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지금껏 만나 온 사람들은 괜찮은 사람들이었지만 주원과는 잘 맞지 않았다. 대체로 상대방 측에서 좋아한다고, 쭉 지켜봐 왔다고 말하면서 고백한 사이라서일까. 주원으로서는 저 좋다는 오메가를 굳이 밀어낼 것까지는 없었기에 대체로 고백을 수락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항상 바쁜 주원과 그런 그의 스케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방은 잦은 다툼을 하다가 결국 헤어지고는 했다. 그래서 정작 몇 명의 오메가를 사귀기는 했어도 깊은 관계로 발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때 생일을 챙겨 준 적도 당연히 없었다.
…도혁이 생일은 제때 챙겨 줄 수 있어서 다행이네.
주원은 입꼬리를 당겼다가 그런 자신의 작태를 깨닫고 식겁하며 다시 얼굴을 굳혔다.
쟤는 내 애인이 아닌데 다행은 무슨 다행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원은 도혁이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이나 실컷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좋은 레스토랑이 어디 있을지 찾아보며 진천에서 제법 멀리까지 나갈 계획을 세웠다.
“너 뭐 좋아해.”
주원이 뒤에서 도혁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옆에서 따라 걷고 있는 제작진의 카메라나 민석, 규영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끔 목소리는 낮췄다.
“제가 좋아하는 거요? 선배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음식 말이야.”
주원이 도혁의 옆구리를 찌르며 핀잔을 줬다. 도혁은 그제야 알아들은 듯 아, 소리를 냈다.
“설마 저 맛있는 거 사 주시려고요?”
“어, 그니까 빨리 메뉴 정해. 비싼 데도 다 오케이야.”
“선배, 저 지금 울어도 돼요?”
“이목 끄는 짓 하지 마.”
주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혁은 실실 웃더니 주원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선배랑 같이 가는 거면 어디든 좋지만, 저 제대로 데이트하는 기분 내고 싶어요. 프렌치 레스토랑 같은 데 가도 돼요?”
“흠, 칼질 좋지.”
주원은 사실 무슨 메뉴든 상관없었다. 도혁이 잘 먹는다면 한식, 중식, 일식, 양식, 그 외 기타 등등 동남아와 인도 요리든 뭐든 다 괜찮았다. 배불리 먹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대신에 선물은 준비 안 해야지. 다 큰 알파 놈한테 필요한 게 뭔지도 모르겠고. 우리가 무슨 애인 사이도 아닌데 챙기는 것도 우습고. 이렇듯 주원은 도혁을 챙겼다 안 챙겼다 오락가락했다. 자신의 머릿속이 도혁에게 점령당한 줄도 모르고, 주원은 끝없이 생일선물까지는 필요 없다고 되뇌었다.
주원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고서 진천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검색해 냈다. SNS 후기가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여기 정도면 괜찮겠는데. 주원은 내친김에 예약 전화까지 걸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후배들이 말을 걸어왔다.
“형, 서울 왔는데 밥 먹고 가요. 이쪽에 맛집 많아요.”
“맞아. 나 SNS에서 봤는데 여기 유명한 장어집 있잖아. 어때요?”
민석과 규영은 꼭 맛있는 걸 먹고 복귀해야 한다며 주원에게 엉겨 붙었다.
“그래, 장어 좋네. 막내도 장어 좋아하지?”
“네, 엄청요. 안 그래도 요새 몸이 허했는데 잘됐어요.”
“도혁아, 네가 몸이 허하면 이 형들은 뭐가 되니.”
민석과 규영은 황당하다며 이마를 짚었다.
“여기서 더 팔팔해졌다가는 올림픽 메달 따겠다.”
“그럼 꼭 먹여야겠네. 가죠.”
셀프 캠의 취지에 맞추어 네 사람끼리만 움직이기로 했다. 제작진에게 캠코더와 핀 마이크를 건네받은 후, 4인방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 대사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장어구이 전문점으로 이동했다. 평일이라 웨이팅 줄은 없었지만, 대신 연예인과 유명인의 사인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식당이 얼마나 유명한지를 잘 보여 주었다.
“자자, 앉자.”
서빙 아르바이트가 좌식 방을 안내해 주었다. 네 사람은 방 안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도혁은 요령껏 주원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가장 먼저 주원의 수저부터 챙겨 주는 도혁의 모습을 보며, 규영이 한마디를 했다.
“요새 주원이 형이랑 도혁이랑 엄청 친해진 것 같아. 역시 여행 효과인가?”
주원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도혁은 당황스럽지도 않은지,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요. 여행 가서 얼마나 재밌었는데요. 광안대교 앞에서 평생 못 잊을 추억도 쌓았,”
“막내야, 장어 다 익었네. 얼른 먹어라.”
주원이 장어 한 점을 집어 도혁의 입에 욱여넣었다.
“앗, 뜨거!”
도혁은 뜨겁다면서도 주원이 손수 입에 넣어 준 장어가 아까워, 불타는 장어를 잘도 받아먹었다.
“아, 미안. 뜨겁냐? 물 마셔라.”
주원이 물 잔을 건네자 도혁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천히 먹어.”
주원이 도혁의 입을 막기 위해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네, 선배.”
도혁은 주원의 마음 씀씀이에 퍽 감동한 모양이었다. 동시에 쓸데없이 용기도 얻은 모양이었다. 도혁이 밥상 아래로 손을 뻗어 주원의 손을 잡으려 들었다. 치근덕거림이 명확한 제스처였다.
