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제 방은 저쪽,”
도혁이 거실에서 떨어진 한 방문을 가리켰다. 주원은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하지만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도혁은 돌변하며 문을 가로막았다.
“저… 생각해 보니까 방을 안 치웠어요. 죄송한데 지금은 못 보여 드릴 것 같아요.”
“그래? 너 정리 정돈 괜찮게 하는 편이잖아. 어질러봤자 얼마나 어질렀겠어. 괜찮아.”
“아, 아니에요. 엄청 심각해요. 아수라장이에요!”
그는 손발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방문을 사수했다. 좀 수상할 정도였다.
“너 방 안에 뭐 있지. 그래서 나 못 들여보내는 거지.”
“…….”
“대체 뭐가 있길래 그래.”
“하아… 선배, 뭐라고 하기 없기예요.”
도혁이 마른세수를 몇 번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끼릭,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주원은 방 안에 한 발을 딛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여기가 내 방이야, 네 방이야?”
네 벽에 모두 주원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아니, 천장에도 붙어 있었으니 총 다섯 면에 붙어 있는 셈이었다. 그뿐인가. 침대 머리맡에는 주원의 올림픽 출전을 기념해 발매했던 스페셜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일곱 개였다. 복장을 조금씩 다르게 해서 총 일곱 개를 출시했었는데 그걸 다 샀던 모양이다.
입을 떡 벌리고 사방팔방에 붙은 자기 사진을 보는 주원의 모습은 당황과 놀람, 약간의 멘탈 파괴였다. 나한테 이런 사진이 있었나? 기사 사진이 아니라 관중석에서 찍은 것 같은데… 설마 직접 찍은 건 아니겠지? 출처가 의심스러운 사진도 있었다.
“…이런 반응일 줄 알았어요. 아, 미리 치워 놓을걸.”
도혁은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했다. 끙끙 신음하며 창피해하는 그를 보며, 주원은 쿡쿡 웃었다. 사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 정도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을 뿐.
가장 존경하는 선수였다는 말이 날 홀리기 위한 거짓은 아니었구나. 그 감정이 다른 길로 틀어졌을 뿐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 온 건 맞네. 꼭 해바라기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졌다. 물론, 7개의 피규어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부담감에 시선을 피했다.
“방 구경 잘했어? 그러고 보니까 도혁이가 아주 주원이 사진으로 도배를 해 놨는데.”
“엄마, 그 이야기 하지 마. 나 창피해.”
“창피하긴. 너 평소에 그 사진에 손끝만 갖다 대도 건드리지 말라고 난리를 쳤으면서.”
“아, 제발요.”
“주원이 앞이라 부끄러워?”
도혁의 어머니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도혁은 온몸을 배배 꼬며 괴로워했고, 주원과 도혁의 어머니는 한참 동안 그를 놀렸다.
“아 참, 나 오늘 계 모임에서 온천 가는 날이라 집 비우는 날이야. 지금 나갈 거니까 선배님 잘 챙겨 드려.”
어쩐지 외출복 차림이더라니, 도혁의 어머니는 서둘러 문을 나섰다. 주원은 깍듯하게 인사하며 그녀를 배웅했지만 심정은 곤란했다. 어머니가 나간 이후 미묘하게 볼을 붉히고 있는 도혁이 거슬렸다.
이 집이 안전지대라고 생각해서 왔는데… 어머니가 나가 버리시면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잖아.
이 자식이 나쁜 마음 먹으면 어떡해?
“아… 엄마가 나가 버렸네. 이 집에 우리 둘뿐이다.”
“뭐?”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요.”
“…….”
예전 같았으면 엎어치기 메치기로 응수하면 된다고 가볍게 마음먹었겠지만, 요즘의 주원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공식적인 데이트 중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도혁의 장단에 맞춰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혁이 하는 행동들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거나, 짜증 내거나, 밀어내기 어렵단 소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
주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도혁이 다가올 때마다 번번이 패배하곤 했다. 맨 처음 고백을 받았을 때는 박치기를 해서 퇴치했으나 그 다음번에는 입술을 허락했고, 자신의 의지로 손을 잡았고, 그 모든 대시들을 뿌리치기 힘들었으며, 그리고 호주에서는…….
으으, 그만 생각하자.
주원은 머리를 감싸 쥐며 끙끙댔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발견한 도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선배님, 어디 아프세요? 머리 아파요?”
“어, 두통이 있네.”
“어떡해. 약 드실래요?”
“아무래도 바깥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아.”
“그래요? 그럼 우리 지금 나가요.”
차라리 이 녀석을 뺑뺑 돌려서, 산책 후 나가떨어진 강아지처럼 만들어 버리자. 주원은 굳게 결심하며 운동화를 신었다.
순간 스퍼트는 네가 좋을지 몰라도 난 지구력에 있어서 펜싱계 최강자라고. 각오해라, 사악한 멍멍이.
주원은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도혁과 함께 문을 나섰다.
그들은 아파트 단지를 나서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날이 맑고 바람은 시원해 걷기에 딱 좋았다.
“이 동네는 꼭 외국 같아. 바다가 있어서 그런가, 휴양지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도심이기도 하죠. 전 이 동네가 너무 좋아요.”
“응, 낭만적이야.”
“선배는 낭만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안 그렇게 생겨서 낭만 챙긴다는 소리 자주 듣지.”
주원의 말에 도혁이 뒷짐을 지면서 걸음을 느리게 했다. 그리고 주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누가 그래요? 선배 낭만하고 어울리게 생겼는데.”
