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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27화 (16/115)

27화.

머릿속에 폭탄이 터지는 듯했다. 뭐라도 붙잡고 매달려 이 미칠 듯한 느낌을 분산시키고 싶었다. 주원은 도혁의 등을 더듬어 그의 티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도혁은 그 손에 깍지를 꼈다. 악력이 너무 강해 손마디가 저릿하게 아팠다. 그 감각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하아, 하아…….”

“…….”

잠깐 침묵이 흘렀다. 주원은 찰나의 시간 동안 치열하게 갈등했다. 잘 알고 있다. 지금 눈을 감아 버리면 수락의 의미가 된다는 것쯤은.

“…선배님.”

도혁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너무나 낮아 귓가에 진득하게 묻어나는 톤이었다. 그가 주원의 젖은 입술을 쓸었다. 주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가 눈을 내리까는 순간을, 도혁은 놓치지 않았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거의 상대를 삼켜 버릴 듯한 키스였다. 주원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키스를 받아 삼키며 도혁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전신이 떨려 와 견디기가 어려웠으니, 매달릴 곳이라고는 도혁뿐이었다.

어리다는 말 취소. 이 자식, 하나도 안 어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로 주원이 내린 결론이었다.

* * *

이튿날, 도혁은 눈이 부셔 잠이 깼다. 어젯밤 주원의 명령 때문에 커튼을 싹 걷어 놓은 탓에 창문 가득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날이 밝았구나.

멜버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찾아왔지만, 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그래도 선배랑 키스했다. 뽀뽀도 아니고 키스……! 그것도 엄청 오래 했어. 한 10분 했나? 아냐, 15분에서 20분 사이……! 한 바우트에 맞먹는 시간 동안 한 것 같아.

도혁은 눈가에 주름이 생기도록 활짝 웃은 다음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 옆자리에서 곤히 잠든 주원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햇빛이 비치는 게 싫은지, 그는 자꾸만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려 했다. 도혁은 커다란 손을 들어 주원의 얼굴에 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곧 찌푸린 얼굴이 부드럽게 펴졌다.

한참 동안 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도혁은 룸서비스를 시켰다. 잠시 후 직원이 벨을 누르자 주원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뭐야, 누구야…….”

“깼어요? 룸서비스 좀 시켰어요. 형 아침 드시라고요.”

“뭐 이런 수고를 다 했어.”

“제가 잘 챙겨야죠.”

주원은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고 도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나 아침에 일어나면 엄청 배고픈 스타일이야.”

“잘 알아요. 얼른 드세요.”

“약부터 먹고.”

주원은 어젯밤 차에서 가져온 짐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알파용 억제제를 한 알 꺼내서 주스와 함께 먹었다.

“형, 그거 하루에 한 알 먹는 약 아니에요? 저야 한 번에 세 알이지만… 형은 한 알씩 먹는다면서요.”

“곧 러트라서.”

“아, 그러시구나.”

“아무 때나 러트 안 터지려면 아침 점심으로 끼니마다 두 알씩 먹으라고 의사가 그랬거든.”

알파의 러트 사이클은 개인마다 달랐지만 통상적으로 한두 달에 한 번꼴로 찾아왔다. 이때 약을 잘 챙겨 먹으면 페로몬이 억제되어 본격적인 러트 사이클을 맞이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저 하루 이틀 정도 페로몬이 폭발하고 공격성을 띠는 정도로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 I사 억제제의 좋은 점이었다.

만약에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다면, 자연적으로 러트가 찾아오게 된다. 그러면 그 하루 이틀을 지옥처럼 보내야 한다. 온몸이 타들어 갈 것처럼 열기가 오르며, 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심한 경우 필름이 끊긴 채 감당할 수 없는 하룻밤 사고를 치기도 했다.

이 같은 불상사를 피하고자 알파들, 특히 알파 운동선수들은 칼같이 약을 챙겨 먹었다. 그중에서도 I사의 약이 유명한 이유는 이 회사에서 나오는 형질인용 억제제들이 전부 도핑 허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넌 언제야?”

“네?”

“다음 주기 언제냐고.”

“저는 다음 달 중순 정도요.”

“우성이니까 규칙적이겠네.”

“네, 발현한 뒤로는 항상 그랬어요. 약도 꼬박꼬박 먹고요.”

도혁 역시 열다섯에 발현한 이후로 늘 억제제를 챙겨 먹었다. 딱히 만나는 오메가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운동선수이니만큼 철저한 몸 관리가 중요한 탓이었다. 러트에 휩쓸리면 그동안 쌓아 올린 컨디션이 한순간에 망가지는 일이 흔했다. 따라서 알파 선수들은 거의 습관처럼 약을 복용했다.

“불미스러운 일은 없겠네. 주장으로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주원은 도혁의 대답이 맘에 들었다. 그들은 한 상 가득히 차려진 조식을 먹으며 여유를 만끽했다. 창밖으로는 맑은 날씨가 펼쳐져 있고,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풍경. 분위기는 아주 평화로웠다.

모든 게 완벽했다. 렌터카 회사가 A/S 출동을 해 차량을 교체해 줄 때 아주 행복했고, 해안 도로를 타고 경치를 즐기며 멜버른 시티로 돌아올 때만 해도 좋았다. 셀프 카메라로 인터뷰도 하고, 장난스럽게 서로의 모습을 찍어 줄 때도 즐거웠다.

