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살짝 졸아붙은 도혁은 주원의 눈치를 보며 경치를 구경했다. 초록빛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햇살을 머금은 채 나부꼈다. 찰칵. 순간의 여름을 포착한 데 성공한 도혁이 환하게 웃었다.
“선배님, 이것 좀 보세요.”
도혁이 주원에게 핸드폰 액정을 보여 주었다. #여름 #부산 #청량 등 수많은 해시태그를 단 글이었다.
“방금 올렸어요. 예쁘죠?”
“너 사진에 소질 있네.”
주원은 속으로 감탄했다. 사진은 구도도 좋고 색감도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찍는 이의 행복함이 잘 담겨 있었다. 딱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면 사진 한구석에 주원의 손이 같이 찍혔다는 것 정도.
지잉. 지잉. 알람이 울렸다. ‘좋아요’가 쌓이는 소리였다.
“사진 반응 좋네.”
“선배님이 업로드하실 때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 돼요.”
도혁이 손사래를 쳤다. 그때 DM 수신을 알리는 알람이 떴다.
“어, DM이네.”
도혁은 주원이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거리낌 없이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주원은 나름 빠르게 고개를 돌려주었으나, 워낙에 동체 시력이 좋아 몇 글자를 읽고 말았다.
선수님, 부산에 계신다니 너무 반갑네요. 저도 지금 부산인데…….
지잉. 지잉. DM 수신음이 끝도 없이 울렸다. 내용은 쉽게 유추되었다. 주원도 SNS를 개설한 초창기에 수없이 많은 오메가 팬들에게 개인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어 상상이 갔다.
현재 펜싱계에서 주목하는 신인인 도혁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주원의 주변만 봐도 새로운 국대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러니 팬들에게 메시지가 쇄도하는 건 당연지사지.
…잠깐만. 얘가 DM을 많이 받든 말든. 팬이 줄줄이 따르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정신을 차린 주원은 무심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봤다.
“좋아요 말고 DM도 오나 보네. 인기 좋아.”
“네?”
“직접 만나자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어… 네. 그렇긴 한데.”
“만날 거냐?”
“제가 왜요? 저는 선배 만날 시간도 모자란데요.”
도혁은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주원은 여름의 풍경과 조화를 이룬 그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너 요새 느끼함으로 컨셉 바꿨구나.”
그가 중얼거리자 도혁이 주원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설마 질투하시는 건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주원은 도혁의 굵은 팔뚝을 팍 쳐 내며 정색했다.
질투는 무슨 놈의 질투야. 내가 아는 투는 사투와 결투뿐이다.
주원은 자기 혼자 열을 내며 고고하게 거리의 풍광을 쳐다봤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마린시티에 닿았다.
“여기 내렸다가 가요, 선배.”
“그러자.”
정류장에서 내린 두 사람 앞에 이국적인 느낌의 부두가 펼쳐졌다. 해운대 바다를 끼고 있는 요트 선착장과 화려한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동네 좋네.”
“저도 여기 좋아해요. 도심과 바다가 어우러졌잖아요.”
그들은 유유히 흘러가는 요트, 산책을 나온 강아지, 멀리 보이는 동네의 풍경을 살피며 걸었다. 10여 분 걷다 보니 외국 휴양지를 연상케 하는 펍들이 줄지어 나왔다.
“더운데 맥주 한잔 어때요.”
“그래. 마시고 가자.”
마침 목이 말랐던 주원은 흔쾌히 도혁의 제안을 수락했다. 두 사람은 개중 손님이 적어 보이는 곳을 골라 들어갔다. 눈썰미 좋은 종업원이 주원을 알아봤다.
“어머! 어떻게 부산에 계세요?”
“여행차 왔습니다.”
“팬이에요. 사인해 주세요!”
“물론이죠.”
주원은 종업원이 내미는 종이에 매직펜으로 사인을 해 주었다.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던 그녀가 이번에는 핸드폰을 꺼냈다.
“셀카도 같이 찍어 주세요.”
“좋아요.”
“와! 너무 신나!”
주원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맞댔다. 거의 뺨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종업원이 셔터를 눌렀다. 얼굴이 새빨개진 종업원은 연신 고맙다며 공짜로 맥주를 내주겠다고 말했다.
“공짜는 됐습니다. 그냥 맥주랑 감자튀김 주세요.”
“아니에요. 금방 드릴 테니까 기다리세요!”
주원과 도혁은 그녀의 안내로 요트 선착장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까지 안내받아 앉았다. 그런데 명당자리에 앉았음에도 도혁의 표정이 영 안 좋았다. 부루퉁한 게 짝꿍을 빼앗긴 유치원생 같기도 했다.
“왜 그래. 얼굴이 안 좋네?”
“네, 안 좋아요.”
“뭐 때문에.”
“…선배가 다른 여자랑 다정하게 셀카 찍어서요.”
“아까 너랑도 찍었잖아.”
“그거랑은 다르죠. 저한테는 팔꿈치로 때리시고, 저분한테는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도혁은 풀죽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주원은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었다.
“그건 네가 아까 말없이 뽀뽀해서 그런 거잖아. 상황이 같아?”
“…그래도요.”
“그럼 네가 기습 뽀뽀하는데도 내가 가만히 있어야겠어?”
도혁은 눈만 들어 주원을 빤히 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조그맣게 ‘네’라고 대답했다.
“네 소원대로 될 일은 없어.”
“데이트 중인데 말이 너무 심하세요.”
“…알았어. 조용히 있을게.”
