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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30화 (19/115)

30화.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예.”

“네. 누나, 저예요. 여긴 밤이죠. 별 용건 없이 걸었다고요? 싱겁긴.”

주원은 어깨에 핸드폰을 끼고 텐트를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도혁은 주섬주섬 바닥을 치우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희우 선배와 주원 선배는 어떤 관계일까.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아니면 설마 과거에 사귀었던 사이. 가장 최악을 가정해 본다면 주원 선배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따지고 보면 주원은 지금 솔로였으며, 도혁의 대시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연애 권리가 박탈되는 것도 아니었다. 주원이 앞으로 ‘페어플레이 하겠다.’라고 말을 해 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혁에게 비겁하게 등 돌리지 않겠다는 그런 소리였으므로.

“에휴…….”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거짓말 탐지기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잘 털고 케이스에 다시 고이 담았다. 실내는 램프 하나만을 달아 놓아 딱히 밝지 않았고, 그래서 도혁은 케이스의 안내문을 보지 못했다.

<반드시 동봉된 건전지를 삽입하고 사용하세요.>

전원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던 기계를 캠핑 배낭 깊숙이 집어넣고, 도혁은 덩그마니 앉아 주원을 기다렸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록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오래 안 오는데. 통화가 이렇게까지 길어지나? 한번 나가서 선배를 찾아다녀 봐야겠는데. 여기 너무 어둡고 외지니까.

다 큰 장정을 걱정한다는 건 핑계였고, 사실은 서희우와 무슨 통화를 이렇게까지 오래 하는지 궁금했다. 혹시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너무 걱정이 되고 속이 타 견딜 수 없었다.

도혁은 서둘러 신발을 신고 텐트 바깥으로 나왔다. 핸드폰으로 플래시를 켜 언덕배기 아래로 내려가자, 저 멀리 사람의 그림자와 목소리가 보였다.

“…응. 그렇죠, 뭐.”

가까이 다가가서 들으니 영락없는 한국어에, 주원의 목소리가 맞았다. 아직도 그와 서희우가 통화 중이라는 사실에 도혁은 마음이 착잡했다. 하릴없이 뒷덜미를 긁적이며 적당히 근처를 배회하려는데, 뜬금없는 단어가 귓가를 찔렀다.

“…좋아한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지 말아요.”

좋아해? 누가 누구를? 그는 아름드리나무 뒤로 커다란 몸을 숨기며 주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 자세한 건 한국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알겠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좋아한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자? 분명 썸을 탈 때 나오는 단어들인데. 설마 희우 선배와 주원 선배 사이에 사랑의 기류가?

도혁은 순간 혈압이 올라 뒷목을 부여잡았다.

안 돼. 아까 진실게임에서도 봤듯이 나랑 희우 선배는 비교가 안 된다고. 연상이고, 오메가에 선이 여리여리하다. 나 같은 191cm, 86kg과는 비할 바가 안 돼……!

와르르 자신감이 무너졌다. 도혁은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뒤로 돈 주원이 도혁을 발견했다.

“너 거기서 뭐 하냐?”

“아… 선배, 님.”

“어두컴컴한데 왜 나와 있어.”

“…그냥 심심해서요.”

“내가 너무 오래 나와 있었네. 미안, 들어가자.”

주원이 도혁의 등에 손을 올리며 텐트 쪽으로 길을 이끌었다. 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들어가지 말고 잠깐 밖에 있어요.”

“왜?”

“별이 너무 잘 보여서요.”

도혁의 말에 주원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날씨가 맑아 밤하늘도 깨끗하고 청명했다. 별이 어찌나 밝은지 낯선 남반구의 별자리들이지만 선명하게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와, 별 많다.”

“네. 서울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진천도 공기 깨끗해서 별 많은 편인데 여기는 더하네. 별이 쏟아질 것 같아.”

“은하수도 보이네요. 저 은하수 보는 거 처음이에요.”

“나도. 여기 남반구라 그런지 방향이 반대네. 위로 삐쳐 올라가 있어.”

“어, 정말요. 신기해요.”

두 사람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은하수는 평소 교과서에서 보던 것과 대칭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옅은 보랏빛과 은색으로 반짝이는 별 무리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찬란했다.

“선배님, 저 진실게임 한 번만 더 해도 돼요?”

“뭔데.”

“…서희우 선배님이랑 특별한 관계세요?”

진지한 목소리에, 주원은 고개를 돌려 도혁을 바라봤다.

“뭐라고?”

“이번에는 기계에 기대지 않고 직접 여쭤보고 싶어요. 장난기 없이요. 두 분 지난번에 뵀을 때 굉장히 친해 보였거든요. 저 좀 상처 입었습니다.”

“음… 그랬구나.”

“어떤 사이이신지 직접 여쭤보고 싶어요.”

주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선후배.”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런 선후배인가요?”

“일단은.”

“일단은…이라는 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소리신가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 사이 아니야. 말했잖아. 나 비겁하게 네 뒤통수 치고 그런 짓거리는 안 할 거라고.”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도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더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럼 저랑 선배님은 어떤 사이인가요?”

“선후배.”

“…너무 대답이 빠르게 나오시네요.”

“아까 거짓말 탐지기에서도 나왔잖아. 아무 호감 없다고. 아, 물론 후배로서는 많이 귀여워하지.”

“귀여워하지 말고 멋있어해 주세요.”

“퍽이나 그렇게 보이겠다.”

“제발요. 이제 같이 은하수도 본 사인데.”

도혁이 큰 몸을 구겨 주원의 품에 자신을 욱여넣었다. 주원은 그를 안아 주지는 않되, 밀어내지도 않았다.

“어?! 별똥별이다!”

