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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36화 (55/115)

36화.

진천으로 돌아온 4인방은 훈련에 전념했다. 멜버른에서의 특훈과 친선전이 효과가 있었는지, 객관적인 기량이 많이 향상된 상태였다. 또한 도혁은 유난히 피지컬이 좋아져 박 코치는 그의 근력 운동을 돕다가 놀라기도 했다.

“무겁지도 않아? 너 방금 10kg 바벨 추가했는데.”

“그랬나요? 몰랐어요.”

“괴물일세.”

박 코치는 혀를 쯧 차면서 그가 들고 있는 바의 양쪽에 5kg짜리 바벨을 각각 추가했다.

도혁은 무겁다는 감각도 느낄 새 없이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선배랑 어디서 데이트를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그는 귀국한 이후로 계속 그 고민만 했다.

“이도혁, 10kg 더 늘렸는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너 상체 근력 무슨 일이냐.”

“깃털 같은데요.”

허세가 아니라 진짜였다. 주원과의 첫 데이트를 앞둔 이 시점, 그에게 힘든 일이란 없었다.

* * *

“우리 어디 갈까요?”

훈련을 마치고 1009호로 돌아와 도혁이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이었다.

“특급 호텔에서 호캉스는 어떠세요? 요새 서울에 좋은 곳 많던데요. 아니면 파인다이닝 갈까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네가 돈이 어딨다고.”

“저 주니어 대회 때 받은 상금 많이 모아 놨어요.”

주원의 거절에 도혁은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주원의 의견은 달랐다.

“됐어. 그런 데 말고 재미있는 데로 가.”

“그럼 선배님은 어떤 거 좋아하시는데요. 예를 들어주세요.”

도혁이 물었다. 주원은 아래턱을 문지르며 짧은 고민에 빠졌다.

“음… 놀이동산은 지난번에 갔고. 바람이나 쐬고 싶은데.”

진천은 갑갑한 곳이었다. 선수촌 안에 갇혀 있다 보면 바깥바람이 간절해지곤 했다. 그러니 멀리 떠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럼 혹시… 형. 부산 좋아하세요?”

“부산?”

그러고 보니 해수욕장 간 지도 오래되긴 했지. 지난번에 멜버른에 갔을 때 거친 바다 풍광을 보긴 했지만,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닷가는 아니었다. 주원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그런 바다를 좋아했다.

“부산 좋지. 광안리 바다 낭만적이잖아. 밤에 광안대교 보면 예쁘다는데 아직 한 번도 못 봐 봤어. 맨날 낮에만 가서.”

“와, 잘됐다! 그럼 저희 집으로 가요.”

“너희 집?”

“저 광안리 살아요.”

“진짜로?”

“네! 저희 집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저 어릴 때 사진도 보고, 부모님한테 인사도 드려요.”

도혁은 최근에 드라마에서 본 내용을 구구절절 읊었다. 주인공들이 한 명의 고향 집에 놀러 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부모님이 차려 주신 밥상에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 그렇게 한번 집에 다녀오면 사실상 부모님께 두 사람 사이를 공인받는 셈이 아닌가……! 약혼자나 다름없는 거지.

도혁은 과대 해석을 하며 상상을 나래를 펼쳤다.

주원은 도혁의 제안이 썩 싫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도혁의 집에서 자면 그가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설마 부모님하고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 나한테 터치를 하겠어?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은 못 하지. 그런 의미에서 그 집은 안전지대다.

“좋아. 너희 집에서 2박 3일 보내자.”

“지, 진짜요. 너무 좋아! 신난다!”

도혁이 주원을 덥석 껴안으려 했다. 주원은 요령 좋게 피하며 방 안을 한 바퀴 뛰었다.

* * *

“다들 알다시피 이번 주말에는 2박 3일짜리 외박이 있다. 평소보다 하루 더 주는 건 너희가 멜버른에서 잘하고 돌아와서야.”

장 감독은 금요일 늦은 저녁, 선수들을 모아 놓고 진지하게 설교했다.

진천 선수촌은 굉장히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혹시라도 있을 부상, 감염, 사고의 위험에서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주일에 딱 한 번만 선수촌 바깥 외출을 허락했다. 물론 나갈 때는 행선지와 동행자, 목적을 철저하게 기록하고 가야 했고, 중간중간 코치에게 무사히 있다는 것을 보고해야만 했다.

“외박의 첫 번째 원칙이 뭐냐. 주장, 말해 봐라.”

“다치치 않는 것입니다.”

“둘째랑 셋째는 뭐냐?”

“둘째도 셋째도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장 감독은 주원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털끝 하나도 다치지 말고 월요일 아침에 다시 만나자.”

이로써 4인방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도혁은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을 꾸렸다. 그리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토요일 새벽이 되자마자 주원을 깨웠다.

오늘의 드라이버는 도혁이었다. 따라서 드라이빙 음악도 도혁이 선곡했다. 경쾌하고 가벼운 노래들을 가볍게 따라 부르며, 두 사람은 부산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날씨는 청량하고 맑았다. 그러면서도 햇볕은 적당히 뜨거워 여름이 물씬 다가왔음을 알렸다. 주원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어쩌다가 이도혁이랑 멀리까지 데이트를 떠나게 됐지……. 올 초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데이트라는 말의 결이 새삼 낯설다. 도혁과 데이트. 두 단어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기도 하다.

“형, 잠깐 휴게소 들렀다 갈까요?”

“응, 좋지.”

그들은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다.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

“그럼 우리 핫도그 먹어요.”

