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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35화 (24/115)

35화.

“앞으로 제가 잘할게요. 정말… 정말 잘할게요.”

주원을 올려다보는 도혁의 눈빛에는 간절함과 애정이 넘실거렸다. 이 기회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주원으로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알겠다는 대답을 들려줄 수밖에.

“…알았다.”

“선배, 고마워요. 정말로, 진심으로…….”

도혁이 주원의 두 손을 쥐고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많이 긴장했는지 그의 손은 찼고 이마는 뜨겁게 열이 올라 있었다. 심지어 옅은 땀이 배어날 지경이었다. 그 솔직한 체온에 주원은 제대로 실감했다.

아, 나를 사랑하는 남자와 위험한 계약을 했구나. 그리고 돌이키기란 불가능하겠구나.

아주 정확한 진단이었다.

“자, 계약서 쓰자.”

“계약서도 써요, 저희?”

“모든 건 문서로 남겨 놔야 뒤탈이 없는 법이야.”

“너무 정 없어 보이는데…….”

“계약을 하자고 한 건 너였어.”

“음, 그렇긴 하네요.”

도혁이 순순히 인정하자, 주원은 준비해 놓은 종이와 펜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새하얀 백지는 유난히도 깨끗했다. 마치 이제부터 이들이 써 내려갈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의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원은 이미 계약서에 쓸 내용을 다 정해 놓은 상태였다.

“내가 계약서에 넣고 싶은 내용을 일단 말해 볼게. 네가 오케이 하면 바로 여기 적자.”

“좋아요.”

“첫째, 우리의 계약은 올림픽 때까지로 철저하게 한정하며 어느 경우에도 기간 연장은 없다.”

주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오직 올림픽이었지, 그 이후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IOC와 국제 펜싱 연맹이 그때 가서 억제제에 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어쨌든 도혁과의 러트 파트너십은 끊어 내고 싶었다.

도혁은 아니겠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원의 의견은 확고했다.

아래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도혁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 기간 연장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저랑 애인 사이로 발전할 마음이 없다는 거잖아요.”

“맞아.”

“그리고 전 선배 마음을 흔들 자신이 있고요. 그러니까 계약서상에 이렇게 쓰는 건 문제가 안 돼요. 결국은 제가 이길 거니까요.”

주원은 말없이 도혁을 쳐다봤다. 가만 보니 도혁은 말을 잘해서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싸워 보자는 거야?”

“잘해 보자는 거예요.”

“너 원래 이렇게 말을… 됐다. 어쨌든 이건 내 의견 수용한 걸로 해.”

주원이 첫 번째 조항을 종이에 적었다. 하얀 바탕에 정갈한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둘째.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 관계를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그건 저도 동의해요. 선배님이 곤란해지시는 거 싫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만약에 감독님이나 누가 러트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적당히 둘러대라는 말씀이신 거죠? 예를 들어 만나는 오메가가 생긴 것처럼 군다거나.”

“맞아. 잘 알아듣네. 그럼 이것도 적을게.”

주원이 두 번째 조항을 적었다. 이제 남은 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목이었다.

“마지막은… 파트너십 기간 동안은 서로의 필요에 충실하게 임한다. 어때?”

“그 충실하게 임한다에… 데이트도 들어 있나요?”

“아니, 그럴 리가.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러트 사이클에 관한 이야기야.”

주원이 바로 정색하며 도혁의 말을 쳐 냈다.

“하지만 선배님, 이 계약서에 의하면 저는 좋은 게 하나도 없는데요. 물론 저는 선배님을 꼬드기는 입장이라 을인 게 맞지만요. 적어도 데이트할 기회는 주셔야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으음…….”

갈등이 되는 문제였다. 주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마따나 이건 불공정 계약서였다. 지나치게 주원의 입장만을 반영한, 방어적인 내용이 가득했으니까.

그러니 주원도 한 항목 정도는 도혁을 위해 양보하는 게 스포츠 정신에 맞았다. 지난 10여 년간 스포츠맨십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주원은 결국 한 수를 접고 들어가기로 했다.

“좋아, 이도혁. 그러면 데이트 신청권을 주겠어.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귀는 건 아니야. 알지?”

“잘 알죠. 그리고 저는 데이트 때마다 우리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거고요.”

“하, 무슨 자신감이야?”

“무조건 선제공격을 해야 하고, 자신감 있게 전진, 그리고 또 전진하라고 가르쳐 주신 건 선배님이셨는데요.”

“인마, 그거는……! 피스트에서고!”

그 순간 도혁이 주원의 양어깨를 짚었다. 얼굴이 바짝 다가와 숨결이 스칠 만큼 두 사람이 가까이 붙었다. 주원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인생이 곧 피스트의 확장판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도 선배님이신데요.”

도혁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쪽,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이건 계약 도장이요.”

눈뜨고 코 베인 주원은 혈압이 치솟았다.

“야! 한번 매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

주원이 벌처럼 날아 도혁을 덮쳤다. 도혁은 매를 맞으면서도 실실 웃었다. 계약서도 흡족하게 썼고 도장도 찍었으니, 이제 주원은 제 것이었다.

* * *

“계약 맺은 기념으로 데이트해요.”

“벌써 데이트 기회 써먹는 거냐.”

