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규영은 원래 혼자서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 좋아했고, 민석과 B로그를 찍었으면 찍었지 주원에게 외식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원의 밥을 챙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가만 보니까 민석이가 아니라 규영이가 내 마니또일 수도 있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침에 인사도 퍽 유쾌하고 살가웠으며, 아까 쥐가 났을 때도 가까이 다가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챙겨 주려 했었다. 주원은 마니또 후보를 규영으로 고쳐 생각하며 새롭게 추리를 시작했다.
“사는 건 내가 살게. 간만에 우리끼리 회식이라고 생각하자.”
“와, 감사합니다, 형. 그러면 운전 제가 할게요. 형은 뒷좌석에 타세요.”
규영은 자기가 운전하겠다며 주차장에서도 주원을 극진히 모셨다. 이 역시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흐음.”
“선배, 무슨 생각 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는 괜찮으신 거죠?”
옆자리에 앉은 도혁이 주원을 살폈다.
“덕분에 멀쩡해. 네가 쥐까지 풀어 줬는데 멀쩡해야지 않겠냐.”
“다행이에요.”
도혁이 남들 눈을 피해 주원의 손을 잡으려 들었다. 주원은 잽싸게 피했지만 도혁 역시 끈질겼다. 규영이 백미러로 힐끗 그 모습을 보고는 뭐 하냐고 물었다. 주원이 별거 아니라고 대답하는 틈을 타서 도혁은 주원의 손을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규영은 이내 운전대로 관심을 돌렸지만, 주원은 입 모양으로 도혁에게 ‘뭐 하는 짓이냐’며 따졌다. 도혁은 그저 웃기만 했다. 지금까지 주원 선배 손 잡아채기 2승 1패를 기록했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뒷좌석에서 소리 없는 신경전이 일어나는 동안 차는 쌩쌩 달려 진천을 벗어났다.
선수촌에서 차로 20여 분 달려 도착한 곳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캐주얼한 외관에 카페를 겸하고 있는 데다가 인테리어가 세련돼 데이트하러 나온 연인들로 가게는 인산인해였다.
“사람 너무 많은데.”
“제가 그럴 줄 알고 예약을 해 놨다는 말씀 아니겠어요.”
“오, 대단한데, 안규영.”
“우리 주원 형님 모시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규영이 너스레를 떨며 선수들을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예전에 외박 끝나고 지나가다가 들렀는데 맛있더라고요. 주원이 형이랑 같이 와 보고 싶었어요. 형이 피자 좋아하시잖아요.”
규영이 굳이 자신을 지목하자, 주원의 의심도가 높아졌다.
여기 네 명이 같이 있는데 자꾸 날 지목하네? 게다가 피자는 우리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야. 아무리 봐도 규영이 마니또가 나 아닐까 싶은데.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 아닐 수 없었다.
민석이도 수상하지만 이쪽 가능성이 더 높네.
주원은 탐정에 빙의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널찍한 데다가, 창가에 앉으니 초록 잎 무성한 숲길이 보여 경관이 좋았다.
“좋네.”
“여기는 음료도 맛있고 피자도 괜찮아요. 주원이 형 먹고 싶은 걸로 시켜요.”
“난 찬성. 주원이 형 은근 미식가잖아.”
“저도 좋습니다.”
민석과 도혁이 주원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겼다.
“그래. 그럼 내가 고를게.”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은 상당히 두꺼웠다. 메뉴가 못해도 수십여 가지 됐는데, 주원은 해산물을 좋아했으므로 그다지 큰 망설임 없이 새우와 해산물이 토핑된 피자를 한 판 골랐다.
“고르곤졸라랑 프로슈토 햄 올라간 거, 또 루꼴라 피자도 시키자. 명색이 네 명인데 1인 1판은 해야지.”
“너무 좋습니다, 형님.”
“어… 그런데요, 잠시만요.”
주원이 주문을 넣으려는데 도혁이 메뉴판을 가져갔다. 그리고 햄 피자와 루꼴라가 토핑된다는 피자의 설명문을 꼼꼼하게 읽었다.
“왜 그래? 맘에 안 들어?”
“아뇨. 전 지금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는데… 선배 버섯 안 좋아하신다고 들은 것 같아서요.”
“아, 안 들어가지 않나? 아까 얼핏 봤어.”
주원은 버섯 알레르기가 있었다. 버섯을 잘못 먹으면 팔다리에 열꽃이 피고, 심하면 호흡이 곤란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 가려 먹는 요령이 붙어,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런 사고를 거의 겪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아?”
“예전에 인터뷰 봤어요. 어렸을 때 송이버섯 잘못 먹고 응급실 간 적 있으시다고요.”
“송이 이야기 했으면 나 어릴 때 한 인터뷰 같은데?”
“저 주기적으로 선배 인터뷰 재탕해요.”
“너 정말 광팬이구나.”
민석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규영도 마찬가지였다.
“살펴 줘서 고맙다.”
주원은 피식 웃으며 마침 서빙되어 나오는 음료수를 도혁 앞에 놓아주었다.
“고맙긴요. 당연히 챙겨야 할 일인데요.”
“당연히 챙겨야 할 일이라니? 둘이 사귀어요?”
