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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31화 (20/115)

31화.

“평소의 너답지 않다. 컨디션 조절이 필요해 보이는데,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떻겠냐.”

“…알겠습니다.”

주원은 박 코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재킷을 벗었다. 그러고 나서 잔디 운동장으로 나가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세 바퀴를 쉼 없이 달렸다. 이쯤 하면 힘이 빠질 만도 한데 어디선가 계속 체력이 솟아났다.

얼핏 듣기로는 좋은 일이 아닌가 싶었지만, 운동선수로서 매일 컨디션을 체크하는 주원은 자기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렇게 기운이 쓸데없이 솟구치는 것도 분명 건강의 적신호란 뜻이었다.

주원은 숙소로 돌아와 욕실에서 찬물로 씻고, 거듭 세수를 했다. 몸에 열기가 조금이라도 가시는 것 같아 상쾌했다. 그는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닦아 내며 침대맡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켰다.

달력 앱을 실행해 일정을 보니 귀국일까지는 2주하고도 이틀이 더 남아 있었다.

입국하면 꼭 병원에 가 봐야겠군. 종합 검진이라도 받아 봐야겠어. 지금 아프면 정말 큰일이니까.

핸드폰 액정을 끄려는 찰나, D-DAY 표시가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러트 사이클을 체크해 놓은 캘린더가 알람을 띄운 것이다.

캘린더

D-21

러트 사이클까지 21일 남았습니다.

아주 잠깐, 주원의 머릿속에 러트라는 단어가 스쳤다. 하지만 러트가 벌써 올 일은 없었다. 10대에 우성 알파로 발현한 이래, 그의 주기는 단 한 번도 어그러진 적이 없었고 그 사이클이 얼마나 정확한지 주변에서 놀랄 정도였다.

또한 지금 겪고 있는 증상은 평소의 러트와 사뭇 달랐다. 그는 러트 전에 나른함과 뭉근한 체온 상승을 느끼는 스타일이지, 지금처럼 못 견디게 가슴이 뛰고 불타는 열기에 휩싸인 경험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주원은 자신의 러트 증상을 잘 몰랐다. 발현하던 날을 제외하고서는 모든 기간을 약으로 버틴 탓이었다.

항상 I사의 약을 들이부으며 몸을 컨트롤했기 때문에, 그는 이런 날 것의 몸 상태를 느껴 본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원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이 러트의 전조는 아니리라 성급하게 결론 내렸다.

별일 아니겠지. 그냥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에 누웠다. 푹 쉬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의 상태는 그대로였다. 악력을 조절하지 못해 우유를 뜯다가 팩을 터뜨렸고, 낮 기온이 20도밖에 안 되는데도 덥다 소리를 달고 지내며 자꾸만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도혁이었다. 그 역시 평소보다 운동량을 늘렸는데도 힘이 남아돌았고 물을 자주 찾았다. 입에는 덥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막내, 안 더워?”

“엄청 더워요. 여름 같습니다.”

“그치? 나만 그런 거 아니지?”

“네, 너무 더워요.”

유난히도 물과 얼음을 찾아 대는 도혁과 주원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호주 음식이 보양이라도 되는 건가? 주원은 미심쩍은 상태로 며칠을 더 보냈지만 딱히 변화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 호주 전지훈련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시간이 딱 2주 남았다. 마지막 스퍼트를 내기 위한 집중 훈련 계획이 잡혔다. 국가 대표팀은 경기력 측정과 사기 충전을 위해 호주 국가 대표팀을 초청해 친선전을 갖기로 했다. 단 한 번도 이 멤버로는 단체전 합을 맞춰 보지 못했기 때문에, 4인방은 별도의 시간을 내서 야간 훈련에 돌입했다.

“우리 포메이션은 이렇게 돼. 맨 처음이 민석이, 그다음이 규영이, 마지막 순서가 나야. 도혁이는 백업이지만 언제든 투입될 수 있도록 연습 잘해야 돼.”

“네!”

후배들을 훈련시키는 주원의 모습은 더없이 진중했고, 또 프로페셔널했다. 주장다운 아우라를 느낄 때마다 도혁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며 머리를 쓰다듬을 때도, 못했다고 사정없이 혼낼 때도 그저 좋았다.

“오늘은 2 대 2로 붙어 보자.”

“룸메전으로 할까요?”

“와, 아이디어 좋다.”

“찬성입니다!”

주원의 말에 세 사람은 짠 듯이 룸메이트 대항전을 제안했다.

“너희 왜 이렇게 룸메전을 좋아해?”

“그야 저는 제 룸메이트를 사랑하니까요.”

민석이 규영을 덥석 끌어안았다.

“야, 징그러워.”

규영이 정색했다. 이 와중에 도혁도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저도요.”

저걸 확.

주원이 도끼눈을 뜨자, 도혁은 주춤거리며 뒷말을 흐렸다.

“아, 그런데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우리 B로그 찍으면서 해요.”

“맞네. 우리 업로드 안 한 지 좀 됐잖아. 저기 핸드폰 갖다 놓고 녹화하면서 하자.”

규영과 민석은 요즘 들어 B로그 구독자가 늘었다며 잠시 자랑을 하고서 창틀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희한한 제안을 했다.

“근데,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컨셉 잡고 할까요?”

“컨셉이라니, 어떤 거 말하는 건데.”

“학창 시절에 짝피구나 짝축구 다 해 보셨죠.”

“해 봤지. 두 사람이서 손잡고 한 몸처럼 움직이는 거?”

