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4인방은 취재진의 차량을 타고 독일 대사관이 있는 서울 한복판까지 왔다.
“얘들아, 지금부터는 사진 찍어야 돼. 다들 준비됐냐?”
“물론이죠. 이날을 위해서 제가 히피펌 한 거 아니겠어요.”
“저는 안경테를 새로 맞췄고요.”
“도혁이는?”
“저는 딱히 준비한 것은 없지만 원래 사진발이 잘 받아요.”
“아주 좋아. 가자.”
마침 대사관 근처에 사진관이 있었다. 4인방은 차례로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 비자 제출용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말했다. 국가 대표를 알아본 사진사가 크게 기뻐하며 주원부터 자리에 앉혔다.
“선배 조명 받으니까 진짜 잘생겼네. 와, 프로다워.”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사진을 찍는 주원을 보면서 도혁이 박수를 쳤다.
“무슨 박수를 다 치고 그래.”
“멋있어서 그래요. 너무 잘생겼잖아요.”
찬양은 사진이 인화되어 나온 뒤에도 계속됐다. 도혁은 간식을 간절하게 바라는 강아지처럼 주원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한 장 줘?”
눈빛을 빛내다 못해 사진에 빨려들고 있는 도혁에게 주원이 물었다.
“진짜요? 저 가져도 돼요?”
“어차피 비자용으로는 두어 장만 있으면 될 텐데, 너 하나 주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 한 장 줄 테니까 가져라.”
“와……! 저 너무 기뻐요. 생일선물 받은 것 같아요.”
주원이 인화된 사진을 한 장 건넸다. 도혁은 거의 뛸 것처럼 좋아했다.
“생일선물은 무슨. 사진 한 장이 뭐라고 생일에 비유를 해.”
“저 내일 생일이거든요.”
“뭐?!”
갑자기 나온 발언에 주원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너 생일인데 왜 말 안 했어!”
“아무도 안 물어보셔서…….”
“도혁이 생일이야?”
“생일이라고?”
“네, 내일이 제 생일이에요.”
민석과 규영이 달려와 도혁을 에워쌌다. 도혁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과 규영은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축하를 해 주었다.
그런 도혁을 보는 주원의 심경은 복잡했다.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자신이 일방적으로 밀어내는 사이다. 그래도 그냥 선후배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주원도 그 정도 인지는 하는 상태였다.
연인이라고 할 순 없어도 우정은 아닌 회색 지대에 위치한 사이인데, 생일 정도는 챙겨 줄 수 있지 않나. 내가 너무 무심해 보여서 도혁이 지레 겁을 먹고 말하지 못한 것일까.
난 도혁에게 기댈 만한, 편한 사람이 아닌 걸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주원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복잡했다. 지나온 일들과 현재 도혁과의 무게 균형을 생각하자, 별의별 감정이 다 들었다.
“막내, 말을 했어야지. 왜 말 안 했어?”
“…말할 겨를이 없기도 했고요.”
도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원의 눈치를 보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선배랑 단둘이 보내고 싶어서 오늘 저녁쯤 슬그머니 말해 볼까 했어요.”
카메라가 민석과 규영의 사진 촬영장으로 돌아간 순간, 도혁이 속삭였다. 주원은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거였냐.”
“네. 괜히 섣불리 말했다가는 시끌벅적 파티라도 열릴까 봐…….”
“일단 알겠어. 접수 완료.”
“진짜요?”
“나 빈말 안 한다니까. 일단 기다려 봐.”
주원은 카메라가 이쪽을 향하지 않은 것을 재차 확인하고 도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다가 확,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만. 생일을 단둘이 보내고 싶다니. 이거 꼭 애인 같잖아? 주원은 도혁의 행동이 마뜩잖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도혁이 하는 생각도 무리가 아니었다.
애인이냐 아니냐, 하면…….
지금 우리 사이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파트너는 파트너인데, 분위기에 휩쓸려 바닷가에서 키스하고, 이제는 단둘이 생일파티를 한다.
이건 대체 뭐야?
심각해하는 주원과 달리 도혁은 마냥 들뜬 듯 꼬리를 붕붕 돌리며 사진관 안을 돌아다녔다.
네 사람은 모두의 여권 사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진이 출력되어 커팅 과정까지 끝나자, 도혁은 주원에게 사진 한 장을 슬며시 건넸다.
“네 사진을 왜 나 줘?”
“선배도 저 주셨잖아요.”
그러면서 지갑 안쪽을 보여 주는데, 이미 곱게 모셔 놨다.
“누가 보면 애인 사진인 줄 알겠다.”
“맞잖아요.”
“콱!”
주원이 살벌하게 인상을 썼다. 도혁은 아랑곳 않고 휘파람을 불며 주원의 손바닥에 제 사진을 쥐여 주었다.
“선배도 지갑 안에 끼워 두세요.”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어?”
“선배 사진 옆에 나란히요. 네?”
주원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미쳤다고 네 사진을 지갑 안에 끼워 놓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하지만 막상 도혁의 사진을 적당한 데 넣어 두려 하자, 공간이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사진을 지폐 칸에 넣기도 뭐 했다.
“하, 씨…….”
주원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도혁의 사진을 투명한 사진 칸에 집어넣었다. 자신의 증명사진과 나란히 꽂혀 있는 모습이 꼭 커플 같아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건 정말로 별수 없었다.
