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주원은 괜히 찔리는 마음에 손등을 등 뒤로 감췄다. 방금까지 도혁이 쪼물딱거렸던 손이 의식되었다.
“어, 얘들아. 같이 밥이나 먹자.”
“네, 형.”
그들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오늘은 월요일이니 선수식 말고 일반식을 먹자고 의기투합했다.
“와, 돈가스네!”
“신난다. 엄청 커.”
민석과 규영은 손바닥보다도 더 큰 돈가스 크기가 맘에 든다며 활짝 웃었다. 그러는 동안 도혁은 척, 주원의 접시를 가져가 돈가스를 썰기 시작했다.
슥슥. 그가 한입 크기로 돈가스를 썰어 주원에게 돌려주었다.
민석, 규영, 주원 모두 도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뭐 하냐.”
세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도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주원 선배 먹기 좋으라고요.”
도혁이가 왜 주원 선배 돈가스를 잘라 줘? 무엇 때문에? 민석과 규영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주원 선배 성격이라면 더 정색할 법도 한데 결국은 돈가스를 말없이 받아먹는 것도 이상했다.
예전하고 분위기가 너무 다르네.
민석은 돈가스를 아삭아삭 씹으며 의구심을 품었다. 밥을 다 먹고 후식으로 나온 요구르트를 마실 때는 더했다. 주원이 대왕 요구르트를 쪽, 하고 원샷하자 도혁이 자기가 먹던 요구르트를 건넨 것이다.
그런데 그걸 주원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서 마저 마셨다. 운동선수치고 깔끔을 떠는 편인 주원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뭐예요. 둘이 이렇게 친했나?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대?”
결국 민석이 두 사람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도혁은 그 말이 반가웠다는 듯 화색을 띠었다.
“저희 원래 친해요. 외박 때도 같이 부산 다녀왔어요.”
“둘이 놀러 갔다 왔다고?”
“네. 저희같이 부산 내려갔다 왔어요.”
“둘이서… 같이?”
“네.”
“별나네. 주원이 형, 어쩌다가 도혁이랑 놀러 간 거예요? 형 외박 나갈 때 우리 데리고는 절대 놀러 안 가더니만. 도혁이는 언제 그렇게 예뻐하게 된 거죠?”
민석이 툴툴댔다.
“바닷가 가고 싶어서 같이 갔다 왔어.”
“에이, 다음에는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래. 언제 다 같이 한번 놀러 가자.”
주원이 대답했다. 옆에서 도혁이 눈빛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 이상 부산 여행 건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음… 근데 이렇게 또 만났는데, 오늘 저녁에 자유 시간이잖아. 모여서 B로그나 찍으면 어때?”
와중에 규영이 의견을 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
민석은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쾌재를 불렀다.
“아이디어 좋다. 각자 외박 때 뭐 했는지 말하기 시간.”
“오케이. 지금 1001호 올라가서 찍읍시다. 오후 집합하기 전에 얼른!”
규영과 민석은 구내식당을 빠져나오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10층까지 올라온 네 사람은 차례로 1001호로 들어갔다.
B로그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민석과 규영은 전생부터 한 팀이었던 것처럼 합을 맞춰 가며 순식간에 방을 스튜디오로 변신시켰다.
삼각대에 핸드폰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링 모양 조명까지 달아 놓으니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식탁으로 쓰는 테이블에 네 명이 앉고 맞은편에 삼각대를 놓으니 괜찮은 구도를 잡을 수 있었다. 민석과 규영은 식탁과 삼각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고르게 조명이 퍼지도록 조치했다.
“형님들 존경스럽습니다.”
“너희는 방송국에 취직했어도 잘했을 것 같다.”
“다음 생에는 그러려고요. 너튜버로 태어나든지, 방송국에 취직을 하든지.”
“난 PD로 태어나고 싶어. 그런 의미로 오늘 진행은 제가 하겠습니다.”
민석이 숟가락을 쥐고 말했다.
“저는 보다시피 주말 동안 히피펌을 했습니다. 저의 날렵한 얼굴선을 살려 주기에 적당한 숍을 찾아 서울 시내를 헤매었는데요. 우리 주장님은 주말에 부산을 다녀오셨다고요?”
식당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민석은 모처럼 등장한 새로운 이슈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프로 B로거의 정신이 발동한 것이다.
주원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 네, 그렇습니다. 부산에 다녀왔어요.”
“그것도 우리 막내, 이도혁 군과 동행하셨다고요?”
사회자로서는 순수한 의도로 질문한 것이겠으나, 듣는 주원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부산에 간 건 맞지만 그 목적이 데이트였음을 회상하자 여러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네, 도혁이랑 다녀왔어요. 도혁이네 집도 가고…….”
“와, 진짜요? 집에 초대하다니. 두 분 그 정도로 친하셨나요?”
“가서 뭐 했는지 좀 자세히 말해 주세요.”
가서 뭘 했냐니. 주원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에 반해 도혁은 할 말이 많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아니, 쟤 대체 뭘 말하려고……! 주원은 덜컥 겁이 났다.
“선배랑 해운대 쪽도 가서 놀고, 송도해수욕장 케이블카도 탔어요.”
“오, 재미있게 놀았나 본데요. 다른 데는 안 가셨나요?”
“저희 집이 광안리 쪽이라 밤에는 광안대교 구경했습니다. 모래사장에 앉아서요.”
민석이 야유를 퍼부었다.
