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와, 역시 도혁이가 주원이 형 찍을 줄 알았어.”
“그러니까. 그럼 우리는 빠져 주자.”
민석과 규영이 순순히 물러났다. 주원은 다급하게 그들을 멈춰 세웠지만 두 사람은 장난기 가득하게 키득거리며 주원을 떠나갔다.
“저기, 얘들아!”
“두 분 행복하세요.”
두 사람이 껄껄대며 뭉쳐 섰다. 손써 볼 새도 없이 주원은 도혁과 한 팀이 되었다.
“선배, 저만 믿으세요.”
“너 수구 좀 해?”
“처음 해 보지만 잘할 수 있어요. 선배랑 한 팀이니까요.”
도혁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지금은 장난삼아 노는 게 아니라 진지한 훈련 시간 중이니, 주원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래? 뭐, 한번 해 보지.”
박 코치가 호각을 불었다. 그가 수영장 한가운데 공을 떨어뜨리자, 민석과 주원이 맹렬하게 달려 공을 차지하려 했다. 도혁과 규영은 각각 파트너를 엄호했다.
“으아아!”
“내 거야!”
두 사람은 무섭도록 공에 달려들었다. 간발의 차로 주원이 먼저 공을 쥐었다. 이렇게 되면 선제공격권이 생기고, 상대편 골대까지 가기만 하면 득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주원은 마치 미식축구 선수처럼 골대로 돌진했다. 그러자 규영과 민석은 서로 그를 제압하겠다고 허세를 부리며 주원에게 물을 튀겼다. 물이 엄청나게 튀기며, 첨벙첨벙 물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으악!”
“민석이랑 규영이 좋아.”
박 코치가 박수를 쳤다. 주원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물에도 굴하지 않고 공을 사수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골대였으나 공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민석과 규영이 거세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 와중에 민석이 수면 아래로 잠수를 해 주원을 향했다. 물귀신 작전을 쓰려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큰 그림자가 자신의 앞을 가로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선배, 뛰어요!”
도혁이 실드를 치러 온 것이다. 도혁은 민석을 뒤에서 껴안으며 매달렸다. 윙맨을 잃은 규영 혼자서 주원을 막아서기에는 무리수였다. 주원은 그 틈을 노리히 않고 반격에 나섰다.
“달려요!”
“알았어!”
주원은 물속으로 잠영하며 빠르고 강하게 킥을 찼다. 철벽 수비가 지켜주고 있어 골을 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곧 공이 골대 안으로 시원하게 들어갔다. 박 감독이 큰 소리로 득점을 인정했다.
“1 대 0!”
“나이스!”
주원은 프로 수구 선수라도 된 듯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기뻐했다. 그는 승리의 기쁨을 못 이기고 도혁을 끌어안았다. 물에 젖은 몸끼리 부대끼든 말든 얼싸안고 쿵쿵 뛰는 두 사람은 10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동료처럼 보였다.
아, 잠깐만. 너무 껴안았는데……?
묘한 위화감이 주원을 사로잡았다. 맨몸으로 껴안고 있자니 마치……. 너무 친한 사이 같은데, 나 왜 이러냐. 도혁이한테 휘말려 든 것 같잖아.
생각이 뻗어나가기 전 주원은 슬그머니 도혁의 품을 빠져나오려 했으나, 도혁은 은근슬쩍 힘을 줘 주원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쭈, 이 자식 봐라?
주원은 확 힘을 줘 도혁과의 힘 싸움에서 이기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엉큼한 자식 헛짓거리하지 말라며 등짝을 때려 주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가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흠흠, 수고했다.”
“선배도요.”
이후로 30여 분 정도 시합이 이어졌고, 수구 게임은 도혁과 주원의 협동을 통해 압승으로 끝났다. 하이파이브를 하도 해 대서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선수들의 젖은 몸을 물 밖으로 꺼내 체온과 심박수를 안정시키고 레인 하나 당 한 명씩 나란히 섰다. 그러자 박 코치가 스타트대에 선 4인방에게 지시했다.
“자, 이제 수영을 해 볼게. 너희 다 자유형 할 줄 알지? 레인 왕복으로 다녀갔다 와 봐.”
“네!”
네 사람은 차례로 입수해 자유형 자세를 취했다. 주원은 수영을 오래 배우지는 않았으나, 수영 선수들과 친분이 있어 가끔 그들과 수영장이나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곤 했었다. 국가대표들과 어울리며 배운 덕분에 주원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거기에다가 타고난 스피드도 근력도 있는 편이니 수영이라면 꽤 자신이 있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도혁이었다.
저 녀석 아까부터 들떠 있더니, 잘하고 있나?
주원은 자꾸만 옆 레인의 도혁이 신경 쓰여 숨을 쉬러 고개를 내밀 때마다 힐긋 그를 봤다.
그는 힘으로 스피드를 내는 건지, 도혁은 물살을 힘있게 치고 나갔다. 킥을 차는 파워와 속도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라, 생각보다 잘하네. 엄청 빠르잖아?
주원이 예상한 것보다 뛰어난 실력이었다. 별로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 싶어 다시 수영에 전념했다.
팔다리를 쭉쭉 뻗어 반환점에 도착한 주원이 턴을 돌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종아리가 옥죄는 느낌이 들면서 쥐가 났다.