“맞아요. 그것처럼 짝펜싱을 해 보면 어때요. 두 사람이 앞뒤로 딱 붙어서 허리 끌어안고, 앞사람만 공격하는 거죠.”

민석의 말에 규영이 흥미롭겠다며 반색했다. 도혁은 대놓고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주원만 불만이 가득했다.

“펜싱에 그런 게 어딨어. 장난도 아니고.”

“재밌잖아요. 예능에서도 펜싱 가지고 변칙적으로 별짓 다 하는데요, 뭐. 우리라고 못 하라는 법 있어요? 오히려 일반인들은 이런 거 보여 주면 더 좋아한다고요. 누가 알아요? 이 영상 보고 누구 한 명이라도 펜싱클럽 가입할지.”

반박 불가였다. 주원은 평소 펜싱의 대중화에 앞장서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한 펜싱 전도사였기 때문에 그의 논리에 굴복했다.

“후… 그래. 짝펜싱 하자.”

민석과 주원이 앞에 서서 공격을 맡고, 각각의 등 뒤에는 규영과 도혁이 서기로 했다. 그런데 주원의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이 상당히 끈적했다.

“그렇게까지 세게 끌어안아야겠냐?”

“아, 죄송해요.”

도혁은 영화에 나오는 포즈처럼 주원의 허리를 껴안으려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재킷 너머 덩치가 너무 두툼하고 커다랗게만 느껴졌다.

분명히 얇은 옷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펜싱복을 뚫고 도혁의 체온이 고스란히 넘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음, 내가 너무 의식하나. 주원의 신경이 등 뒤로 쏠린 순간 게임이 시작됐다. 심판이 없는 자율 경기였기 때문에, 민석의 신호가 곧 공격 개시를 알렸다.

“프레, 알레!”

주원이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바람에 정통으로 공격당했다.

“와! 뚜슈(터치)!”

민석과 규영이 서로를 껴안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주원은 자신이 딴생각에 빠져 있었단 사실이 부끄러웠다.

“다시 해. 준비.”

“프레, 알레!”

민석이 바람처럼 날아와 선제공격 자세를 취했다. 칼끝이 아슬아슬 주원의 마스크 앞을 스쳤다. 주원은 나름대로 빠르게 스텝을 밟았으나, 뒤에 도혁이 딸려 있어 생각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뚜슈!”

이번에도 민석이 1득점을 따 갔다.

“와, 우리가 이기겠다!”

규영은 신이 나는지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해괴한 안무를 춰 댔다. 승부욕 강한 주원의 심기를 거스르기 딱 좋은 행동들이었다. 심지어 요즈음 며칠간은 힘도 투지도 넘쳐나는 상황. 주원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너희 왜 이렇게 잘해. 언제 합이라도 맞춰 본 거야?”

“아뇨. 형이랑 도혁이가 안 맞는 거죠.”

“우리가 뭐가 어때서.”

“꽉 껴안고 있지 않잖아요.”

“뭐?”

“저희 보세요. 완전 일심동체잖아요.”

민석이 자신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민석보다 살짝 키가 큰 규영이 뒤에서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두 팔로 꽁꽁 민석을 묶고 있는 형상이었다. 즉, 두 사람은 바늘 하나 통과할 수 없을 만큼 밀착해 있었다.

“이렇게 꽉 안고 해야 한 몸처럼 움직이지, 형네처럼 그렇게 주렁주렁 달고 하면 제대로 못 움직여요.”

그것도 모르냐는 투였다. 마스크에 가려진 주원의 얼굴에서는 스팀이 솟아났다.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막내야.”

“네, 선배님.”

“너 나 꽉 껴안아라. 내가 숨도 못 쉬게 꽉 끌어안아 봐.”

“네? 아까는… 하지 말라면서요.”

“내가 한 말 취소할 테니까, 그냥 나랑 한 몸 돼.”

헉. 도혁은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항상 자신을 거부해 왔던 주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감격스럽기도 했다. 물론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뱉은 전략이란 걸 알았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도혁이 팔을 벌려 주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도혁이 더 크기도 했고, 타고난 뼈대 차이가 월등해서 주원을 품 안에 가둘 수 있었다. 도혁은 이대로 가슴이 터져 죽을 것처럼 떨렸다.

“더 꽉.”

“이렇게요?”

팔에 힘을 더 주었다. 두 사람의 몸이 한 세트처럼 밀착되었다.

“그래. 이제 죽자 사자 나 따라서 스텝 밟아.”

“네!”

다시금 민석이 시작 신호를 외쳤다. 주원은 전광석화처럼 튀어 나가 나이프를 휘둘렀다. 도혁은 주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며 앞으로 전진, 측면으로 이동했다. 팔을 뻗으며 런지 하는 주원을 번쩍 안아 들기까지 했다.

장비만 서양식이었다 뿐이지, 하는 행동은 소림사 고수들의 무협지 속 전투가 따로 없었다.

“흐아아!”

“으아!”

챙, 챙. 칼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도혁을 등에 매달았으나 둘이 한 몸처럼 움직였기에 주원은 거칠 것이 없었다.

“뚜슈!”

순식간에 3점을 딴 주원 팀이 역전에 성공했다.

“우와!”

“역전이다!”

“에이, 저기도 엄청 잘하네. 안 되겠다. 규영이 형, 더 꽉 붙어요!”

민석 팀도 투지에 불탔다. 두 팀은 그야말로 불을 튀기며 전쟁 같은 결투를 벌였다.

결과는 15:14. 주원, 도혁의 승리였다.

“이겼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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