“너 핫도그 좋아해?”

“애인이랑 놀러 가면서 핫도그 들고 사진 찍는 게 소원이었어요.”

“정정하고 싶은 단어가 있지만, 핫도그는 나도 좋아하니까 너무 뭐라고 안 할게.”

“다행이네요. 그럼 기다리세요!”

곧 도혁이 핫도그 두 개를 사 왔다. 와중에 케첩을 하트 모양으로 발라 와, 주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셀카 찍어요.”

“얼굴 맞대고?”

“잘 아시네요.”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큼 깜찍하네.

주원은 도혁이 이끄는 대로 그와 뺨을 맞대고 핫도그 역시 마주 댔다. 도혁은 팔을 한껏 뻗어 두 사람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찰칵. 투 샷이 찍혔다.

“다정해 보이네요. 내 프로필 사진 해야지.”

“…진심이야?”

“제가 이거 해 놓는다고 아무도 형이랑 저랑 사귄다고 생각 안 해요. 걱정 마세요.”

“실제로 안 사귀잖아.”

“어쨌거나 잘 나왔네요.”

요리조리 쏙쏙 빠져나가는 도혁이 얄미웠으나, 프로필 사진까지 간섭하는 건 심하다 싶어 주원은 조용히 핫도그를 먹었다. 소시지와 어우러진 반죽 맛이 무지하게 맛있었다.

날은 좋고, 간식은 맛있고, 목적지는 머지않았고.

동행자는 내 사진을 들여다보며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듯 웃고 있다.

이런 여행, 나쁘지 않네.

주원은 맑은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웃었다.

부산 톨게이트에 들어섰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여기서 광안리까지 좀 막혀요.”

“차 보니까 그럴 것 같다.”

“배고프시죠?”

“조금.”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한 상 차려 놓으셨을 거예요. 아, 아쉽다. 아빠가 출장 중만 아니었어도 낚시해 온 걸로 회 떠 주셨을 텐데.”

도혁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내내 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동네에서 칼싸움 대장이었던 자신이 아버지 손에 이끌려 검도를 시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은사님을 만나 펜싱을 시작했을 때 얼마나 말썽을 피웠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가끔은 웃음이 나오게 귀여운 에피소드가 등장했고, 가끔은 황당한 무용담이 나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도혁의 집은 광안리 해안 뒤쪽으로 뻗은 언덕길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차가 올라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경사가 높았지만 막상 올라와 보니 조망이 탁 트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와…….”

“바다 보여서 좋죠?”

“응, 서울이든 진천이든 볼 수 없는 풍경이니까.”

주원은 주차장에서 바다 구경을 하다가 도혁의 손에 이끌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니, 놀랍게도 도혁의 어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와요.”

“엄마! 왜 나와 있어.”

“국가 대표 선배랑 온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니.”

도혁과 달리 어머니는 키가 작고 소녀 같은 이미지였다. 다만 선량해 보이는 눈매가 닮아 있었다. 주원은 서둘러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도혁이 선배 채주원입니다.”

“아휴, 누군지 잘 알죠. TV에서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우리 집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찾아오다니 이거 완전 집안의 영광이네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리고 저야말로 부산으로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될까? 근데 고마워하기는 일러. 내가 맛있는 거 많이 해 놨거든. 얼른 밥 먹자.”

도혁의 어머니가 주원의 손을 잡아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들이 함께 들어선 거실은 상당히 넓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거실 벽 곳곳에 걸린 메달과 장식장을 가득 채운 트로피들이었다.

“거실이 좀 정신없지? 주원이 만큼은 아니지만 도혁이도 어려서부터 메달을 많이 땄어요. 맨날 자랑한다고 거실에 주렁주렁 달아 놨네요.”

“아, 엄마. 주렁주렁이라니. 내 딴에는 가지런히 달아 놓은 거야.”

도혁은 쑥스러운지 귀를 긁으며 항변했다. 주원은 가까이 다가가 메달 몇 개와 트로피를 구경했다. 어린이 대회부터 중등부, 고등부까지. 주니어 선수들한테는 꿈의 무대에 속하는 대회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차근차근 잘 컸네.

“그만 봐요. 나 부끄러우니까.”

“그래. 적당히 볼게.”

도혁이 주원의 양어깨를 붙잡아 식탁으로 끌고 갔다. 식탁 위에는 그릴이 올려져 있고, 그 옆으로는 마블링이 예술인 소고기가 듬뿍 세팅돼 있었다.

“내가 주원이 온다고 한우 좀 샀어.”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제가 구워 드릴게요. 선배님은 먹기만 하세요.”

도혁이 집게와 가위를 들었다. 도혁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 내 웃었다.

“도혁이 너 집에서는 평생 고기 안 굽더니 웬일이야?”

“아, 아니야. 나 고기 잘 굽잖아.”

어라, 예전에 나랑 고깃집 갔을 때는 얘가 다 구웠는데. 그때 분명히 집에서 맨날 자기만 고기 굽는다고 하지 않았나?

주원이 석연찮음을 느끼는 동안 치익거리며 고기가 익었다. 도혁은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주원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얼른 드세요, 선배님. 식겠어요.”

“너도 먹어. 내가 구워 줄까?”

“아니에요! 선배님 배가 일단 차야죠.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우리 도혁이가 선배님 앞에서는 순한 양이네. 집에서는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만.”

“엄마, 그만해 주세요. 제발.”

도혁이 싹싹 빌었다. 주원은 도혁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도혁아.”

“네.”

“네 방은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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