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오늘 한국체육회 친선의 밤 열린다. 다들 옷 갈아입고 시내 호텔 갈 준비 해.”
“친선의 밤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도혁이 눈을 크게 떴다.
“도혁이는 처음이라 모르겠구나. 여기 멜버른 스포츠 콤플렉스에 우리 말고도 승마팀이랑 배드민턴 팀도 와 있잖아. 각 대표팀 간에 소통하자는 의미로 한국체육회가 한 번씩 자리를 마련하거든. 오늘 밤에 호텔에서 가든파티 할 거야.”
“진짜요? 재밌겠다.”
“너희 정장 다 챙겨 왔지? 그거 입고 멋 좀 내고들 나가라. 단체 사진도 찍을 거고 다큐 촬영 팀도 같이 따라붙을 거니까.”
“네!”
도혁은 파티라는 말에 신이 났다. 그는 후다닥 호텔로 달려가 씻은 다음 한국에서 가져온 정장을 걸쳤다.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니, 태어나서 거의 처음 입어 보는 차림이 영 어색했다. 넥타이도 삐뚤빼뚤 매듭지어져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원이 도혁의 목을 가리켰다.
“막내, 넥타이 다시 매.”
“이거 틀리게 맨 거예요?”
“어, 첫 매듭부터 엉망이네.”
“선배님이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한 번만요.”
“맨날 한 번만이래.”
그런 식으로 뽀뽀도, 손잡기도 다 가져갔지. 툴툴거리는 주원을 향해 도혁이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언제요?”
“됐다. 말을 말자.”
주원이 도혁 앞으로 바짝 다가서 그의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도혁의 가슴이 여지없이 뛰었다. 그런 그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주원은 별말 없이 넥타이를 매듭짓는 데 열중했다. 그 덕분에 도혁은 주원의 내리깐 속눈썹을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머리카락과 목덜미에서 은은한 향이 풍겨 나왔고, 기다랗고 우아한 손가락 끝에서도 페로몬이 묻어났다.
“저기요, 선배님.”
“어.”
“…약 안 드시니까 향이 좀 짙어지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억제제 싹 끊었으니까.”
주원이 억제제 복용을 중단한 지 만으로 사흘이 지났다. 처음에는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어색했으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는 약 없이 은은하게 페로몬을 흘리고 다니는 것에 조금씩 적응 중이었다.
어차피 항상 보는 선수진과 스태프 중에 형질인은 도혁과 주원 두 명뿐이었으므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너도 냄새 좀 진해졌어.”
“아, 그렇죠?”
“응. 오늘 오메가 선수들도 오는 자리니까 행동 조심하고. 자, 다 됐다.”
넥타이가 멋지게 마무리되었다. 도혁은 깔끔한 매듭을 보며 감탄했다.
“선배, 이런 것도 잘하시네요.”
“칭찬은 됐고, 이제 나가자.”
“네.”
두 사람은 로비로 내려가 펜싱팀 사람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인근에 있는 호텔의 야회 연회장이 행사 장소였다. 파티장에 들어서자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인공 분수 소리가 시원하게 깔렸다.
선수들은 저마다 정장과 드레스 차림을 뽐냈지만, 분위기는 쾌활하고 격식이 없었다. 테이블이 수십 개 놓인 잔디 정원에는 한국인 선수들이 종목 상관없이 뒤섞여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와, 맛있는 거 많다.”
규영과 민석은 B로그에 담을 영상을 찍기 위해 뷔페 코너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주원은 도혁을 데리고 한국체육회 간부들에게 인사치레를 하러 갔다. 정신없이 격려와 박수, 명함을 받고 나니 어느덧 한 시간이 흘렀다.
“선배님, 배고픈데 우리도 뭐 먹어요.”
“그래, 그러자.”
아까부터 뷔페 코너 한가운데 있는 비프스테이크가 눈에 들어오던 참이었다. 도혁은 주원의 옷소매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 스테이크 코너로 향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그 사람과 도혁 사이에 가벼운 충돌이 일어났다.
“이런, 죄송합니다. 못 봤어요. 제가 치려고 친 게 아닌데, 어쨌거나 정말 죄송합니다.”
도혁보다 상대방의 키가 한참 작아 미처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다.
“아니에요. 일부러 부딪친 거라서요.”
“뭐라고요?”
도혁은 이상한 소리를 하는 행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작고 마른 체형에 얼굴이 상당히 예쁘장한 것으로 보아, 남자 오메가 같았다.
“전 승마 선수 양지언이라고 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선수님, 실례 많았습니다.”
“가지 말고 같이 샴페인이라도 마셔요.”
“네?”
“말했잖아요. 일부러 부딪친 거라고.”
“그게 무슨……?”
“바쁘지 않으면 한잔 받아요. 이거 무알코올이에요.”
양지언이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 잔을 건네며 배시시 웃었다. 그 누가 봐도 영락없는 수작질이었다. 하지만 도혁은 그 신호를 읽지 못한 탓에 그저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이런 걸 저 왜 주시는 거예요?”
“왜냐니. 자세히 듣고 싶으면 이리 좀 와 봐요.”
“네? 저는 일행이 있는데요.”
“그럼 일행분도 같이 오든지.”
양지언이 도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도혁은 매너 없는 불청객과 실랑이를 벌이며 구원 투수를 바라듯 주원을 쳐다봤다. 주원은 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서 샴페인을 홀짝거렸다.
