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마저도 지나간 애인들이 자주 내뱉곤 하던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주원은 그녀들이 그렇게 말하든 말든 별 신경을 안 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내가 도혁이한테 상처를 많이 줬나? 되짚어 보자면 그런 것도 같았다. 저 녀석이 아무리 무던하고 성격 좋은 녀석이라고는 해도, 알게 모르게 상처를 꽤 받았을 것 같았다. 미안하게도.
“그래서 지금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마음먹고 이 상황을 견디고 있는 중이에요. 단둘이 생일도 보내고, 절 데리고 멋진 레스토랑도 가 주시고, 또 무엇보다도… 우린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요.”
“마지막 말은 빼는 게 나았겠어.”
“사실이잖아요.”
주원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퍽 기분 나쁘지 않은 뉘앙스라는 걸 도혁도 알고, 주원도 알았다.
이내 웃음이 두 사람의 입술 새에서 새어 나왔다. 주원은 도혁의 긍정 바이러스에 옮았나, 잠깐 생각했다.
진천에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레스토랑은 숲속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치 방갈로처럼 생긴 건물이었고, 부지 전체에 잔디가 깔려 있어 펜션에 놀러 온 듯한 분위기를 줬다.
외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흘렀으며, 외국 풍경을 연상케 하는 은은한 조명이 아스라이 빛나고 있어 건물의 운치를 더했다.
“선배님, 저 벌써부터 너무 좋아요.”
“나도 마음에 든다. 후기가 좋길래 무작정 예약부터 하고 봤는데 썩 괜찮아 보이네. 여기가 미슐랭 레스토랑이래.”
“맛있는 집만 타이틀 달 수 있다는 그 레스토랑이요?”
“응.”
나를 위해 미슐랭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 즉 애인 사이에서나 하는 행동 아닌가? 도혁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고급 레스토랑 예약이라니요. 선배님, 혹시 저를……?”
도혁이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원은 바로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정색했다.
“사랑하는 거 아니니까 꿈 깨.”
“…네.”
“하여튼 들어가자.”
주원이 앞장서 잔디 깔린 정원을 가로질렀다.
도혁은 뒤를 따라 걸으며 일부러 훌쩍훌쩍 소리를 냈다.
어, 설마 이 녀석이 우나?
깜짝 놀란 주원이 돌아봤지만, 도혁은 가짜로 우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너 뭐 하냐.”
“선배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슬퍼서 울었어요.”
도혁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못 말리겠네. 주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퍼뜩 오늘이 도혁의 생일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주원은 발길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서기 전, 그가 연석에서 몸을 멈춰 세우자 뒤따라오던 도혁이 주원의 등에 부딪혔다.
“선배?”
주원이 몸을 돌려 도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미안하다.”
“네?”
“내가 가끔… 좀 무심하게 말할 때가 있어. 그래도 나쁜 뜻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선배…….”
“이해 좀 해 줘. 나도 노력할 테니까.”
뜻밖의 이야기였다. 도혁의 가슴속에 감동이 넘실거렸다. 선배도 날 진지하게 생각해 주고 있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배!”
도혁이 주원을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세계 랭킹 1위답게 주원의 순발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주원은 잽싸게 몸을 빼 레스토랑의 출입문을 열었다. 갈 곳 없는 두 팔이 허공에서 맴돌았지만, 도혁의 마음은 충만하게 차올랐다.
그들이 레스토랑 내부로 들어가자 지배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국가 대표 선수님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떤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개인적인 목적으로 온 것이니 최대한 조용한 자리로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2층 창가 자리로 가시죠.”
주원과 지배인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도혁은 미친 듯 두근거렸다. 개인적인 목적……! 조용한 자리……! 이거 완전 데이트잖아.
도혁은 연애 경험이 제로였지만 그간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하며 한 가지를 똑똑히 배웠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식사하는 두 사람은 최소 잘돼 가는 중, 보통 연인, 최대 부부였다.
그러니까 나도 오늘은 선배의 애인이나 다름없어.
도혁은 2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기까지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주원은 생긋생긋 웃는 그의 낯을 보며 그저 호화로운 레스토랑이 맘에 드는 것이겠거니 했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라.”
“진짜요?”
“어. 3인분을 시키든 10인분을 시키든 너 먹고 싶은 만큼 다 먹어.”
“와… 선배, 저 감동이에요.”
“네가 워낙에 잘 먹잖아.”
“그게 아니라 저희… 데이트하는 것 같아서요.”
도혁이 테이블 위에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주원을 그윽이 쳐다봤다. 주원은 물을 마시려다가 뿜을 뻔했다. 도혁에게 뭐라고 한마디 응수하려던 그는 다시 한번 오늘이 도혁의 생일임을 자각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참아, 참자. 오늘만큼은 잘해 주자.
“그래, 그래. 데이트라고 치자.”
주원은 체념하듯 말했다.
“헐.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감동이에요.”
“하하, 그만 감동하고 잔이나 이리 줘.”
도혁은 생일의 특권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주원이 직접 데이트라고 말해 줬고, 객관적으로도 살뜰하게 자신을 챙겨 주고 있었다. 주원이 도혁의 잔을 가져다가 물을 따라 주고, 식전 빵을 죄다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먹기 좋으라고 손으로 찢어 주기까지 했으니까.
