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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40화 (59/115)

40화.

“…입술이 다 부르텄네.”

주원은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키스한 흔적이 입술에 고스란히 남았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만든 기분에, 그의 속이 시끄러웠다.

그냥 한 것도 아니고 아주 길게, 요란하게도 했다. 이번에는 기습도 아니었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우발적으로 입을 맞춘 것도 아니었다.

키스를 촉발한 요인은 낭만이었다.

“으아… 이제 도혁이 얼굴을 어떻게 보냐.”

민망함과 수치심, 낯 뜨거움에 주원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욕실에서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후우. 그는 심호흡을 하고 욕실 문을 열었다.

다른 가족들이 모두 집을 비워 도혁과 단둘이 밤을 보내야 한다니 조금 절망스러웠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나. 주원은 반쯤 해탈해 있었다.

“실례 좀 하자.”

“어서 들어와요, 선배.”

도혁은 다른 욕실에서 씻고 왔는지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은 모습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다시 들어와도 민망하네. 벽이랑 천장까지 내 사진으로 도배라니.”

아까도 충분히 부끄러웠건만, 한바탕 일을 치르고 돌아와 방을 다시 보니 더했다. 정황상 도혁은 부산에 오랜만에 내려왔을 테고, 그럼 이 사진들은 꽤 옛날부터 붙어 있었다는 소리였다.

“내 사진에 둘러싸여서 잘 생각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주원의 솔직한 심경 토로에, 도혁은 소리 내 웃더니 책장으로 향했다. 딱히 책이나 참고서랄 것은 없이 깨끗한 책장에는 낡은 앨범이 몇 개 꽂혀 있었다.

“그럼 제 사진 보세요. 공평하게요.”

“너 어릴 때 앨범이야?”

“네. 돌 되기 전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다 있어요.”

도혁이 주원에게 꽤 큰 앨범을 하나 건넸다.

“와, 완전 어릴 때네. 너 이렇게 귀여웠어?”

주원은 포대기에 둘둘 말린 아기 도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커다란 갈색 눈에 곱슬머리가 꼭 명화에 나오는 아기 천사 같았다. 게다가 키나 덩치도 작은 편이었는지, 또래 친구들과 바닥을 기고 있을 때는 유난히 조그마한 땅콩 같았다. 감탄을 연발하는 주원을 보며 도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은 안 귀엽고요?”

“190cm가 넘는데 뭐가 귀여워. 네가 우리 팀에서 압도적으로 크잖아.”

“꼭 덩치가 크다고 귀엽지 못한 건 아니에요. 이 사진 봐 봐요. 제가 제일 큰데 제일 귀엽잖아요.”

도혁이 몇 페이지를 넘겨 유치원 시절의 사진을 펼쳤다. 장난감 칼을 든 남자애 여럿 중에 도혁 혼자 삐죽하니 솟아 있었다. 얼굴에는 개구진 미소를 띠고, 앞니는 톡 빠져 있고, 양쪽 무릎에 반창고를 붙인 유치원생은 씩씩하고 귀여웠다. 인정이었다.

“그렇네. 이 사진은 진짜 귀엽다.”

주원이 입꼬리를 올려 웃자, 도혁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대신 약간의 긴장과 초조함, 수줍음이 드리워졌다.

“선배… 그렇게 웃지 마요.”

“내가 뭘.”

“제 사진 보면서 귀엽다고 웃으면, 저 미쳐요.”

“그렇게 따지면 나는? 넌 맨날 내 사진 보고 예쁘다, 잘생겼다, 멋있다 온갖 찬양을 다 하잖아. 내 기분은 어땠겠냐.”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부끄러울 줄 몰랐어요.”

도혁은 귓가를 빨갛게 물들인 채 순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주인한테 혼난 강아지 같아, 주원은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도 선배가 너무 멋있고 예쁘니까. 저도 모르게 찬양을 하게 돼요. 지금도 보면…….”

아직 물기가 남은 손길이 주원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젖은 머리카락과 열기 가득한 손가락이 얽혀 묘한 기류를 형성했다. 주원은 헛기침을 큼큼하며 도혁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 눈 마주치면 한 번 더 키스한다. 오늘 밤은 위험한 밤이야.

둘은 침대에 나란히 엎드려 새벽까지 사진을 봤다. 청소년 시절 사진들은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라 그야말로 재미가 흘러넘쳤다. 교복을 입고서 멋을 부린 도혁, 경기에 나가기 전 허세에 가득 차 카메라 렌즈를 움켜쥐는 도혁은 주원의 웃음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또, 펜싱복을 입고 시상대에서 울먹이는 사진도 있었다. 뒤에 걸린 현수막을 보아하니 3년 전, 주원이 스무 살 나이로 올림픽에 출전할 당시와 겹쳤다.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도혁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분한 일이 있었나 보다.

“3년 전에 애기였구나.”

“고등학생인데 무슨 애기예요. 저 그때 이미 187cm였는데요.”

“너 이거 졌다고 운 거잖아. 그럼 애기지.”

“아닌데요. 다른 것 때문에 운 건데.”

“이유가 뭐였는데?”

“선배님이요.”

“응?”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 주원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도혁이 앨범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이 개인전 결승 날 억울하게 은메달에 그쳐서… 그래서 제가 서러워서 울다 찍힌 거예요. 편파 판정이었잖아요. 분명히 선배님이 동시타였는데, 내가 봤는데.”