그런데 묘하게 술맛이 썼다. 분명히 달달한 품종으로 만들었고, 알코올도 안 들어갔다고 했는데, 왜지?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음료는 더럽게 맛이 없었고, 주원은 저 멀리 끌려가는 후배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런 와중에 도혁은 양지언에게 붙들려 파티장 구석으로 끌려왔다.
“핸드폰 있어요?”
“네, 여기 손에 들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왜요.”
“전화번호 따려고.”
“제 번호를요? 왜?”
“마음에 드니까.”
양지언은 씩 웃으며 도혁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자기 번호로 전화를 걸어 도혁의 번호를 땄다.
“저기요!”
“실은 SNS에서 처음 봤어요. K대학 펜싱부 아련남이라고 올라온 사진도 다 봤고. 호주 온다는 소식 듣고 이날만 기다렸는데, 몰랐죠?”
당연히 모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쯤 되면 도혁도 양지언의 수작질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혁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얄팍한 수를 쓰는 오메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오히려 갑자기 핸드폰을 가져가는 행동이 당황스럽고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내놔요.”
도혁은 황당함에 다시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따인 번호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왜 저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남의 핸드폰 가져가지는 마세요.”
“제가 너무 저돌적이었나요?”
“저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도혁이 핸드폰을 잡아채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양지언은 만만치 않은 집념의 소유자였다. SNS를 통해 도혁에게 꽂힌 뒤로 모든 것을 찾아본 상황의 그였다.
내가 얘 한번 꼬셔 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었는데,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아?
“그래서?”
그는 원래부터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며 도혁에게 반문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제법 귀엽고 사랑스러운 포즈였다. 이른바 양지언의 주특기였고, 이렇게 하면 넘어오지 않는 알파가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애인 없다던데. 제가 다 조사해 봤어요. 애인 없는 거 맞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제 번호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에요.”
양지언은 옆에 놓여 있던 조각상에 팔꿈치를 괴고 입술을 삐죽였다. 저 두툼한 몸이며 안 웃을 때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 웃으면 분위기 확 밝아지는 것까지도 싹 내 취향이란 말이지.
좋아하는 사람이 애인도 아닌데 수절을 해서 뭐 한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도혁을 꼬실 수 있을지 연구하던 참이었다.
“이제 그만 제 일행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갑자기 도혁의 등 뒤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지언과 도혁이 뒤를 돌았다.
“혼자라서 외롭거든요.”
“선배님!”
도혁이 환하게 웃으며 주원의 옆으로 달려갔다. 양지언은 가자미눈을 뜨고 방해꾼을 살폈다.
펜싱 간판스타 채주원. 과연, 이쪽도 얼굴로 소문이 날 만큼 근사했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도 더 잘빠진 몸매에, 머리카락과 눈이 새까매 마치 한 마리 흑표범 같은 모습이었다.
하, 채주원도 되게 괜찮네. 하지만 난 이번에는 이도혁에 꽂혔다고. 방해꾼아, 비켜 줘.
그러면서도 근사한 알파들에 둘러싸여 곤란을 겪는(물론 양지언만의 생각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결코 싫지 않았다.
“죄송한데요, 채주원 선수님. 도혁 씨는 저랑 이야기 중이었어요.”
“그러기에 앞서서 저랑 같이 왔죠.”
주원은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도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뒤돌았다. 도혁은 인사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달려갔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양지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면 자신과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환하게 웃는 도혁을 보니 그 모습 위로 커다란 꼬리가 생겨나서 붕붕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양지언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도혁의 갑자기 밝아진 얼굴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도혁의 커다란 등짝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은 잊지 않았다.
* * *
뷔페 코너로 돌아온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았다. 도혁은 기가 다 빨린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맙습니다.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선배님 덕분에 살았어요.”
“너한테 뭐라고 하던?”
“맘에 든다면서 일방적으로 번호 따 갔어요.”
“도혁이 인기 좋네. 저렇게 적극적인 대시도 받아 보고.”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너한테는 뭐. 나뿐이라고?”
주원이 피식 웃으면서 도혁의 접시에 스테이크를 덜어 주었다. 또, 식기며 냅킨을 도혁 앞에 챙겨 주었다. 스테이크는 군침이 날 만큼 맛있어 보였으나, 도혁은 고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도 자신을 자연스럽게 챙겨 주는 세련된 주원의 매너에 홀린 상태였다. 하나 더하자면, 지금처럼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주원의 배려에도.
“맞아요. 이제는 잘 아시네요.”
“모른 척 안 한다고 했잖아.”
주원이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도혁을 빤히 바라봤다. 엷은 미소를 띤 얼굴에 도혁의 뺨이 붉어졌다.
“너무 설레는데, 저 그래도 괜찮은 거죠?”
“작작 설레.”
“아니에요. 저 실컷 떨리고 들뜰래요. 선배님이 아까 저 구해 준 것도 그렇고, 이렇게 옆에서 밥 먹는 것 지켜봐 주시는 것도 그렇고. 너무 좋아요.”
“넌 진짜 표현에 거침이 없다.”
“선배님이 절 그렇게 만들어요.”
주원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도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런 주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맑은 날씨에 선선한 봄바람. 어두운 밤을 밝히는 은은한 조명들과 귓가를 적시는 밝은 음악이 감미로웠다. 물론, 가장 달콤한 것은 주원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어 준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