“올리브오일이랑 발사믹이 모자라네. 너 빵에 뭐 찍어 먹는 거 좋아하잖아. 잠깐 기다려.”
주원이 서버를 불러 도혁 취향을 줄줄 읊었다. 그러고는 체할까 걱정되니 천천히 먹으라고 1분에 한 번씩 말했다.
도혁은 정신없이 먹는 와중에도 주원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올 때가 됐는데.”
식사를 하던 와중에 주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가요?”
도혁이 접시에서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 저기 오네.”
주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뜻밖의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버가 케이크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도혁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선배님,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하셨어요.”
“명색이 생일인데 케이크 하나 없으면 되겠어? 이 정도는 준비해야지.”
주원은 생크림 케이크에 직접 초를 꽂고 옆에서 타오르고 있는 촛불에서 불을 빌렸다. 스무 살을 나타내는 초 두 개에 불이 붙자 아름다운 그림이 연출되었다.
“선배…….”
“이제 소원 빌자. 내가 차마 노래는 못 불러 주겠지만, 정식으로 말해 줄게. 스무 살 생일 축하해.”
도혁은 가슴이 벅차올라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생일을 함께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제 소원은…….”
도혁이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언제부턴가 소원은 늘 하나였다.
선배가 날 사랑하게 해 주세요.
도혁이 촛불을 불고, 주원은 박수를 쳤다. 도혁은 케이크 사진을 찍은 다음 SNS에 아무런 문구 없이 게시했다. 주원은 의리라며 좋아요를 눌러 주었다. 그게 도혁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뒤이은 식사는 화려했다. 10인분을 시키기는 미안하다는 도혁의 말을 무시하고 주원은 도합 6인분을 시켰다. 그러자 웬만한 파티 규모의 음식이 서빙되었다.
도혁은 랍스터구이와 티본스테이크의 맛에 눈물을 흘렸고, 주원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음식에 집중하는 도혁을 보면서 부족한 건 없는지 열심히 테이블을 살폈다.
“너 잘 먹는 거 보니까 나도 입맛이 도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선배 요새 살 빠진 것 같아서요.”
“좀 그렇지?”
운동이 고돼서인지, 아니면 도혁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인지는 몰라도 주원은 요즘 따로 감량이 없었는데도 살이 빠지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샤워 후 거울을 볼 때 턱선이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네. 그래서 안쓰러워요.”
“안쓰럽긴 무슨.”
“저는 선배가 살 빠지는 거 싫어요. 선배를 한 조각이라도 잃을 수 없다고요. 속상해요.”
“…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도혁은 속이 뜨끔했다. 내가 밤마다 드라마 보는 걸 어떻게 알았지?
“명대사 적당히 날려.”
“왜요. 떨려요?”
“떨리긴 무슨. 아무 느낌 없어.”
“그럼, 이렇게 하면요?”
도혁이 예고 없이 손을 뻗어 주원의 손등을 감쌌다. 손바닥 아래로 움찔, 하는 움직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러면 기분이 어떻냐고요.”
“별…….”
별 느낌 없지, 라고 둘러대려던 때였다. 도혁이 주원의 손등뼈를 하나씩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섬세하고 또 뜨거운 손길이었다. 남의 손이, 그것도 자신보다 더 크고 거친 알파의 손이 자신을 어루만지는 감각은 아주 낯설었다. 간지러움과 더불어 어딘가 옥죄어 오는 느낌까지 수반했다.
“…아무 느낌…….”
어느새 도혁의 손끝은 주원의 손등을 타고 내려와, 이제 그의 손끝을 천천히 매만졌다. 아주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고 애틋한 동작에 주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너 왜 이래.”
“드라마에서 보던 거 따라 하는 건데, 혹시 느낌 있어요?”
“이 자식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주원이 도혁의 입을 빵으로 틀어막았다. 무슨 짓을 못 하게 그저 먹여야 했다. 도혁은 어버버하며 항의했으나 빵에 입이 막힌 탓에 그 항의는 유효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잠시 산책을 하기로 했다. 레스토랑 자체가 숲 안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레스토랑에서도 그 점을 이용해 주변 숲을 이용하여 산책로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레스토랑치고 메뉴 하나하나의 양도 생각보다 많았는데, 지배인이 주원의 팬이라며 서비스를 잔뜩 주면서 둘은 의도치 않게 과식을 해 버렸다. 소화도 시킬 겸 숲속 산책로를 잠시 걷는 게 낫다는 게 주원의 의견이었다.
도혁 역시 주원과 시간을 보내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치 주인을 따라 산책을 나가서 신난 강아지같이 들뜬 그는 주원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그들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산책로를 천천히 구경하며 걸었다. 밤이라 그런지 적당히 기온이 선선했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주원은 낮의 열기를 식혀 주는 바람을 맞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 주원의 옆모습을 훔쳐보던 도혁이 말을 꺼냈다. 오늘 분위기도 좋고, 선배가 유난히 잘해 준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손잡고 걸어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