슉,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며 긴 꼬리를 불태웠다.

“와, 소원 빌어야지.”

“어디 별똥별이 있다 그래?”

“방금 저쪽으로 떨어졌어요. 선배님도 같이 소원 빌어요.”

도혁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두 눈을 꼭 감고 소원을 비는 그에게 주원이 물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선배님이 저 좋아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저한테는 지금 그게 제일 중요한 거라서요.”

“역시 너답다.”

“선배님은 무슨 소원 비셨어요? 올림픽 금메달?”

지금껏 펜싱 선수로서 채주원의 커리어는 화려했다. 어릴 적부터 수많은 대회에서 금메달을 석권했고, 최근에 열린 세계 대회에서도 5연속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아쉬워하는 부분이 있다면 지난 올림픽 때 개인전에서 은메달에 그쳤다는 점이었다. 고질적인 발목 부상이 심해져 제 기량을 다 펼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결국 접전 끝에 프랑스 선수에게 1점 차로 패배했다.

그때 주원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고 아쉬워했는가는 펜싱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주원의 열성 팬이었던 도혁은 그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올림픽을 불과 100일 남겨 놓은 지금 주원의 소원은 금메달이 아닐까. 도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내 소원은 네 소원 안 이뤄지기. 그거 빌었다.”

“아, 선배님. 제발…….”

어느새 주원은 도혁을 놀려 먹는 데 모든 재미를 붙인 후였다.

반응이 재미있단 말이야, 이 자식. 주원은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도혁의 머리를 헝클었다.

* * *

“으으… 온몸이 뻐근하네.”

낯선 환경에서 잔 탓일까. 다음 날 일어난 주원은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텐트 바깥으로 나온 그는 여러 차례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었다. 그래도 쉽사리 피곤은 가시지 않았다.

“아, 이상하게 힘들다. 막내야, 너는 안 힘들어?”

“전 괜찮은데요. 선배님, 어디 아프세요?”

“간밤에 좀 더웠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답답하고 그렇네.”

“간밤이… 더웠다고요? 영상 7도 정도밖에 안 됐는데요. 제가 자기 전에 확인했어요.”

“그래? 이상하다. 엄청 덥고 후끈거렸는데. 침낭이 성능이 좋았나.”

“제가 시원한 거 만들어 드릴게요.”

도혁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개수대로 향했다. 주원은 샤워장에 가서 최대한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 더운 기운을 몰아내 보려 했으나, 계속해서 답답한 기분만 들 뿐 딱히 컨디션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선배님, 토마토 많이 넣고 만든 냉수프예요. 드셔 보세요.”

“고맙다.”

주원이 가장 좋아하는 야채가 토마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혁은 어제 장을 보면서 토마토 스튜 재료를 한가득 사 놓았었다. 오이와 토마토를 넣고 갈아 주스처럼 만든 수프는 꽤나 새콤하고 맛이 좋았다. 주원은 금방 한 그릇을 비워 냈다.

“먹으니까 속이 풀리는 것 같네. 한 그릇 더 줘.”

“맛있게 드셔 주니까 제 배가 다 불러요. 선배님, 많이 많이 드세요.”

콸콸, 도혁은 그릇이 넘치도록 토마토 수프를 부어 주원에게 건넸다. 주원은 세 그릇을 비우고서야 몸이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도 갑자기 열이 오르고 가슴께가 답답한 증상이 계속되었다. 결국 운전대를 도혁에게 쥐여 주고서 그는 창문을 열었다.

“선배님, 많이 더우시면 에어컨 트셔도 돼요.”

“그래도 괜찮겠어?”

“저도 좀 덥다고 생각하던 참이에요.”

“나만 더운 거 아니구나?”

“네. 저도 아침부터 조금 후덥지근하다고 생각했는데, 차 타고 오면서 점점 더워지네요. 온도계 보면 분명히 5도, 7도 이런데 왜 이럴까요.”

“그러게.”

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심지어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피곤한 느낌은 아니었다. 자꾸만 손발에 열이 오르고 뒷목이 뜨끈해지는 것이, 감기 증상 같으면서도 동시에 어디가 아프거나 나른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아픈 건 아니니 됐지. 주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시원한 바람을 실컷 쐬었다.

멜버른 시티의 훈련 캠프로 돌아오니 시간은 아직 정오였다. 장 감독에게 복귀 인사를 한 둘은 간단하게 씻고 훈련장으로 나섰다. 하지만 주원은 도통 훈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집중력이 자꾸만 흩어졌고, 힘 조절이 잘 안 됐다.

“너무 세게 찌르지 마. 적당히 치고 빠져야지. 지금 주원이 힘 너무 들어가 있어.”

박찬진 코치가 주원의 찌르기를 지적했다.

“완력으로 밀어붙이는 거 네 스타일 아니잖아. 오늘 왜 이렇게 공격적이야.”

상대인 민석을 무섭도록 몰아붙이고, 사납게 플레이하는 모습이 눈에 띈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래. 두 사람 다시 마주 보고. 프레, 알레!”

하지만 이번에도 주원은 성급하게 민석을 공격했다. 거의 힘으로 위협하듯이 상대를 덮치는 플레이에 박찬진이 두 사람을 떼어 놔야 할 정도였다.

“그만, 그만. 주원이 왜 그래. 컨디션 안 좋아?”

“몸이 좀 이상해요. 힘이 없는 건 아닌데, 근력 조절이 안 됩니다.”

“웨이트할 때 문제 있었던 건 아니고?”

“전혀요. 오히려 평소보다 데드 리프트 20kg 더 들었어요.”

“20kg이나?”

주원은 지구력이 좋고 민첩한 편에 속했지, 중량을 무겁게 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박 코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흠…….”

주원이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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