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이를 어쩐다. 지금 이 키스를 받아 줘 버리면 분명 우리의 관계는 다른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주원은 노을을 짙게 머금은 도혁의 얼굴을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여태껏 자신은 여러 가지 핑계로 도혁을 피해 왔다. 넌 너무 어리다, 철이 없다, 순간의 충동 때문에 선후배 사이를 망쳐서는 안 된다. 무수한 핑계 속에서 주원은 방황했다.
조금씩 흔들리는 스스로의 중심축 때문에.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도혁과 입을 맞추면 그 중심축은 더욱 크게 무너지게 된다. 예상컨대, 주원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도혁은 조금씩 주원 쪽으로 몸을 숙였다. 숨결이 스칠 만큼 둘의 얼굴이 지척에 놓였다. 하지만 입술이 닿기 직전, 주원은 고개를 휙 돌렸다.
“…….”
두려웠다. 연애 상대로 보이지 않던 놈과 키스를 또 한다면 그건 예상치 못한 범위의 일이 된다. 게임으로 따지면 예기치 못한 패턴의 공격을 당하는 것이다. 주원은 그런 기습 공격들이 싫었다. 누가 자기를 기습적으로 찌르면 항상 당황했고, 놀랐고, 실점으로 이어졌으니까.
지금 내 삶에는 미지수와 변수가 너무 많아. 난 그것들을 최대한 제거해 나가며 살고 싶다. 난 지금 올림픽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우직하게 바라봐도 모자라다고. 그러니 도혁이가 더 이상 다가오게 해서는 안 돼.
주원은 자기합리화를 하며 도혁을 외면했다. 도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치 대치라도 하듯이 둘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깨뜨린 것은 케이블카 안내 방송이었다.
- 곧 목적지에 도착하오니 내리실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승객께서는 이곳에서 하차하시어 돌아오는 케이블카로 갈아타 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곧 케이블카가 정차합니다.
덜컹. 케이블카가 가장 높은 곳에서 멈추어 섰다. 문이 열리고 왁자지껄 외부의 소음이 들어오자, 주원은 조금이나마 어색함을 덜 수 있었다. 그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얼른 내리자. 갈아타야 된대.”
“…네.”
도혁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주원으로서도 그의 낯빛에 드리운 그림자가 이해 갔다.
…나 혹시 나쁜 놈인가?
주원의 가슴에 죄의식이 살살 싹트기 시작했다. 데이트까지 나와 가지고 한다는 소리가 안 돼, 싫어, 키스하지 마. 세 가지만 반복하고 있다.
“…미안하다.”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주원이 말했다. 도혁도 상황이 어색한지 애꿎은 머리만 매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시무룩함이 한가득이었다.
“죄송해하실 건 없어요.”
“…그래도 미안해.”
다시 승차 지점으로 내려가는 케이블카 안에서도, 광안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침묵 속에 광안리에 도착하자 해가 완벽히 넘어가 바닷가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불을 밝힌 광안대교가 아름다웠으나, 둘은 풍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분위기를 견디며 주원은 생각했다. 괜히 애한테 상처만 줬네. 나 나쁜 놈 맞구나.
“선배, 배 안 고프세요?”
자책에 잠긴 주원을 도혁이 깨웠다.
“어, 배……? 걷다 보니 좀 고프네.”
“그렇죠? 제대로 밥을 먹은 게 없어서.”
“응, 어쩌다 보니.”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 아무거나 괜찮아. 너는?”
“부산까지 왔으니까 조개구이 같이 먹고 싶어요. 저쪽에 조개구이집이 밀집해 있거든요. 제가 맛있는 데 알아요.”
도혁이 해변가 끝자락을 가리켰다. 주원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해변을 따라 걷는 내내, 이상하게도 연인으로 보이는 조합이 엄청 많았다. 백사장 버스킹을 듣는 사람들도 죄다 연인, 플리마켓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다 연인. 펍과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옆에 서 있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맞추고, 소리 내 웃기도 했다. 빛으로 반짝이는 대교를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 줬고, 때로는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다. 주원은 자신과 도혁만 이 흥겨운 바닷가에서 유리된 존재인가 싶었다.
약간 과장 보태서 너랑 나만 안 사귀는구나, 도혁아.
그는 끔찍한 어색함과 싸우며 걸었다. 거의 15분 이상 걸은 끝에 둘은 야외에 좌석을 마련해 놓은 조개구이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수기를 맞이해 신이 난 듯한 사장이 광안대교가 잘 보이는 자리를 내주었다.
주문을 넣자 음식은 금방 나왔다. 도혁은 연탄불에 조개를 부지런히 구워 주원 앞에 쌓아 주었다. 자기는 한입 먹지도 않고 그저 구워서 주원 앞으로 나르기만 했다. 그 모습에 주원은 닫았던 입을 열었다.
“조개 무덤이라도 만들 생각이냐. 죄다 내 앞에만 쌓으면 어떡해. 너도 먹어.”
