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형! 우리가 이겼어요.”
도혁이 주원을 번쩍 안아 올렸다. 주원은 환호성을 지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까는 등 뒤에서 껴안아, 지금은 정면으로 껴안아. 오늘 아주 이도혁하고 한 몸인데? 그 생각을 하자 새삼 얼굴에 열이 올랐다.
“흠흠, 이제 좀 떨어지자.”
“어… 아쉬운데.”
주원이 도혁을 밀어내며 사태가 종료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얼굴의 열기도, 심장 박동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몇 분 내로 원상 복구되었을 모든 것들인데도,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 자꾸 왜 이럴까. 주원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재킷을 벗어 햇볕에 널면서도 그랬고, 신이 난 도혁과 번화가로 향하면서도 그랬다. 캥거루 버거를 추천하는 점원 때문에 식겁하는 도혁을 보면서 킥킥거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한 가지의 생각만이 주원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왜 이럴까.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도혁하고 닿는 게 거북하지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계속 닿아 있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 왜, 이게 당연한 일이 되었을까.
* * *
주원은 한밤중 눈을 떠서 머리맡에 놓아둔 생수병을 뒤적였다. 머릿속이 답답해서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찬물을 마셨지만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실내 공기도 텁텁하고 무척 더워 자꾸만 땀이 났다.
아, 왜 이렇지. 혹시 낮에 햄버거 먹은 게 체했나? 아니면 단순한 두통인가. 자꾸만 머리가 무겁네.
건너편 침대를 보니 도혁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구급상자는 도혁의 침대 너머에 비치해 놓았기 때문에, 주원은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살금살금 도혁 쪽으로 걸어가 그의 머리맡을 뒤졌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상자를 열어 두통약을 먹었지만,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살짝 발생했다.
“으음…….”
도혁은 몸을 뒤척이며 가벼운 잠꼬대를 했다. 그는 이불도 덮지 않고 누워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희미한 우디향이 풍겼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억제제를 끊은 탓에 페로몬이 스며 나오는 모양이었다.
주원은 코끝을 스치는 우디향 아래, 묵직하게 깔린 냄새를 감지했다. 마치 향수처럼 첫 번째 향기가 휘발되고 본래의 베이스 톤이 남는 듯한 이미지였다.
음… 페로몬이 생각보다 굉장히 남성적이네. 우성은 우성이다 이건가.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여 도혁의 목덜미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짙은 향이 부드럽게 주원을 감쌌다.
그러다가 손을 짚고 있는 약통에 너무 힘이 들어가, 와르르 소리가 났다.
“어… 선배, 님?”
도혁이 눈을 떴다. 얼굴이 가까워도 너무 가까워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꿈인가?”
도혁의 목소리는 심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잠이 듬뿍 묻어 있었다. 눈빛 또한 가물가물했다.
“꿈… 맞네. 선배가 이렇게… 가까이 있을 리 없어.”
설마 지금 이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주원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어, 꿈 맞아.”
“꿈이면 같이 자요.”
“응? 뭐라는 거야.”
“같이… 누워요.”
그러더니 도혁이 양팔을 뻗어 주원의 목덜미와 어깨를 감싸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버틸 만한 자세가 아니었기에, 주원은 도혁의 몸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야, 좀 놔 봐.”
“따뜻해…….”
주원은 도혁의 품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도혁의 완력이 워낙 강해 쉽지 않았다. 꼭 쇠사슬에 묶인 것만 같았다.
“…하아, 힘도 세지.”
“선배… 형…….”
정말로 꿈이라 생각하는지, 도혁은 주원의 얼굴에 제 뺨을 비비며 가만가만 속삭이기만 했다. 머리도 부드럽게 헤집고, 등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몸의 긴장이 풀리고 두통도 완화되는 것 같았다.
힘으로 빠져나가긴 글렀고, 팔 힘 풀릴 때까지 놔두자. 놔두면 이 녀석도 다시 잠들겠지.
주원은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온몸에 힘을 쭉 뺐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눈도 감았다.
짜식, 잠 잘 재우네. 솥뚜껑만 한 손인데 손길이 꼭… 너무… 고양이 쓰다듬듯이…….
그러다가 뚝, 의식이 끊겼다.
꿈속에서 주원은 로커룸에 있었다. 주원은 금속 로커에 밀쳐진 채 도혁의 사나운 키스를 받아 내고 있었다.
‘하아… 도혁아.’
‘주원아, 주원아.’
도혁은 주원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뺨부터 목덜미, 허리를 쓸어내렸다. 주원은 그의 손길에 일일이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입맞춤은 점점 농밀해졌고, 주원은 이 열기를 어떻게 가라앉혀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도혁, 이도혁…….’
‘주원아…….’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애타게 부르며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그러다가 눈을 팍, 떴다.
뭐야. 뭐 그딴 꿈을 꿔? 내가 미쳤다고 이도혁이랑 애타게 키스를 해? 별의별 미친 꿈이 다 있네.
주원은 불쾌한 표정을 쓸어내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음?”
고개를 내려 제 손의 위치를 찾은 주원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나 그대로 잠든 거야?
도혁이 자신을 팔다리로 칭칭 얽어매고 있었다. 숨도 못 쉴 만큼 꽉.
미쳤다. 미쳤어.
주원은 제 이마를 퍽퍽 치고 싶었으나 마찬가지로 도혁의 품 안에 갇힌 상황이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으음… 선배.”