“지금 저희 되게 웃기는 거 알죠.”
“어,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다.”
주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그때 마침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와 주원의 앞머리를 어루만지고 흩날리게 했다. 도혁은 그의 조각 같은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주원 선배는 정말 완벽하구나. 내가 이런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있다니. 영원히 손닿지 않을 곳에 존재할 것 같았던 선배와…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부산에 데이트를 하러 왔어.
기분이 회복된 도혁은 턱을 괴고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봤다. 푸르고 맑은 바다, 눈부신 날씨.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더 가까워졌으면 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도혁은 먼바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주원은 그 옆얼굴을 힐긋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가로채였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갈색 머리, 항상 곱슬기가 가득해 강아지 같기만 했는데 오늘은 묘하게 다 자란 남자 느낌이 났다. 왜일까. 날 보지 않고 웃는 도혁이 그럴싸해 보인다.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 버렸나?
주원이 심각하게 자기 진단에 빠져 있을 때, 맥주가 나왔다.
“시원하게 드세요!”
“고맙습니다.”
종업원이 생맥주 두 잔과 감자튀김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와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맥주잔을 보며, 주원이 물었다.
“우리 건배는 해야겠는데. 뭘 위해서 하지?”
서로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다른 이 여행에서 무얼 위해 건배할 것인가? 주원은 알지 못했다. 한 명은 연인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가려 하고 한 명은 아주 잠깐의 일탈에 불과하다며 선을 긋는다. 그리고 반대편의 길로 도망치려 한다.
그런 우리가 무얼 위해 함께 잔을 부딪칠 수 있겠냐는 거야.
하지만 주원과 달리 도혁은 정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선배를 위해서요.”
“나?”
“그냥 선배가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나와의 연애가 아니라?”
주원의 의구심 섞인 물음에 도혁은 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웃더니, 손을 살짝 내려 옅게 물든 얼굴을 보여 주었다. 순수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자부심이 섞인 표정이었다.
“선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고 연애하자는 거예요.”
도혁이 주원의 눈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주원의 손등 위에 올렸다. 방금 전까지 맥주잔을 쥐고 있어서 그런지 손바닥에는 축축한 물기가 어려 온도가 찼다. 하지만 이 안에 담긴 뜨거움이 얼마큼인지 알기에, 주원은 차마 그에게 핀잔을 줄 수 없었다.
…감정이라는 건 전염되는 건가 보다. 아니면 나까지 이렇게 부끄러울 순 없다.
주원은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겹치지 않은 손을 들어 도혁과 건배했다.
펍에서 맥주 한잔했을 뿐인데 벌써 다음 투어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한사코 맥줏값을 받지 않겠다는 종업원을 설득해서 돈을 내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두 사람의 다음 목적지는 송도해수욕장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오래된 해수욕장 특유의 정감 있는 식당, 싸구려 놀이기구가 눈에 띄었다. 가끔가다 보이는 신식 호텔은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전학생같이 튀었다.
“여기가 부산에서 제일 오래된 해수욕장이에요. 저 어렸을 때는 되게 화려했는데… 지금은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어요.”
“오히려 난 소박하고 좋은데? 바다색도 예쁘고.”
“맞아요. 광안리나 해운대처럼 화려한 곳은 아니어도 여기 오면 진짜 부산 여름이다. 전 그렇게 느낄 때가 많아요. 저 케이블카 때문에요.”
도혁이 허공에 걸린 케이블카를 가리켰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는 상당히 큰 규모로, 고도도 엄청났다.
“케이블카가 바다 위를 나네?”
“네. 저거 타면 바닥이 투명해서 아래도 볼 수 있어요. 타실래요?”
“좋아. 재밌겠다.”
“저기 티켓 끊는 데 있어요.”
그들은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가서 왕복권을 끊었다.
두 사람은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탑승할 때처럼 줄을 선 다음, 빈 케이블카가 배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두 분 탑승하세요. 가는 데 10분, 돌아오는 데 10분 정도 걸리니까 참고하시고요.”
안내 직원이 주원과 도혁을 케이블카로 들여보냈다. 주원이 자리에 앉자, 도혁이 잽싸게 그 옆자리를 꿰찼다.
“너랑 내 덩치를 생각하면 마주 보고 타는 게 맞지 않을까, 도혁아?”
“이거 튼튼해요. 괜찮아요.”
“떨어지면 네 책임이다.”
주원은 옆으로 가까이 몸을 붙여오는 도혁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속이 이 케이블카의 투명 바닥보다도 더 투명했다.
곧 케이블카가 고도를 높이며 본격적인 주행을 시작했다. 바깥에는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갔다.
바닷가라 그런지 보라색이랑 주홍색이 섞인 노을이 유난히도 감상적이어 보이네.
주원은 케이블카 안에서 흘러나오는 철 지난 사랑 노래를 흥얼거리며 해가 넘어가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선배.”
케이블카가 한참 날고 있을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도혁이 주원을 불렀다.
“왜.”
주원이 옆자리에 앉은 도혁을 쳐다봤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 주원은 흠칫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팔과 팔, 그리고 다리끼리 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냉방이 되고 있을 텐데도 그와 닿은 곳들이 너무 뜨거워 체온이 훅 올라갔다.
무릎 위에 놓인 손 위로 도혁의 손이 겹쳐졌다. 오늘 낮에 내리쬐었던 햇볕보다도 뜨거웠다. 도혁은 가만히 주원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비틀며 다가왔다. 주원은 지금 이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메가와 사귀던 시절, 자신이 이런 자세를 잡는 쪽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