하지만 캠프로 복귀해 장광철 감독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많이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주원이랑 도혁이 이리 좀 와 봐라.”

회의실로 두 사람을 불러다 앉힌 장 감독의 얼굴에는 난처함과 착잡함이 뒤섞여 있었다. 주원은 유례없이 어두운 그의 표정을 보며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감독님.”

“실은 연맹에서 긴급 공지가 도착했어. 너희에 관한 거다.”

“저희에 관한 일이라니……. 갑자기 무슨 일이죠. 설명 부탁드립니다.”

“실은, 며칠 전에 제네바에서 펜싱 파이널 컵이 있었잖냐. 거기서 도핑 문제가 터졌다. 메달 박탈당했어.”

“메달 박탈이라니……. 혹시 불법 약물을 했다는 겁니까?”

주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도핑 이슈라면 스포츠계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게 말이다. 실은 남성 호르몬이나 근육 강화제 같은 약물이 아니라… 페로몬 억제제 때문이었어.”

“네?”

“지금 문제가 되는 선수가 우성 알파야. 어렸을 때부터 억제제를 장기 복용해 왔는데, 이번에 세계 펜싱 연맹에서 이 약물을 도핑 약물로 분류하기로 했다고 한다.”

주원의 눈이 커졌다.

“억제제가 도핑 약물이라니, 어떻게 그런 결정이 내려질 수가 있죠. 형질인 선수들한테는 의학적으로 필수적인 품목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선수 기량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를 내세웠어. 소문에는 베타 선수들이 몇 년 동안 치밀하게 계획 세우고 로비한 결과라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너희가 알파라는 거고, 이제부터는 억제제를 먹을 수 없다는 거야.”

주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I사에서 나온 우성용 억제제도 당연히 안 되겠군요.”

“맞다. 우리 연맹에서도 오늘부로 너희한테 적어도 올림픽 때까지 약을 끊게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 I사 것이든 어디 것이든, 다 안 돼. 이건 도혁이도 마찬가지다.”

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했으나, 이미 결정된 사항을 거스를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도핑 테스트에 걸리면 올림픽 메달이고 뭐고 다 날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약 끊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독님.”

“그래. 불편하겠지만 협조 좀 해 주라. 아, 맞다. 그렇게 되면 주원이 러트가 언제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꼴이고요.”

“그렇구나. 도혁이는?”

도혁은 달력 앱을 열어 본 다음 대답했다.

“저는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5주 뒤에 오고요, 제 주기는 6주에 한 번입니다.”

“알겠다. 그럼 각자 몸 관리 잘하고, 서로 필요한 것 있으면 도와주면서 지내.”

“예, 감독님.”

“네.”

장 감독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주원은 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봤다. 3주 후면 전지훈련이 다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 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날 것의 러트를 맞이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지만,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며칠 끙끙대는 게 메달 박탈보다는 천 배 나았다.

이도혁은 이도혁 알아서 하겠지. 나랑 주기도 전혀 다르고, 어차피 알파끼린데 영향 주고받을 일도 없을 거다.

알파, 그것도 우성 알파의 러트 주기는 웬만해서 흔들리지 않는 법이었다. 주원은 발현 이래 늘 규칙적이었던 자신의 주기를 믿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좀 하겠지만 감독님 말씀 듣자.”

“네, 그래야죠.”

“이제부터 약 안 먹는다고 하니까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별일이야 있겠어.”

주원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후배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네, 빨리 적응해야겠어요.”

도혁 역시 해맑게 웃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대표팀은 훈련장에 촬영진을 최소한으로 들이고, 집중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이도혁. 한쪽 다리 들고 스쿼트 100개.”

“예!”

“균형 무너뜨리지 말고 버텨.”

박 코치가 민석과 규영을 지도하는 동안 주원이 도혁을 담당했다. 한쪽 다리를 옆으로 뻗고 한 발로만 균형을 지탱하면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작을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는데, 도혁은 이를 악물고 동작을 수행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고 주원이 한쪽 발목을 잡고 기합을 넣어 줬기 때문이었다.

“좀 더 깊게 앉아. 그렇지.”

“으윽!”

“아파도 참아. 찢어지도록 아파야 근력이 자라는 거야. 알지?”

“네!”

후우, 후우. 도혁은 호흡을 조절하면서 스쿼트 100개를 해 냈다. 다음으로는 주원의 다리를 잡아 줄 차례였다. 주원이 바닥에 반쯤 앉아 자세를 취하고 한쪽 다리를 옆으로 뻗었다. 반바지를 입어 탄탄하게 근육이 자리 잡은 모양이 잘 보였다.

도혁은 마른침을 살피며 하얀 발목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하지만 발목을 선뜻 움켜쥐기가 쉽지 않았다.

“뭐 해. 다리 안 잡고.”

“아, 네.”

“인간적으로 훈련 시간에는 사심 담지 말자.”

“…죄송합니다. 딴생각 안 할게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네. 너 조금 이따가 100번 더 하자.”

“네?”

“벌이야.”

도혁은 도합 200개의 스쿼트를 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잔뜩 펌핑된 다리를 이리저리 주무르며 쫙쫙 펴고 있는 그에게 박 코치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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