근육이 마구 뒤틀리며 느껴지는 고통에 주원은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주원이 물 밑으로 내려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중심을 잡고 몸을 띄우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입과 코로 물이 들어와 숨이 막혔다.
“읍!”
주원은 한 손으로 발목을 움켜쥐고 나머지 손을 수면에서 허우적거렸다.
“주원아!”
의자에 앉아 있던 박 코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다른 스태프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원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오는 동안, 소란에 놀란 선수들이 하나둘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형, 왜 그래요!”
민석과 규영은 반대편 먼 레인에 있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물보라가 이는 레인에서 주원이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주원의 오른쪽 레인에서 도혁이 재빠르게 건너와 주원을 끌어안듯이 부축했다. 재빠르게 물에서 나온 민석이 팀 닥터를 부른다며 달려 나가고, 규영과 박 코치는 주원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도혁은 다급하게 주원을 부르면서도 그의 몸이 충분히 자신에게 기대 있는지 확인했다.
“선배, 나한테 완전히 기대요. 힘 빼고요.”
“쿠, 쿨럭.”
주원은 입과 코로 들어간 물 때문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도혁에게 기댄 채 정신없이 물을 뱉어낼 뿐이었다.
도혁이 주원의 등을 끌어안고 그대로 물 밖으로 나왔다. 박 코치와 규영이 힘을 보탰다. 강한 힘에 이끌려 나온 주원은 너무나 지쳐 반쯤 널브러졌다.
도혁은 주원의 종아리를 붙잡고 바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도혁이 솜씨 좋게 마사지를 해 준 덕분에 뒤틀렸던 근육이 금방 제자리를 찾아갔다. 뒤늦게 달려온 팀 닥터가 주원을 살피기 시작했다. 민석과 규영은 어떡하냐며 인상을 썼고, 도혁은 개중 가장 신중한 얼굴을 한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원을 주시했다.
“으… 으윽.”
고통에서 벗어난 주원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제 일어나도 될 것 같았다. 도혁은 주원을 일으켜 줄 사람은 당연하게도 자신이라는 듯,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기분이 오묘했다. 갑작스러운 상황들과 당연하단 듯이 가장 먼저 자신을 구해 내고야 마는 도혁이.
네가 뭔데 의지가 되냐, 그런 생각에.
* * *
“오늘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작진들은 철수 전에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며 오늘 사고에 대해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채주원 선수가 물에 빠졌을 때 1차로 놀랐고, 이도혁 선수가 바로 달려가서 구해 내는 모습에 2차로 놀랐어요.”
“저도요. 수상 구조 요원인 줄 알았네요. 표정은 어찌나 심각해 보이던지.”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던데요. 물 밖으로 끌어내서 쥐 풀어 주기까지. 완전 대단해요. 두 분이 정말 애틋한 사이인가 봐요.”
제작진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고, 주원에게 소감을 묻기까지 했다.
“이도혁 군이 구조를 해 주셨는데요, 지금 심경이 어떠세요?”
그는 어설픈 미소를 띠며 얼렁뚱땅 대답했다.
“하하, 오늘 도혁이가 저 살려 줘서 너무 기쁘네요. 너무 고마운 후배입니다.”
“두 분 우정 영원하시길 바랄게요.”
작가는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제작진들은 도혁에게도 소감을 물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선배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정말 걱정했어요.”
선수들은 로커룸에서 씻은 뒤 밥을 먹고 숙소로 복귀하기로 했다. 박 코치와 장 감독은 도혁에게 주원을 잘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제작진과 먼저 식사를 하러 나갔다.
네 선수는 로커룸에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주원은 머리를 말리며 옆에 선 도혁을 힐끔 봤다.
구해 줘서 고맙다고 따로 말해야겠다,
주원은 속으로 생각하며 머리에 물기를 털었다. 그러자 도혁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수건으로 주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선배, 머릿결 상해요. 살살 닦아 줘야죠.”
위잉. 드라이기도 켜서 머리를 말려 주기도 했다. 주원은 다정한 연인처럼 구는 도혁이 불편했으나, 오늘은 모든 것을 참아 줘야 하는 날이었다. 심지어 생명의 은인이기까지 하니까.
“선배, 잘 말려 줄게요. 기대해요.”
도혁은 찬 바람 더운 바람을 섞어 가며 주원의 머리를 보송하게 말려 주었다. 그것도 모자란지 자기가 들고 다니는 로션을 얼굴에 발라 주고, 손등에도 크림을 발라 줬다.
“다 됐다. 우리 선배, 멋있고 예뻐요.”
“그래… 그 말 할 줄 알았어.”
주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짐을 챙겼다. 하여튼 팔불출이다.
“오늘 구내식당 말고 외식하러 나갈까요?”
“좋죠! 역시 규영이 형님. 미식가 본능이 발동하셨군요.”
“그건 아니고. 우리 주원이 형 많이 놀랐을 텐데, 기력 보충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규영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진천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유명 맛집들의 이름과 메뉴를 댔다.
“피자는 어떠세요? 새로 생긴 화덕 피자집 있는데.”
“좋지. 음…….”
혹시 얘가 내 마니또인가……?
언뜻 보기에 메뉴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원이었지만, 실은 그는 속으로 약간 놀란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