도혁은 대체 무슨 꿈을 꾸는지 자꾸만 주원을 끌어안아 자기 품에 가두려 굴었다. 주원은 그저 그의 품을 빠져나갈 타이밍만 찾았다. 그러다가 도혁이 반짝, 눈을 떴다.
“어……?”
“헉.”
“선배님……?”
“아, 안녕.”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던 터라 어색함이 배가됐다. 주원은 도혁이 어리바리한 틈을 타 그의 품에서 몸을 빼냈다.
“선배님이 여기 왜 있어요.”
“그러게.”
“꿈… 아니었,”
“그럼 난 이만.”
“잠깐만요.”
도망치려는 주원의 손목을 도혁이 잡았다.
“선배님, 혹시…….”
“혹시는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서 잠들었어.”
“근데 얼굴은 왜 빨개지셨어요.”
“내가 언제!”
“지금요.”
도혁이 주원의 뺨을 콕 찔렀다. 주원은 아침이라 그렇다며 박박 우겼다.
말로는 갈궜으나, 속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자꾸만 민들레 홀씨가 코끝을 간지럽히듯 속마음이 간질간질했다.
* * *
호주-대한민국 펜싱 국가 대표 친선전
펜싱 경기장 외벽에 커다란 현수막이 나붙었다. 오늘은 특별 경기가 있는 만큼 양국 연맹의 임원진과 국제 펜싱 연맹 관계자가 관중석에 앉았다.
피스트에서 장비와 센서를 점검하는 대표팀 선수들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아직 올림픽까지 시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지금의 라인업으로는 처음 치르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만큼 오늘 호주전은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얘들아, 호흡 잘 맞는 거, 그게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알지?”
장 감독은 4인방을 모아 놓고 일일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특히 도혁은 태극마크를 단 이후 처음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하는 셈이었으니 긴장이 배로 컸다.
“너무 긴장하지 마. 하던 대로 해.”
주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도혁의 뺨을 툭툭 쳤다.
“네! 잘할게요, 선배님.”
그런데 하필이면 도혁이 서 있는 배경이 철제 로커룸이었다. 지난밤 격렬하게 키스하던 꿈이 떠올라, 주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정신 차리자. 꿈은 현실의 반대라잖아?
그는 애써 정신을 수습하며 경기장으로 나갔다.
“프레, 알레!”
삐익. 규영이 점수를 2점 차로 벌려 놓고 피스트에서 내려왔다. 마무리를 맡은 주원이 배턴을 이어받아 피스트 위에 섰다.
“파이팅!”
“대한민국 힘내라!”
관중석을 가득 채운 교민들이 태극기를 흔들었다. 주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칼을 휘둘렀다. 삐익. 센서등에 점등이 되면서 1득점이 추가되었다. 호주 선수는 주원의 날카로운 공격에 당황했는지 자꾸만 뒤로 물러서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프레, 알레!”
다시 시작된 공격 타임에서도 주원이 선제공격권을 가져갔다. 그는 상대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며 플레이했다. 너무 행동이 거칠어, 심판이 잠깐 시합을 중단시킬 정도였다.
“잠시 홀트(중단). ROK(한국) 선수, 차분하게 하세요.”
“죄송합니다.”
주원은 상대 선수와 심판에게 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며 사과했다. 그의 제스처에 호주 선수와 심판 모두 괜찮다고 답했지만, 주원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왜 자꾸 이러는 거지? 힘 조절이 안 돼.
아까부터 팔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했더니, 이상할 정도로 힘이 강하게만 들어갔다. 공격도 차분하게 할 수 없었고, 마구 몰아붙이는 플레이만 가능했다.
이래 가지고는 제대로 시합을 할 수가 없겠는데.
“선수 교체하겠습니다.”
결국 주원은 도혁에게 피스트를 양보하고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선배님, 왜 그러세요?”
“컨디션이 안 좋아.”
“정말요?”
“심각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올라가. 나 대신 하는 거니까 잘하고.”
“네!”
도혁이 올라가고 시합이 재개되었다. 파워풀한 플레이 끝에 대한민국의 승리가 결정됐다.
* * *
“대단하다. 잘했어, 도혁이.”
“전 다 차린 상에 수저만 올린 건데요.”
“겸손은. 너 공격력 엄청나던데.”
박 코치와 장 감독은 도혁의 플레이에 대만족하며 그를 칭찬하기 바빴다. 하지만 도혁의 신경은 온통 주원에게 가 있었다. 그는 도혁의 맞은편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었는데, 평소답지 않게 깨작이는 모습이었다.
“선배님, 입맛 없으세요?”
“응, 이상하게 밥맛이 없네. 이 집 맛있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많이 안 좋아요?”
“아냐. 나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어. 오늘 힘도 많이 쓴 놈이.”
주원은 한사코 자신을 챙기려 드는 도혁의 손을 쳐 냈다.
“나 먼저 들어갈게.”
“가시려고요?”
“응. 내일 훈련 없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적당히 마시고 들어와라.”
“아… 네.”
도혁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주원은 코치와 감독에게 인사한 다음 자리를 떴다.
“도혁아. 뭐 하냐, 술 안 받고.”
때마침 장 감독이 도혁의 빈 잔을 발견했다.
“아, 죄송합니다.”
“얼른 한잔해. 오늘 아주 먹고 죽자.”
도혁은 공손하게 술잔을 받았다. 문제는 이다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