“…….”

“그때 선배님이 울었잖아요. 내가 닿지도 못하는 데서, 나랑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막…….”

도혁이 자기 가슴을 꾹 눌렀다. 감정을 억제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여기가 너무 아팠어요. 하루 종일 국가 대표 채주원을 웃게 해 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순간 사진이 여기 있네.”

주원은 다시금 사진을 들여다봤다. 덩치는 크지만 아직 젖살이 오른 열일곱 소년. 서로를 모를 때에도 도혁은 저를 바라봐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져 왔다.

“나 이제 안 울어.”

“당연하죠. 이번에 금메달 딸 거니까.”

“아니, 못 따도 안 울어. 편파 판정 나도 안 울 거고.”

도혁이 고개를 틀어 주원을 쳐다봤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지난 올림픽은 굉장히 외로웠거든. 근데 이번에는 너랑 같이 뛰는 거니까 하나도 쓸쓸하지 않을 거 같다. 이상하지?”

주원의 말이 끝나자 도혁은 머리를 감싸 쥐며 데굴데굴 침대를 굴렀다.

“아, 선배… 제발.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지 않으시면, 제발.”

도혁은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푹 파묻었다. 덕분에 빨개진 귀 끝만 잘 보였다. 주원은 그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 * *

앨범을 들여다보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밤이 지났다. 그들이 일어났을 때는 날씨가 무척 맑고 청명했다. 아침 식탁에는 어색해하는 사람 한 명과 설레하는 사람 한 명이 앉아 적당히 애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도혁은 주원에게 빵을 구워 먹이고, 커피를 내려 먹이고, 그걸로는 모자란지 결국 밥상을 한 번 다시 차려줬다. 빵과 밥을 잔뜩 먹고 지친 주원이 손사래를 칠 때까지 리필은 계속됐다.

“형, 그러면 이제 갈까요.”

“그래. 모래사장 한 번만 더 들렀다가.”

그들은 짐을 싸서 나온 다음 해변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갈매기 몇 마리가 유유하게 창공을 가를 뿐, 오가는 인파는 적었다. 조깅을 하거나 강아지와 산책하는 여유로운 사람들만 조금 있었다.

“선배, 저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

“모래사장에 글씨 쓰고 사진 찍고 싶어요.”

도혁이 어디서 나뭇가지를 들고 와 진지하게 말했다.

“뭐라고 쓸 건데?”

“오늘부터 1일.”

“뭐? 너 그렇게 쓰기만 해 봐. 내가 가만둘 것 같아?”

주원이 정색하며 도혁을 쫓아갔다. 도혁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도망가 평평한 모래 위를 달리며 글씨를 썼다. 주원은 정신없이 그를 쫓아가며 그가 쓴 글씨를 지우려 했다.

그런데, 막상 글자를 보니 지울 수 없었다.

사랑해

세 글자를 쓰고서 해맑게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 도혁은, 반칙이었다. 약속된 문구가 아니잖아, 망할 놈아. 주원은 속으로 험한 말을 하며 입술을 씹었다. 너무 분했다.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 도혁이 너무 귀여워서.

광안리에서 출발할 때는 주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 안에서 대화가 끊기면 어색할 것 같아, 그는 도혁에게 음악을 부탁했다.

“제 핸드폰에 있는 플레이리스트 연결할게요.”

“응.”

곧 카 오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뻔하디뻔한 사랑 노래들 사이, 일전에 둘이 같이 들었던 팝송도 끼어 있었다.

주원이 아시안게임에서 치열한 격투를 벌였던 7년 전을 추억하게 만드는 그 노래가. 그때도 도혁은 주원을 응원했다. 3년 전 올림픽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주원의 금메달을 응원하는 사람 또한 도혁일 것이다.

“좋아?”

“네. 여행 출발할 때보다 돌아갈 때 기분 좋은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나도다.

주원은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신 웃었다. 진천으로 향하는 길 내내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 * *

이튿날 아침, 주원은 개운하게 일어났다. 도혁은 벌써 운동을 하고 왔는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거실을 오가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선배?”

“응, 몇 시야?”

“7시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도혁이 물잔을 들고 와 건네며 대답했다. 그가 건네는 물잔을 받아 마시고 주원은 몸을 일으켰다.

“어, 밥 먹으러 가야겠네.”

“네, 얼른 가요.”

도혁은 주원의 손을 잡고 그의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 줘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해 드리고 싶은데요.”

“말이라도 못 하면.”

세수를 하고 나온 주원은 도혁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거울을 보니, 도혁이 저를 힐끔대고 있었다. 멍하고 몽롱한 표정이 딱 보아하니 자기 혼자 또 설레는 중인가 싶었다.

“뭐 해.”

“선배 얼굴 구경이요.”

“나 잘생긴 게 어제오늘 일이야?”

“그렇긴 한데, 오늘따라 예뻐서요.”

“…뭐가 새삼스럽게.”

“키스하고 나서 더 그런가 봐요.”

“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주원이 도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도혁은 씩 웃으며 주원의 손등을 끌어다 입 맞췄다. 뜨끈하고 말랑한 감촉에 주원은 학을 뗐다.

그러는 와중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어!? 도혁아, 주원이 형. 밥 먹으러 내려왔어요?”

로비에 민석과 규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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