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도혁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물었다.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에 억울함과 의구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왜긴. 형질인들이 페로몬에 취해서 사고 치는 건 흔한 일이야. 다만 우리가 알파와 알파라는 게 특이할 뿐이지. 그냥 난데없는 사고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어떻게 그래요!”
도혁이 흥분해 소리쳤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애같이 이러지 마. 철없어 보여.”
“지금 여기서 애 같다는 말이 왜 나와요. 언제까지 도망만 치려고요? 그러는 선배야말로 애 같아요.”
“뭐? 이 자식이 못 하는 말이 없어.”
“맞잖아요. 손도 잡고, 키스도 했으면서… 사랑한다는 말에는 절대 대꾸 안 해 주죠.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뻔히 알면서 지금도 저 무시하려고 들잖아요. 저 이제는 더는 못 물러나요. 이번에는 쐐기를 박을 거라고요.”
이야기를 듣던 주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도혁이 기가 막혔고, 하나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기가 막혔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주원은 정작 자신의 논리가 빈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백을 받았고, 밀어냈었지만 다시금 다가오는 도혁을 강하게 쳐 내지 못했다. 다정하다는 이유로, 순수해 보인다는 이유로, 가끔은 동정이 간다는 이유로.
그렇게 해서 손을 잡았고, 얼마 전에는 키스도 했다. 여지를 준 것이다. 빈틈을 보인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럼 너, 나랑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가 너랑 연애할 마음이 없다는 건 충분히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이 상황에서 날 어쩌겠단 거야? 계속 찔러보겠다고?”
“아뇨. 이제는 찔러나 보는 데서 만족하지 않아요.”
“그럼?”
주원이 눈을 치켜떴다. 눈앞의 도혁은 의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귀자고 해서 바로 안 넘어올 것도 알아요.”
“그건 잘 파악하고 있네.”
“그래서 저는, 선배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예요.”
도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제안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 듯 거슬려, 주원이 흠칫했다.
“제안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 상황에서 사귀자, 사랑한다, 넌 내 거다라는 말 외에 다른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매달려 올 줄 알았는데 이건 뭔 소리야. 한번 들어나 보자 싶었다.
“자세히 말해 봐.”
“선배랑 저, 둘 다 올림픽 때까지 약 못 먹어요. 절대 억제제 못 먹는 상황인 거 아시죠.”
“알지.”
“그럼 다음번에도 러트를 이렇게 버텨야 한다는 소리예요. 아무런 약을 쓸 수 없으니까, 주기적으로 이런 상태에 처한단 거죠.”
“…그렇겠지.”
“그런데 우리는 이미 서로 때문에 주기가 무너진 상태예요. 선배나 저나 주기가 당겨졌고, 다음 러트가 언제 올지 확신할 수 없잖아요. 안 그래요?”
주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도혁이 하는 말은 다 맞는 소리였다. 우성 형질인의 사이클이 3주나 당겨졌다는 건, 사이클 주기가 망가졌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 주기라고 해서 제때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주기에 관해서는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니까요, 선배님.”
도혁은 굳은 결심을 한 눈빛을 띠고 말했다.
“저랑 올림픽 때까지만 파트너 맺어요.”
주원이 눈을 깜빡였다.
“파트너……? 그게 무슨 의미야.”
주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도혁이 풍기는 뉘앙스로 추정컨대, 지금 도혁은 심상치 않은 제안을 건네고 있었다.
“말 그대로예요. 서로 러트 때마다 파트너가 되어 주자는 거죠.”
“미쳤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주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일을 더 크게 벌이자고?”
“다시 말할게요. 선배랑 저는 이미 러트 사이클이 틀어졌어요. 그런데 지금 억제제도 못 먹고, 외부 사람도 못 만나요. 그러면 어쩔 거예요? 유일한 해결책은 서로뿐이에요.”
“하… 내가 기가 막혀서.”
“기만 막혀 할 일이 아니에요, 선배님. 이게 다 선배님을 위한 일인걸요.”
주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속이 답답해 돌파구를 찾고 싶었으나, 짜증 나게도 도혁이 내놓은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간 침묵했다. 지끈지끈한 이마를 짚고 치열하게 생각했다.
내가 만약 저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도혁과 깊게 얽히게 된다. 말로는 육체를 편안하게 해 주는 파트너지만, 저 자식은 날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마 나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고, 올림픽이 끝나고 떼어 놓을 때 엄청나게 고생할 테지.
그러면 나는? 나는 그 과정에서 무사할 것인가.
주원의 물음은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향했다. 그는 스물세 해를 살아오면서 늘 자신이 넘쳤다. 하지만 지금의 마음가짐은 갈팡질팡 그 자체였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도혁과 건조한 관계로 몸만 가까워질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그 점이 바로 환장할 포인트였다.
“…생각할 시간을 줘.”
주원이 지금 내놓을 수 있는 답은 이게 전부였다.
“지금 당장 결정을 못 하겠다. 나한테는 시간이 필요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혁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제안한 쪽은 저니까, 기다림도 제 몫이겠죠. 선배님,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박 코치님 호출이 와서 이만.”
