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도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생수 한 병을 비우고 잠든 주원을 살폈다. 새벽 5시 40분. 주원은 아직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가 뒤척이는 바람에 이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늘씬하고 탄탄한 목선과 어깨가 드러났다. 수려한 목선에 잠시 눈을 빼앗긴 도혁은 잠시간 멍하니 주원을 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감기 들면 안 돼.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불을 주원의 턱 끝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도혁의 손끝에 주원의 뺨을 스쳤다. 따스한 온기를 품은 피부는, 한순간의 스침이었지만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헉, 엄청 촉촉하다.
하마터면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도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거실로 나와 스트레칭을 했다. 심호흡을 몇 번 하며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운동화 끈을 꽉 동여매고 숙소를 나섰다.
주원을 두고 나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운동을 할 수 있는 날에는 반드시 6시에 일어나 5km 조깅을 하는 게 그의 루틴이었다.
숙소 길 건너 운동장으로 나가자 구기 종목 선수들로 보이는 외국인 팀이 열을 맞춰 뛰고 있었다. 도혁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속으로 하나둘, 하나둘, 구령을 붙이며 달렸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간밤 양지언 앞에서 곤란을 겪던 순간,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했던 주원이 떠올라 웃음이 샜다.
선배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요새는 날 두드려 패지도 않고, 기합을 주지도 않는다. 확실히 페어플레이를 약속한 다음부터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단 말이야. 이대로라면 은근슬쩍 고백 무드를 잡아 봐도 괜찮지 않을까? 지난번에는 내가 너무 성급했지. 다짜고짜 집 앞으로 찾아가서 키스부터 날렸으니.
천천히 가까워져서 자연스럽게 사귀는 방법이 괜찮을 것 같다. 요새 같은 분위기라면 그게 나을 것 같네. 좋아, 좋아.
도혁은 조깅을 멈추고 다리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한쪽 다리를 구부렸다 쫙쫙 펴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선배와 여기서 더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미 같은 숙소를 쓰고 있고,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고 있으니 선수로서 더 가까워질 수는 없다. 문제는 사적인 감정이다.
뽀뽀도 하고 손도 잡았지만 아직 목이 마르다. 확 진도를 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해. 음… 선배가 좋아하는 걸 알아내서 같이해 보자고 할까?
도혁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계속 생각했다. 활동적인 취미를 좋아하는 주원이 즐거워할 만한 일을 준비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친밀함과 유대감을 쌓을 만한 이벤트여야만 했다.
“음… 바깥에서 둘이 할 수 있으면서도 좁은 공간에서 몸을 부대낄 수 있을 일…….”
캠핑?!
머릿속에 반짝, 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주원의 SNS를 염탐하며 그가 몇 번 솔로 캠핑을 다니는 사진을 본 적 있었다. 주원은 가끔씩 혼자서 캠핑을 떠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팬카페와 SNS에 꼭 그 흔적을 남겨 주었다.
도혁은 핸드폰을 꺼내어 주원이 가장 최근에 업로드한 게시물을 확인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한적한 산기슭에 혼자 텐트를 치고서 음악을 듣는 모습이었다.
그래, 캠핑이 딱이네. 텐트 작은 걸로 빌려서 몸을 딱 붙이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거야. 내가 맛있는 것도 해주고, 자상하게 챙겨 주는 거지.
선배한테 말 꺼내 봐야겠다. 좋아!
도혁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있게 달렸다. 팍팍, 땅바닥을 차고 나간 그는 순식간에 외국인 팀을 앞서 달렸다.
“단거리 육상 선수인가?”
“그런 것 같아.”
“아침부터 열심이네.”
외국인 선수들은 새벽부터 전력 질주하는 도혁을 보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 것인가. 도혁은 최대한 머리를 굴려 자연스러운 핑계를 만들어 냈다. 바로 방송을 핑계 삼는 것이었다. 촬영을 제대로 못 했으니, 그걸 하자고 꼬드겨 보자……!
도혁은 슬그머니 방송 작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작가님, 저번에 그레이트 오션 로드 촬영 실패했잖아요.”
“그랬죠. 그런데 왜요?”
“다른 콘텐츠라도 촬영해 와야 하지 않을까요? 저 방송 타는 게 꿈이라……. 고향에 계신 부모님도 저희 집 강아지도 다큐멘터리 기대 중일 텐데요. 그레이트 오션 로드 날아가면서 제 분량이 줄었을까 봐 걱정이 돼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도혁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작가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만 도혁에게 물었다.
“혹시 짬 나면 다른 컨셉으로 하나 찍어 와 줄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저희 이틀 뒤에 자유 시간 돌아오는데요, 실은 제가 캠핑이 하고 싶어요.”
도혁이 반색했다. 촬영팀은 간단한 회의 후 도혁의 촬영 계획에 오케이를 내렸다. 장 감독에게까지 허락을 받은 도혁은 멜버른 시티 외곽에 있는 자연 친화적 캠핑장을 예약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 빠르게 주원에게 전달되었다.
“네 덕분에 오랜만에 캠핑 가게 생겼어. 고맙다.”
주원은 도혁의 캠핑 제안에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분 좋아했다. 고된 훈련 속에 하루 외출을 한다면 기왕 좋게 다녀오고 싶었다.
그리고 이틀 후, 두 사람은 직접 차를 몰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멜버른 시티 외곽으로 빠져나오자 숲과 나무가 울창한 지역이 나왔다.
“진짜 숲 한가운데 위치해 있네요.”
키 큰 나무로 둘러싸인 캠핑장은 힐링 컨셉을 가지고 있었다. 울창한 편백나무와 잣나무 숲 너머로 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또한 텐트 간의 간격이 아주 넓어 하나는 언덕 위, 하나는 냇가에서 한참 내려가 하나 이런 식으로 설치되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었다.