“분위기 좋은데요? 근데 알파 둘이서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로맨틱한 코스들 아닌가요?”
“하하. 로맨틱한 코스라니요, 아니에요. 그냥 친구처럼 다녔어요.”
도혁이 담백하게 웃었다. 주원은 그 모습에 괜한 미안함을 느꼈다.
쟤가 입 함부로 놀릴까 봐 의심해서 미안하네. 도혁은 예상보다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주원은 머쓱함에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규영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근데 주원 선배는 한 말씀도 안 하시네요. 부산 여행에 대한 감상 없으세요?”
“응, 나?”
“네, 선배도 한마디 하셔야죠.”
“어… 나는…….”
가장 기억에 남는 거라면 역시 백사장에서의 키스인데, 그걸 말할 수는 없잖아.
주원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음, 나랑 도혁이랑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데 주변에서 어린애들이 불꽃놀이를 했거든. 되게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는데… 그게 참 좋았어.”
진심으로 좋았다. 마치 달콤한 설탕을 태우듯 하던 소리와 별이 터지는 듯한 색채들. 그리고 내게 키스하던…….
“형님, 왜 이렇게 멍하세요.”
“어?”
민석이 주원의 얼굴 앞으로 손바닥을 흔들었다. 퍼뜩 놀란 주원은 표정을 수습하고 정면을 봤다. 그 맞은편에서 도혁은 턱을 괴고 주원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 영상이 업로드된 저녁, 국내 펜싱 팬덤에는 폭발적인 호응이 일어났다.
댓글
B로그 본 사람들 살아 있냐? 4인방 완전 ㄱㅇㅇ
➥ 귀여운 것도 귀여운 건데, 막내랑 주장 케미 무엇?
➥ 둘이 부산 여행까지 다녀왔을 줄 몰랐어. 막내랑 주장이면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다 아님?
➥ 주장 덕질 10년 다 돼 가는데 저렇게 정 주는 거 처음 봄 ㅇㅇ 대박이다 우리 주장이 저렇게 말랑하게 웃다니 막내 고마오!!!
➥ 그뿐이냐 나는 막내 덕후인데 주장 바라보는 눈에 꿀 떨어져 ㅠㅠ
다시 말해 본다. 주원X도혁이 공식이다.
➥ 당연한 거 아니냐? 말해 모해 입만 아프지
➥ 원래 주장 막내가 오리지널이었어. 요새 도혁X주원 떠오르는데… 신이 너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국대 4인방 예능 해 줬으면. B로그도 좋지만 너무 감질나!
➥ 나 안 그래도 K사 S사 M사 다 건의 글 쓰고 왔다. 올림픽 다큐로는 모자라다 이거예요. 멜버른이랑 진천에서 훈련 모습 찍은 <다큐 7일>은 올림픽 끝나고 풀린다더라.
➥ 그럼 4인방 볼 수 있는 방법이 비정기적으로 올라오는 B로그뿐이잖아 ㅜㅜ 더 많은 주장X막내 콘텐츠를 원해오… 방송국놈들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떡밥들은 펜싱 게시판에서 일반 커뮤니티로 퍼졌고, 인기들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곧 한 예능 PD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칼보다 남자, Knife-4] 약칭 K4라는 4부작 예능의 시작이었다.
“네? 예능을 찍어요? 훈련하기도 바쁜데…….”
처음 소식을 접한 것은 주원이었다. 그는 훈련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며 출연을 주저했지만, 정작 장 감독과 민석, 규영, 그리고 도혁은 모두 신난 분위기였다.
“내가 공중파 예능에 나가다니! 김씨 가문의 영광이다.”
“관찰 예능이라서 우리 숙소에 카메라 단다고 하더라. 너흰 그래도 좋냐?”
“와, 저 그런 거 너무 좋아해요. 너 혼자 살아라, 이런 프로그램에서나 쓰는 촬영 기법 아닌가요? 연예인 된 기분이라서 난 너무 좋은데.”
주원이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는 4인방이었다.
사실 주원이 출연에 조심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훈련은 핑계였고, 도혁과의 미묘한 기류가 방송에 잡힐까 봐 겁이 났다.
아무리 평범한 선후배 사이를 연기한들 이미 이렇고 저런 짓을 한 사이인데, 장시간 관찰 카메라를 달아 놓으면 뭐라도 티가 나지 않을까?
하다못해 스킨십 수위도 조절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돈가스를 썰어 주고 요구르트를 먹여 주지 않았던가. 주원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받아먹고 나서 아차, 했더랬다.
그러니 적당한 핑계를 대서 거절하고 싶은데, 룸메이트인 도혁마저 저렇게 방방 뛰고 있으니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감독님, 지금 당장 추진하죠. 이제 저희 베를린 펜싱 월드컵 참가할 때까지 진천에서 감금 생활하잖아요. 예능 찍는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또, 생활체육으로서의 펜싱! 제가 한번 기깔나게 홍보해 보겠습니다.”
가만 보면 가장 신난 것은 도혁이었다. 장 감독은 안 그래도 연맹에서 이번 촬영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며, 방송국 측에 즉시 공문을 넣겠다고 했다.
“에페팀이 채 가기 전에 우리가 빨리 선점하자고. 박 코치, 빨리 문서 작성해!”
장 감독이 허허 웃었다. 모두가 웃는 가운데 주원의 머리 위에만 먹구름이 한가득이었다.
아, 걱정되는데. 별일 없이 4회짜리 예능을 통과해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