도혁이 천천히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주원은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쓰러졌다. 이제부터 머리 터지게 고민할 시간만이 남았다.
* * *
자신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훈련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주원의 몸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갑작스럽게 상승했던 혈압과 맥박도 평상시 수준으로 떨어졌고, 체온 역시 보통 때와 같았다.
악력을 조절하지 못해 우유 팩을 터뜨리고 데드 리프트를 평상시보다 수십 킬로그램 치던 때와 달리, 지극히 평소의 컨디션을 보였다.
러트가 해소되니까 이렇게나 몸이 가뿐하구나.
억제제로 러트를 넘기고 나면 3, 4일간은 찌뿌둥했는데 그런 현상도 없었다. 마치 시원한 물에 들어가 피부에 묻은 찌꺼기를 다 씻어 낸 것처럼 상쾌하기까지 했다.
이게 바로 인위적인 약물과 자연적인 해소 방법의 차이인가 싶었다. 그 생각을 하니 주원은 자연스럽게 도혁과 함께 보낸 밤을 떠올리게 되었다.
“주원아, 무슨 생각 하냐? 왜 레그 프레스를 하다가 말아.”
박 코치가 멍하니 있는 주원을 툭 쳤다.
“죄송합니다.”
“컨디션은 많이 돌아온 것 같더라. 신체 계측 결과도 다 정상이고. 그런데 정작 머리가 멍해 보인단 말이지.”
그 말에 주원은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늘 가까이에서 선수들을 챙기는 그답게 박 코치는 주원의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근데 너뿐만이 아니다. 도혁이도 오늘 생각이 딴 데 가 있어. 몸 상태는 최상인데, 너희 둘 다 영 이상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채주원 너, 설마 연애하는 거 아니지?”
박 코치가 바짝 다가오면서 실눈을 떴다.
“그,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연애를 한다 그래요.”
“왜 그렇게 정색을 해? 난 그냥 해 본 소린데.”
“무고한 사람 잡으시니까 그렇죠!”
“이렇게 노발대발하니까 더 수상하다. 3세트 더 해.”
박 코치는 그렇게 말하며 훌쩍 떠나 버렸다. 머리도 아프고 운동도 제대로 되지 않아, 주원은 3세트를 채우자마자 기구에서 내려와 버렸다.
“답답한데 산책이나 할까…….”
주원은 훈련에 열중한 도혁을 힐긋 보고, 슬그머니 짐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는 펜싱 경기장 앞, 호젓한 달빛이 비치는 잔디밭을 맴돌았다. 발에 밟히는 잔디의 감촉도 부드러웠고, 날씨도 오늘따라 적당히 선선해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아, 꼭 그때 같네.”
3년 전 어느 여름밤이 생각났다. 아쉽게 1점 차로 금메달을 놓쳤던 사브르 개인전 날. 주원은 축하 파티 현장에서 혼자 빠져나와 남몰래 길거리에서 방황을 했다. 그때 날씨가 유난히도 좋아 서러움이 두 배로 컸었다.
문득 그의 시야에 커다란 현수막이 들어왔다. 한국체육회가 펜싱 경기장에 붙여 준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그 문구가 선명하게 보였다.
펜싱 검객들이여, 로마 땅에 애국가를!
그 문구를 읽는 주원의 가슴속에 무수히 많은 기억과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10대에 입문해서 지금껏 칼만 바라보고 살았다. 자신에게는 피스트가 삶의 무대였고, 휴식처였고, 앞으로 살아갈 터전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해서 최상의 시합을 치르는 것. 그보다 중요한 임무는 없었다. 주원의 마음속 무게추가 드디어 기울어졌다.
대답할 말이 결정되었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 먼저 씻은 다음, 깨끗한 흰 종이와 펜을 준비했다. 그리고 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들어와. 대답 들려줄 테니까.”
도혁은 5분도 안 되어 현관문을 열고 등장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 초조함, 두려움, 그리고 일말의 기대가 마구 섞여 있었다. 주원은 그를 불러 소파 맞은편 자리에 앉혔다.
“이도혁,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네.”
많이 떨리는지 도혁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주원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이 말을 한 것을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말을 꺼내기 위하여.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두자. 이번에 선을 넘으면 우리는 다시는 예전의 선후배로 돌아갈 수 없어. 한 번 실수로 밤을 보낸 거랑, 지속적인 파트너가 되는 건 천지 차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어? 나랑 평생 못 보고 살 수도 있는데.”
주원이 마지막 기회를 줬다. 하지만 도혁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전 자신 있어요. 선배랑 평생 보고 살 자신이요.”
아주 당돌한 대답이었다. 주원은 이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이렇게까지 입장 차이가 극명한 둘이서 계약을 맺는 일이 가능할까, 했는데 가능했다.
“…그래. 지금부터 네 제안 받아들일게.”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도혁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가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정말…이죠.”
“어, 난 한 입으로 두말 안 한다.”
“…하아.”
도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러 차례 제 얼굴을 문질러 보고, 꼬집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실감이 나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원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주원을 올려다봤다. 꿀꺽.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도혁의 눈빛이 지나치게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