캠핑장에는 텐트와 그릴, 그늘막을 빌려주는데, 설치는 직접 해야 했다. 도혁은 멋지게 텐트와 그늘막을 치는 모습으로 주원에게 어필할 생각이었다.
“여기 필요한 용품들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이것 참 마음에 드네. 도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관리인에게 텐트와 버너, 그릴, 잡다한 용품들과 그늘막을 건네받아서 예약했던 구역으로 돌아왔다.
“선배님, 제가 텐트랑 그늘막 칠게요.”
“너 이런 거 잘해?”
“못 박는 거라면 자신 있죠.”
도혁은 바닥에 지지대가 될 만한 징을 박기 시작했다. 일부러 망치를 크게 휘두르며 쿵, 쿵 힘 있게 망치질을 했다. 허세스럽게 이마의 땀을 닦아 내기도 하고 더운 척 은근히 티셔츠를 팔랑거렸다. 하지만 주원은 도혁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도끼를 들어 올렸다.
“난 장작 팰게.”
그러고는 웬만한 성인 허리 굵기 정도는 돼 보이는 통나무를 떡 하니 판에 올리고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흡!”
그가 도끼를 들어 수직으로 내리치자 그 두툼하던 나무가 두 동강 났다. 주원은 나무토막에 박힌 도끼를 힘 있게 잡아 빼 다시금 장작을 내리쳤다. 고요한 숲속에 그의 기합 소리와 장작을 깨부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 시원하게 패니까 좋다.”
주원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머쓱해진 도혁은 얌전히 타프 폴대를 세우고서 그를 위한 그늘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산더미처럼 장작을 팬 다음, 두 사람은 바베큐를 준비했다. 숯에 토치로 불을 붙이는 것만큼은 자신이 하게 해 달라며 도혁이 빌었고, 주원은 쿨하게 양보했다. 도혁은 다행히 한 번만에 숯불을 달구었고, 도혁은 발군의 고기 굽기 실력을 발휘해 주원을 대접했다.
“맛있네. 역시 너 고기 잘 구워.”
“선배님, 많이 드세요.”
두 사람은 호주산 소고기를 잔뜩 먹어 치웠다. 민석에게 꾸어 온 라면까지 끓여 먹자 배가 불렀다.
“나 잠깐 씻고 올게.”
“다녀오세요.”
주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도혁은 나름의 센스를 발휘해 텐트 안을 꾸몄다. 방수 매트를 깔고 그 위에 도톰한 에어 매트로 쿠션감을 줬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물건. 민석에게 빌린 거짓말 탐지기도 꺼내어 놓았다.
사람들 말로는 그다지 신빙성 없는 기계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걸로 주원의 진심을 한번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참을 수 없었다.
“뭐 해?”
“놀 준비 하고 있었어요.”
“이건 뭐냐. 손 올려놓는 것처럼 생겼네?”
텐트 안으로 들어온 주원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물었다.
“네, 거짓말 탐지기에요. 진실을 말하면 괜찮고, 거짓말하면 찌릿찌릿 전기 자극이 와서 아파요.”
“TV에서 본 것 같아. 그런데 이건 왜 들고 왔어?”
“선배님하고 진실게임 하려고요.”
“이런 거 믿나 봐?”
“어… 불리하게 나오면 안 믿고, 저한테 유리한 결과 나오면 믿으려고요.”
솔직한 답변에 주원은 그만 웃고 말았다. 어떻게 된 게 한 치의 가식도 없는 녀석이었다.
“그럼 한번 해 보자.”
“진짜요? 아, 뭐부터 물어보지. 일단 여기 손 올리세요.”
도혁은 헤실헤실거리며 주원의 손을 잡아다 기계 위에 올렸다.
“첫 번째 질문 할게요. 선배님… 여전히 이상형은 연상이세요?”
“예스.”
기계가 잠잠했다. 진실로 판명이 났다는 신호였다. 도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두 번째 질문을 준비했다.
“그럼 두 번째입니다. 오메가만 만나겠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으십니까?”
“당연.”
마찬가지로 기계는 조용했다. 도혁은 절망하며 매트에 풀썩 쓰러졌다. 잠시 숨을 고른 그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주원 선배님, 이제는 저 조금이라도 좋아하시나요? 그러니까 제 말은, 아주 쬐끔이라도요. 일말의… 호감이라도.”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긴 기다림 끝에 주원이 입을 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노. 호감 전혀 없음.”
“이럴 수가……. 거짓말이죠.”
“기계가 판단하겠지.”
나에게 일말의 긍정적인 마음조차 없다니. 제발 이게 거짓말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도혁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계의 거짓말 판정을 기다렸다. 하지만 몇 초가 흘러도 거짓말을 알리는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진실이네요.”
시무룩해진 도혁은 주원의 손에서 기계를 빼내 구석으로 치웠다.
“미안하다. 일이 이렇게 됐네.”
“…죄송해하실 건 없어요. 그냥 좀 실망스러울 뿐.”
“…….”
“그래도 포기 안 합니다. 다음번에는 절대 제가 원하는 반응 나오게 할 거예요.”
“그러든가.”
주원이 도혁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손길은 장난스러웠으나 묘한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도혁은 자신을 보면서 자꾸만 웃는 주원이 좋았다. 너무나 욕심나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기 싫어. 선배가 꼭 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때 주원의 벨 소리가 울렸다.
“어, 잠깐만. 나 전화 왔다.”
도혁이 주원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감독님?”
“아니, 희우 누나.”
엇, 희우 선배구나. 그때 그, 친해 보였던 사람. 거의 연인처럼 다정하게 굴었던… 오메가 선배.
도혁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