그러다가 한순간에 웃음을 터뜨린다. 흐린 하늘에 쨍쨍한 햇볕이 드는 듯, 그의 얼굴에는 어떤 그늘도 없었다.
참 예쁘게도 웃네. 해맑다, 해맑아.
주원은 자신에 대해서라면 뭐든 긍정적으로 말해 주는 도혁이 고마웠다. 대시가 부담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든든한 팬이 곁에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그런 의미로 우리, 낭만 한번 즐겨 볼까요.”
“어떻게?”
“아이스크림 먹어요.”
도혁이 가리킨 곳에는 파라솔을 펴 놓은 아이스크림 노점이 있었다. 추억의 레인보우 아이스크림 상자와 콘을 보며 주원은 깜짝 놀랐다.
“이거 초등학교 때 먹어 보고 한 번도 안 먹어 봤어.”
“광안리 명물이에요. 그것도 저기 바닷가에는 없고, 우리 집에서 버스정류장으로 나가는 길목에만 있어요.”
“와… 너무 신기해.”
주원은 간만에 마주친 어린 시절 추억이 반가워 미소 지었다. 도혁은 그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며 자기도 따라 웃었다.
“아이스크림 좀 주세요. 혹시 5단 돼요?”
“5단은 이 날씨에 다 녹아서 무너져요, 청년. 3단으로 해.”
“이런. 좀 선선할 때 와서 5단 도전해야겠네요. 그럼 3단으로 두 개 주세요.”
“색깔 골라요.”
주인아주머니가 아이스크림 통을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주원이 기억하는 그대로 하얀색부터 옅은 노란색, 민트색, 보라색이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전 보라색 많이. 나머지는 적당히 주세요.”
“선배님도 보라색 좋아하세요? 저도 똑같이 주세요, 아주머니.”
“알겠수.”
곧 두 사람은 콘 위에 둥그렇게 퍼 올린 아이스크림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주원은 보라색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눈을 크게 떴다.
“와, 그 맛 그대로야.”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다행이다.”
“나야말로. 어디 가서 이걸 먹겠냐.”
주원과 도혁이 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둘이 사이 억수로 좋네.”
주인아주머니가 그들에게 거스름돈을 건네며 말했다.
“네?”
“서로 무지하게 쳐다보잖아. 이 총각은 한순간도 눈을 못 떼네.”
“저희가… 아니, 제가요?”
주원은 황당해서 물었다.
“응, 키 큰 총각 닳겠어. 작작 쳐다봐. 그러다가 장가 못 가.”
“아니, 제가 언제…….”
그러다가 한 무리의 손님이 와서 대화가 중단되었다. 주원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도혁은 그의 옆에서 실실 쪼갰다.
“야, 웃지 마.”
“선배가 저를…….”
“아니라고. 그냥 저분 의견일 뿐이야.”
“닳도록 쳐다봐 주신다니 영광이에요.”
“아니라니까. 그만해라, 좀.”
주원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거렸다. 도혁은 그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먹었다. 태어나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근데 선배가 투어 버스 타고 싶어 할 줄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원래는 너희 집에서 놀고먹으려고 했는데, 네 체력을 쫙 빼놔야 할 일이 생겼거든.
“관광지 왔으니 한번 타 줘야지.”
“전 선배랑 함께라면 뭐든 좋아요.”
“그래. 저기 버스 온다.”
정류장에 <부산 시티 투어 버스>가 멈춰 섰다. 주원과 도혁은 빨간색의 커다란 버스에 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일반 버스와 구조가 달랐다. 지붕이 없이 뻥 뚫려 있어 시원한 바람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었다.
“와, 너무 좋아요.”
“그러게. 높이가 있으니까 시가지도 잘 보이고 좋다.”
버스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광안리 일대를 돌았다. 저 멀리 활기찬 낮의 해변 모습과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광안대교가 보였다. 차는 곧 해운대 방향으로 빠졌다.
쭉쭉 뻗은 시가지에 높다란 건물들이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풍경과 어우러진 파란 바다는 굉장히 평화로워 보여, 주원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가 사진을 몇 장 남겼다.
“사진 찍을래요?”
“많이 찍었어.”
“바다 말고 우리 둘 사진이요.”
도혁은 핸드폰을 꺼내 셀카 모드를 만든 다음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주원과 얼굴을 가깝게 마주 댔다. 바로 오늘 아침에 이렇게 사진을 찍기도 했고, 이제는 뺨이 닿는 정도에는 면역이 생겨 주원은 도혁이 거북하지 않았다.
“하나, 둘,”
주원이 프레임 속에 담긴 제 얼굴에 한참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도혁이 셋을 외쳐야 할 타이밍에 볼에 뜨끈한 것이 와닿았다.
찰칵, 하는 소리와 동시에 주원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자식이!”
주원이 팔꿈치로 도혁의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도혁은 요령 좋게 그의 공격을 피하며 두 손을 모았다.
“데이트잖아요. 한 번만 봐주세요.”
“이게 정말.”
“키스는 안 할게요. 약속드려요.”
도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원은 그 말이 솔깃했다.
“진짜야? 너 오늘 나한테 키스 안 한다고?”
“네, 진짜예요.”
“한번 믿어 본다.”
“사나이 간에 약속이니까 저 한번 믿어 주세요.”
“흠… 좋아.”
주원은 기분을 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혁은 진심이었다. 진짜로 키스를 할 마음이 없었고, 주원과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 주원이 너무 무서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