“와, 애인 사이 같다. 주원 선배랑 나 사귀는 사이 같아.”
“…잠깐만 여기 넣어 놓을 거야.”
“싫어요. 계속 넣어 놔 주세요.”
두 사람은 아웅다웅하며 다투면서 독일 대사관 건물에 들어갔다. 규영과 민석까지 네 명이 차례로 줄을 서고, 주원이 비자 발급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이 비자 발급 센터 입장을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주원을 필두로 들어간 내부에는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대기하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방 안으로 들어가 비자 인터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주원이 독일인 직원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유창한 독일어 발음이 도혁의 귀를 사로잡았다. 직원과 몇 마디를 주고받은 그가 자리로 돌아왔다.
“얘들아, 현금 있어? 수수료 현금으로만 받는다는데.”
“저 있어요. 규영이 형, 돈 있어?”
“응, 넉넉히 있어.”
도혁은 주원이 미친 듯이 멋있어 보임과 동시에, 그가 왜 독일어를 할 줄 아는지 궁금했다.
“선배, 독일어는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아, 도혁이는 모르겠구나. 나 엄청 어렸을 때 독일 살다 왔는데 언론에 밝힌 적은 없어.”
“세상에. 언제요?”
“초등학생 때. 나 어머니가 음악 하셔서 잠깐 나 데리고 연수 가셨었거든. 3년밖에 안 살다 왔어.”
“와, 형 뭔가 멋있어요. 해외파라니. 거기서 어떻게 지냈어요?”
“꼬맹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었겠어. 소시지 엄청 먹다 온 거 말고는 별거 없었어.”
“멋있다.”
도혁은 주원의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아 미주알고주알 사소한 사항들을 질문했다. 주원의 입술 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넌 내가 어디 출신이든 멋있다고 했을 거잖아. 서울 사람이든, 강원도 사람이든, 어디 바닷가 출신이든. 아니야?”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제는 네가 다 파악이 돼. 내가 뭘 해도 좋다고 난리 칠 네가.”
주원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도혁은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뭐랄까. 자신의 사랑을 믿어 주는 주원이 고마웠다.
항상 부정만 하던 그가, 이제는 내 사랑을 밀어내지 않는다. 도혁에게는 이게 제일 값진 생일선물이었다.
* * *
주원은 비자 발급 면접관과 마주 보고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주원이 가져온 각종 서류를 훑어보더니, 면접관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채, 비자 신청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저는 펜싱 선수로, 이번에 열리는 베를린 펜싱 월드컵에 출전합니다. 대회 참가용 출국 비자가 필요합니다. 관광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 국가 대표 선수인가요? 그러고 보니까 지난 올림픽 때 당신 얼굴을 본 것 같기도 한데……. 독일 선수랑 붙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맞습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영리하고 민첩한 퍼포먼스가 아주 인상 깊었어요. 독일인으로서는 좀 얄미웠지만요.”
감독관이 가볍게 웃었다. 주원도 따라 웃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국가 대표라는 말이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그는 주니어 선수로 활약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언론과 필드의 주목을 받았으며, 불과 중2의 나이에 국가 대표 상비군으로 뽑혔다. 재능이 보이는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1 때 정식 국가 대표가 되었고, 스물세 살인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낙오도 없이 매년 국가 대표로 선발되고 있다.
그런 그는 올해에도 올림픽에 나갈 것이고, 그 전에 가장 중요한 시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합이 바로 베를린 펜싱 월드컵이었다. 전 세계 펜싱 국가 대표가 총출동하는 이번 대회는 단순히 세계 랭킹을 겨뤄 보는 개념에 그치지 않았다. 사실상의 올림픽 전초전이었다.
그 의미를 알기에, 주원은 여느 때보다도 절실했고 또 진지했다.
“…저는 이 비자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유용하게 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좋아요. 인터뷰는 이걸로 충분할 것 같군요.”
면접관이 씩 웃었다.
* * *
“와, 비자 신청하니까 국제 대회 나간다는 실감이 확 나네요.”
“그니까. 우리 멤버로는 처음이기도 하고. 도혁이는 소감이 어떻냐?”
“얼떨떨해요. 연맹 사무실에서 유니폼 전달받은 날이랑, 호주 국대 친선전 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실감 나요.”
민석과 규영이 도혁에게 국제 대회에서의 팁, 매너, 무용담을 골고루 들려주었다. 도혁은 내내 감탄과 신기함을 내비치며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주원은 앞서 걸어가는 도혁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당장 내일이 생일이라는데 뭘 준비해야 하지? 선물은 뭘 준비해야 하며, 데리고 가기는 또 어딜 데려가야 하냔 말이야.
연애라면 몇 번 해 보았지만, 주원은 바쁘다는 이유로 애인들의 생일을 제대로 챙긴 적이 없었다. ‘나쁜 남자보다 바쁜 남자가 더 못됐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 사연도 여기서 비롯됐다.
생일로부터 일주일 넘게 지나 애인들이 좋아할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주곤 했으나, 그녀들은 번번이 화를 냈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주원과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며.
그러면 주원은 입을 꾹 다물고 변명을 포기했다. 이미 못 해 준 과거의 일을 어떻게 돌이키란 말인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큰 싸움으로 번질 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