가벼운 핀잔을 주면 웃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도혁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선배가 맛있게 드셨으면 해서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배불러요.”
그러더니 도혁은 큼직한 키조개를 잘라 주기까지 했다. 주원은 점점 분위기가 망해 가고 있음을 느꼈다. 평소처럼 재잘재잘 떠들면서 주접이라도 떨어 주었으면. 하지만 도혁은 아까부터 전혀 신나지 않아 보였다. 무척이나 상심한 낯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한단 말인가. 주원은 조개를 먹으며 열심히 연구했다.
“다 먹고 산책갈래?”
“좋아요.”
이렇게 밝은 곳에서 서로의 낯만 보고 있다 보면 체할 것 같아 꺼낸 말인데 도혁은 순순히 수락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바로 바닷가로 나갔다.
철썩. 파도 소리와 저 멀리 들려오는 무명 밴드의 버스킹 소리가 뒤섞여 귓가를 간질였다 거기에다가 초록과 남색으로 물든 대교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화려한 빛의 향연이 주원의 감탄을 자아냈다.
“다리에 불 들어오니까 정말 멋있네.”
“그렇죠.”
“부산에 온 기분이 물씬 난다.”
도혁은 마땅히 대꾸하지 않고 모래사장에 털썩 앉더니 수평선을 바라봤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주원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회피하려 해도 자꾸만 케이블카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야기를 나눌 타이밍이 됐구나. 직감한 그는 도혁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주원의 얼굴에 소금기 섞인 짭짤한 해풍이 불어왔다. 그 때문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주원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질문을 시작했다.
“아까는 왜 피했어요?”
직설적인 질문에 주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속이 복잡하다고 있는 대로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것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굳이 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일단은 들려줘야겠지.
주원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받아만 준 것 같아서.”
“그게 전부예요?”
“…응.”
도혁은 잠시 침묵했다.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주원은 목이 탔다.
“물론 데이트라고 해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줘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 발상은 저질들이나 하는 거지. 다만 제가 정말 궁금한 건요. 아까 피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냐는 거예요.”
주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복잡한 속을 들켜 버리는 게 두려웠다.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으니.
“아무 생각 없었어.”
“정말로 아무 생각 없으셨어요?”
“…….”
“아니었죠, 선배?”
도혁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주원은 속이 뜨끔했다.
“속으로 생각 많이 했죠, 선배. 그냥 제가 거북해서 밀어낸 거 아니잖아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눈을 보면 알죠.”
도혁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시선이 너무나 올곧아 어떤 거짓을 말해도 들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주원을 엄습했다.
“이도혁. 나는… 우리 사이가 담백했으면 좋겠거든.”
“그런데요.”
“…….”
“선배, 말해 주세요.”
주원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마주한 아이처럼 혼란스러웠다. 이 감정은 전혀 유쾌하지 않아. 내가 나이지 않게 만드니까. 그래서 난 네가 거슬리는 거라고.
그러니 이제 그만 날 곤란하게 만들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려고 오랫동안 벽을 쌓아 왔다.
하지만 파도가 너무 강하면, 벽은 의미가 없다.
“저한테 숨기지 마세요.”
파도가 거듭 벽을 때리면 언젠가는 균열이 간다. 그리고 아주 작은 틈만 생겨도 곧 그 벽은 허물어진다. 피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파도를 닮은 이도혁이라는 인간은.
그래서 주원은 속에 숨겼던 말을 꺼냈다.
“…난 너랑 이러고 싶지 않아. 어디까지나 담백한 파트너 사이였으면 해. 그런데…….”
도혁의 눈이 절실하게 자신을 두드리고 있었다. 주원은 먼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울렁였다. 너무 어지러워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도혁의 곧은 눈빛 같은 것.
“내가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네가 자꾸 날 이상하게 만들어, 도혁아. 휘말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그들 앞으로 어린아이들이 싸구려 폭죽을 들고 뛰어갔다.
“불꽃놀이 하자!”
“와아!”
아이들이 외치며 폭죽에 불을 붙였다. 곧 피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로 불꽃이 날아갔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을 파랗게, 빨갛게, 노랗게 그리고 하얗게 펑펑 불태우고서 불꽃들은 피시식 사그라들었다
“선배.”
도혁이 주원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등 너머로 밤하늘이 쏟아질 것처럼 넓고 깊게 펼쳐져 있었다. 주원은 밤하늘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쏘아 올린 불꽃은 진작 사그라들었는데, 왜 자신의 눈앞은 이다지도 밝을까.
멍하니 있는 주원에게 도혁이 조금 더 몸을 가까이 숙였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더 오롯이 바라볼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불어온 짭짤한 해풍이 그들 사이를 부드럽게 갈랐다.
이윽고 도혁이 자신의 뺨을 감싸고 고개를 기울이는 영원 같은 시간 동안, 주원은 이 장면이 일평생 기억 속의 어느 한 페이지에서 선명하게 남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지겹고도 사랑스러운 후배와의 관계가 결국은 비극으로 끝난다 해도, 이 밤의 키스를 절대 후회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