도혁이 말을 건넸다.
“선배님도 I브랜드 억제제 드시네요.”
“우성들은 대부분 I브랜드 거 먹으니까. 너도야?”
“네.”
도혁도 가방에서 주섬주섬 약병을 꺼냈다. 그는 약병을 탈탈 털어 세 알을 꺼낸 다음 물과 함께 삼켰다.
“넌 세 알이나 먹네?”
“전 좀 많이 먹어야 하는 체질이라서요. 우성치고도 유별나게 페로몬이 강한 편이라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새삼스럽게 서로가 알파임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막내야.”
주원이 먼저 정적을 깼다.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지금 하면 괜찮겠다 싶었다.
“너는 알파면서 왜 나 좋아하냐?”
알파라는 종족은 그 특성상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항상 페로몬을 갈무리해야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억제제를 먹어야 하며, 러트 사이클 주기를 꼼꼼하게 챙겨야 했다.
무엇보다도 본능적으로 오메가에게 끌리게끔 정신과 육체가 설계돼 있었다. 그건 주원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처음엔 존경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깨닫게 됐어요. 선배랑 단둘이만 있고 싶고, 선배의 모든 걸 알고 싶다는걸요. 제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이 감정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것쯤은 알아요.”
도혁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주원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냥… 그냥 좋아요. 선배님이 저한테 다정하게 대해 주셨을 때는 그게 너무 설렜고, 가끔은 거리를 두니까 그건 또 나름대로 속이 타요. 근데 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몰라요. 처음이라서요.”
“…내가 처음이야?”
“네, 이런 감정 처음이에요. 당연히 고백도… 처음이고요.”
“설마 그럼 뽀…….”
“뽀뽀도 처음 맞아요.”
주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어쩔 줄 몰라 하길래 연애를 별로 안 해 봤나 싶긴 했지만 생전 처음일 줄이야.
“그러니까 저는 선배 포기 못 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포기하는지 몰라서 못 합니다.”
“…….”
“이렇게 한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떨려 죽겠는데, 어떻게 포기해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선후배로 지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너 안 받아 주면. 이대로 평생 나 쫓아다닐 거야?”
“네. 백 번이든 천 번이든 고백할 거예요. 100년도 자신 있다고요.”
도혁의 눈빛은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애정과 진실됨이 얼마나 깊은지 충분히 느껴졌기에, 주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뭐, 찔러보는 건 네 자유고.”
펜싱은 공격과 수비로 이루어진 스포츠다. 상대방이 돌진해 오는 것 자체를 막아 낼 수는 없단 소리다.
“그걸 몇 번이고 막아 내는 것도 내 자유지.”
하지만 상대의 칼을 쳐 내는 것이라면, 주원의 주특기다.
“네가 상대를 얼마나 잘못 골랐는지는 곧 깨닫게 될 거야. 그래도 페어플레이는 해 줄게.”
“정말이요?”
도혁의 얼굴이 조명이라도 켠 듯 환해졌다.
“어, 비겁하게 도망치지는 않겠단 의미야. 널 쥐어팼으면 팼지, 네 마음 부정하는 짓은 그만할게.”
진심이었다. 도혁의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된 지금, 정정당당하게 그를 거절하는 한이 있어도 비겁하게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주원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러면요, 선배님.”
도혁이 목소리를 깔았다.
“또 뭐. 할 말 남았어?”
“약속해 줘요.”
“방금 말로 했잖아. 근데 뭘 더 하라는 거야.”
가까이서 본 도혁의 얼굴이 낯설 만큼 진지했다. 주원은 속으로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도혁이 한 걸음 다가와 주원의 양 팔목을 잡았다.
“어어, 너 뭐 해.”
저절로 뒤로 물러난 주원은 그대로 침대까지 뒷걸음질 쳐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후퇴한 그는 결국 침대에 앉혀졌다.
“야!”
“…형.”
부름이 낮고 깊었다. 도혁이 손을 들어 주원의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손등이 아주 뜨거워서 주원은 흠칫했다.
“너 너무 뜨겁,”
“…약속해 줘요.”
바로 코앞에서 바라본 얼굴이 너무 간절해 주원은 시선을 피했다. 부담스러웠다.
“…그 약속 어떻게 하는 건데.”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자는 건가.
“이렇게요.”
한순간 주원은 목 뒤를 잡혔다. 그리고 도혁의 품 안에 흡수되듯이 빨려 들어갔다. 거센 폭풍의 한가운데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읍……!”
입술이 제대로 틀어 막혔다. 이윽고 뜨거운 키스가 주원을 덮쳤다. 오롯이 상대를 탐하고 원하는 단순한 키스였다. 하지만 그 꾸밈없는 날 것의 느낌이 온 혈관으로 퍼져 나가자, 주원은 점차 온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내가, 얘한테 열기를 전염당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