“공격은 빨리할수록 좋은 법이에요.”

도혁은 벌써 이틀째 주원에게 데이트를 조르고 있었다. 훈련받을 때도 틈만 나면 귓속말을 해 댔고, 짝을 지어 스트레칭을 할 때도 은근슬쩍 입 모양으로 데이트라고 말했다.

밤이 되어 한방에 들어올 때면 아주 가관이었다. 도혁은 주원이 가는 동선마다 따라다니며 한국 가면 데이트를 하자고 노래를 불러 젖혔다. 한번은 잠든 주원 옆에서 소곤소곤 데이트 이야기를 하다가 딱 걸려 꿀밤을 맞기도 했다.

“알았어. 한국 가면 제일 먼저 너랑 데이트할게.”

결국 그의 타령에 질려 버린 주원은 자포자기 심경으로 데이트를 수락했다.

“와, 진짜죠? 말 바꾸기 없어요.”

“나 말 안 바꾼다고 벌써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 같은데.”

“알겠어요. 그럼 한국 갈 날만 기다려야겠네요.”

도혁은 얼마나 신이 났는지 이후 며칠간 피스트에서 날아다녔다. 숨 쉬는 시간까지 아껴 웨이트에 전념했고 박 코치를 따라다니며 온갖 전술을 익혔다.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해, 어느덧 그는 민석과 규영을 무섭게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도혁이 그토록 기다리던 귀국일. 그는 비행기에서도 주원 옆에 앉아 시종일관 실실 웃었다.

“선배, 꿈같아요.”

“뭐가.”

“멜버른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요. 특히…….”

“남들 들을까 무섭다. 조용히 해.”

주원은 도혁의 입에 오렌지 조각을 물려 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도혁은 우물우물 오렌지를 먹어 치우고 주원의 어깨에 기댔다.

“무거워.”

“제 사랑의 무게라고 생각해 주세요.”

“갈수록 느끼해지네.”

“분위기 있다고 해 주세요.”

“내가 미쳤다고.”

주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행기 창문의 햇빛 가리개를 내렸다. 도혁의 얼굴에 지나친 직사광선이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늘을 드리우자, 도혁은 조금씩 말을 느리게 하다가 이내 잠들었다. 그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든 것을 확인하고, 주원은 도혁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선뜻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피곤했나. 너무 심하게 곯아떨어졌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어. 숨소리도 엄청 색색 고르게 난다.

덩치는 커다란 놈이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순하게 잠든 모습이 주원은 안쓰러웠다. 자신의 품을 필사적으로 파고드는 것도, 이따금 잠꼬대처럼 선배라는 단어를 읊조리는 것도.

“음… 선배.”

도혁이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주원의 손등을 찾아내 그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입꼬리를 슥 올린 그는 다시 소년 같은 얼굴로 잠들었다.

어지간하구만, 이 녀석도.

주원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손이 자신의 손등 위를 감싸도록 내버려 둔 채, 자신도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이윽고 편안한 잠에 빠져든 그는 도혁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와, 둘이 이렇게 친했던가요?”

“주원이 형이 도혁이 갈구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둘이 친한 것 같아.”

복도 건너편 자리의 민석과 규영은 두 사람을 관찰하다가 깜짝 놀랐다. 서로에게 기대어 잠든 모습이 마치 한 쌍의 커플 같았다.

“이 모습 찍어서 B로그에 편집해 넣으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주장이랑 막내가 이렇게 친하답니다. 이런 컨셉으로 말이야.”

“전 찬성이요.”

“안 깨게 몰래 찍자.”

“좋아요.”

민석이 핸드폰 카메라를 켜 두 사람의 곤히 잠든 모습을 찍었다. 특히 나란히 포갠 손을 찍을 때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그는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입국 직후에 공개된 이 영상은 김민석 안규영의 B로그 사상 최다 조회 수를 기록했는데, 하루 만에 100만 뷰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댓글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댓글

채주원 옆에 이도혁이라니, 이 조합만으로도 미치겠는데 둘이 완전 세트처럼 잠들어 있네. 나 오늘 머리 풀고 달린다.

영상 찍어 주신 민석 규영 님 감사합니다. 계신 곳 향해서 108배 올리고 있습니다. 벌써 219387번째 보고 있는데 하나도 안 질리네요.

둘이 너무 잘 어울려. 이 케미 무엇? 저랑 주원 도혁 파실 분 없나요?

마지막 댓글에는 좋아요가 1,000개 넘게 박혔다. 동조하는 댓글도 넘쳐났다.

댓글

주원도혁의 미래는 밝다.

➥ 근데 도혁주원 아닌가요? 덩치를 봤을 때는 도혁주원 같은데…….

➥ 아니죠. 주원 오빠가 어디 가서 리드당할 성격은 아닙니다. 알파 중의 상알파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주원X도혁 밉니다.

➥ 이분 말씀이 맞아요. 공식은 주원X도혁!

➥ 주원X도혁 떡밥이 뜰 때마다 널리 알리는 트위터를 개설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팔로우와 참여 부탁드려요.

심지어 팬 계정까지 우후죽순으로 생성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원은 뒷목을 잡고 쓰러졌고, 도혁은 그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팬 계정을 팔로우했다. 물론, 주원X도혁 계정은 거르고 도혁X주원 계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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