이 자식이 카메라에다가 민석이랑 규영이까지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주원은 조금만 잘해 주면 바로 기어오르는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싶었다. 결국 주원은 열이 받은 나머지 도혁의 등짝을 소리 나게 때렸다.
“윽!”
“형, 왜 잘해 주다 말고 도혁이를 때려요?”
규영은 오락가락하는 주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하, 우리 도혁이가 장어 먹다 얹힐까 봐 걱정이 돼서.”
“음… 그렇구나.”
규영은 알게 모르게 석연찮은 기분이었지만, 다시 장어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밥상 아래로는 주원과 도혁의 쫓고 쫓기는 손 추격전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마치 펜싱 게임을 하듯 손장난을 쳤다. 물론 도혁의 입장에서는 손장난이었지만 주원에게는 진심을 담은 결투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잡으려는 도혁과 뿌리치고 도망가려는 주원의 손이 얽히고설켜서 상 아래에서는 난리통이 따로 없었다.
가끔씩 맞은편에서 규영이 뭐 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볼 때만 잠깐 멈추고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가 문득 주원의 이성이 돌아왔다.
뭐지. 손 빼서 올리면 그만인데 나 지금 뭐 하고 있어?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도혁이 주원의 손을 꼭 잡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혁이 세상 천진무구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주원은 손을 빼려다 말고 멈췄다. 닳는 것도 아니고 손 하나 잡혔다고 밥 못 먹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싶었다.
* * *
4인방은 간만의 서울 나들이를 만끽하고 저녁 늦게 진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과 오후 훈련 전체를 강도 높게 받았다. 박 코치는 선심이라도 쓰듯이 4시에 훈련을 마쳐 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나가떨어져 숙면을 취할 정도로 강한 훈련이었으나, 체력 좋은 4인방은 어떻게든 놀 거리를 찾았다.
사실 4시에 훈련을 마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놀아 둬야 했다.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게 4인방의 생각이었다.
“오늘은 뭐 하고 놀지. 패션쇼는 지난번 B로그에서 했으니까 그건 빼자.”
민석은 프로 B로거답게 선수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촬영해 업로드하곤 했는데, 가끔은 뻘짓에 가까운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펜싱복 입고 선수촌 런웨이 하기, 주니어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아 온 유니폼 자랑 등이 그것이었다.
“오늘은 헤어숍 놀이 어때? 너 펌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헤어스타일도 설명해 주고, 내가 상한 부분도 다듬어 줄게.”
“오, 좋은데요? 형, 헤어디자이너 완벽 빙의 가능해요?”
“날 뭘로 보고. 컨셉은 청담동 숍으로 잡자.”
규영은 1001호에 하나뿐인 주방용 가위와 빗을 들고 오며 껄껄거렸다. 보다 못한 주원이 이거라도 쓰고 놀라며 앞치마를 찾아 주었다.
“형, 땡큐. 자, 촬영 시작하자.”
옆에 있던 제작진들이 재미있겠다며 둘이 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네. 나가요.’
모두의 시선이 규영과 민석에게 집중되었다. 그 틈에 주원과 도혁은 마치 텔레파시를 하듯 눈빛으로 대화를 하고 슬그머니 1001호를 빠져나왔다. 온 제작진이 민석과 규영에게 달라붙은 덕분에, 주원과 도혁은 제작진 없이 선수촌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심지어 주원은 도혁이 차에 올라탈 때 손수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장난스러운 멘트는 잊지 않았다.
“오늘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일단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주원의 특징이자 장점이었다. 마침 훈련도 예정보다 일찍 끝났겠다, 오늘 하루는 도혁을 제대로 챙겨 줄 생각이었다.
“선배, 저 진짜 선배랑 단둘이 생일 보내는 거예요?”
“그럼 여기 우리 말고 누가 있어.”
“제 스무 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에요.”
“과장이 너무 심하다.”
“진짜인데요. 선배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생일 안 보내 보셨나 봐요.”
사랑하는 사람과 생일이라. 주원은 잠깐 회상에 빠져들었다.
주원의 생일은 12월 31일이었다. 그는 연말마다 항상 바빴다. 연맹에서 주관하는 온갖 송년회 행사에 불려 다녔고, 그렇지 않을 때에도 주로 펜싱계 인사들과 어울려 인맥을 다졌다.
그 과정에서 생일날 애인이 보고 싶었냐 하면… 음, 냉정하게 말해 ‘아니요’였다. 그렇다면 그걸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녀석은 새삼스럽게 지나간 애인들을 되짚게 만든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내 스스로가 기억을 끄집어내 도혁과 비교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정의를 그리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자꾸만 골몰하게 되고 말이다.
저 스무 살짜리의 머릿속에서 사랑이란 대체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는 걸까. 풋 익은 냄새를 폴폴 풍기며 엷은 빛깔을 자랑하고 있으리라는 것만은 알겠지만, 구체적으론 잘 모르겠단 말이지.
주원이 말없이 운전하는 모습에 도혁은 오해를 했는지 곧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일 많이 보내 보셨구나. 그래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오늘 저의 기분이거든요. 제 인생에 이런 날이 처음이라는 게 핵심이죠.”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네.”
“선배 좋아하면서 긍정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선배는 굉장히 무심하고, 상처 잘 주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