규영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원은 오렌지에이드를 뿜을 뻔했다.
“무, 무슨 소리야……! 사귀다니.”
“아니, 사귀지도 않는데 요새 둘이서 너무 붙어 있잖아요. 형 가는 곳에 도혁이가 있고, 도혁이가 있으면 형도 있고. 둘이 수상해.”
“그러게. 나도 듣다 보니 이상하네.”
민석이 마시던 음료수를 내려놓고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주원은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사귀긴 누가 사귀어……! 하지만 사귄다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주원은 대충 사태를 얼버무리고자 서버를 불러 빠르게 주문을 넣었다. 그리고 얼음과 함께 블렌딩한 음료수를 한 잔씩 더 시켜 세 후배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러니 좀 대화가 그쳤다.
그러면서 그는 음료가 시원하다, 달다, 여기 있는 음료를 다 시켜서 맛보자며 말을 자꾸만 돌렸다. 어찌어찌 말을 돌린 주원이 다시금 스스로를 다독였다.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사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 없어. 도혁이한테 애정 행각 작작 하라고 해야겠다.
주원은 생각에 잠겨 레모네이드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는 동안 빠르게 피자가 나왔다.
“와, 잘 먹겠습니다!”
민석이 피자 조각을 모두의 앞 접시에 덜어 주었다. 주원은 별생각 없이 눈앞에 놓인 피자를 집어 먹으려 했다. 그때, 도혁이 주원의 손목을 잡았다.
“아!”
예고도 없이 강하게 쥐어 오는 힘에 주원은 피자를 놓치고 말았다.
“너 갑자기 왜 이래.”
“선배, 먹지 마요.”
“뭐?”
“버섯 들었어요.”
“버섯?”
깜짝 놀란 주원이 접시를 살펴보았다. 루꼴라 아래 얇게 저민 양송이가 몇 조각 보였다.
“진짜네.”
“버섯 있어. 큰일 날 뻔했네요, 형.”
민석과 규영도 덩달아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원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했다. 만약 양송이를 멋모르고 먹었다면 이틀은 앓아누웠을 것이다.
“메뉴판에 쓰여 있지 않은 재료가 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진짜네요.”
“그러게… 고맙다.”
“당연히 챙겨야 할 몫이라고 했잖아요. 근데 조심해요. 내가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도혁이 걱정에 약간의 화를 섞어 물었다. 꼭 철없는 애인을 혼내는 듯한 말투에 민석과 규영은 당황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이게 무슨 상황이지.’, ‘글쎄요. 전 잘 모르는데 형도 몰라요?’라고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는 동안 주원은 도혁의 잔소리를 차분히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도혁이가 내 마니또인 것 같아.
아까도 날 살려 주고 이번에도 날 살려 줬잖아. 평소에도 나한테 잘하는 녀석이지만, 오늘은 목숨이 오가는 일을 책임져 주고 있으니 심상치 않다.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약속한 거예요.”
기어코 새끼손가락 도장까지 받아 내는 도혁을 보며, 규영은 시력 나쁜 눈을 비비고 민석은 몰래 두 사람의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이 인간들 뭔가 있다. 서로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규영과 민석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루꼴라 피자에는 손도 못 댔지만, 대신 고르곤졸라 피자는 주원의 독차지가 되었다. 도혁은 주원의 입에 들어가는 피자 조각 하나하나를 검사한 다음 그에게 건네는 파수꾼을 자처했다.
하다못해 주원이 피클 한 조각을 먹으려 해도 굳이 피클 그릇을 살핀 다음 건넸고, 핫소스마저 성분을 살피고 주는 식이었다. 주원은 그런 도혁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너도 좀 먹어.”
“이미 한 판 끝내고 추가 주문했어요.”
“잘했어.”
식사를 마치고 민석, 규영은 바람을 쐬러 가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잠시 뒤 루프탑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도혁과 주원도 식당에서 나왔다.
“배부르네. 좀 걸을까?”
“네. 좋아요.”
1층과 2층은 레스토랑, 3층은 카페, 그리고 4층은 루프탑으로 쓰이고 있는 가게인 만큼 부지가 넓었다. 일전에 도혁의 생일날 갔던 레스토랑만큼 조경이 훌륭해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고, 포토 스폿으로 쓰일 법한 설치 미술 아이템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키치하고 유니크한 조각상들 뒤편으로 산책로가 쭉 뻗어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저기로 가요, 선배.”
도혁이 슬쩍 주원의 옷자락을 잡고 숲으로 길을 이끌었다.
“그래. 가자.”
주원은 도혁과 나란히 숲으로 발길을 향하고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머리 위로 그늘이 생겨 시원한 감이 들었다. 산책로 또한 한적해 아침부터 정신없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것도 같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도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생겨났다.
“고맙다. 오늘 나 두 번이나 살려 줘서.”
“선배가 별일 없어 다행이죠.”
“그래서 말인데.”
주원이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마침 길이 으슥하고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한 한중간이라 용기가 났다.
‘마니또분한테 선물을 주셔야 하거든요.’
제작진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니또 모르게 선물을 줘야 한다는 그 말이.
게다가 상대는 오늘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줬다. 안 그래도 고마워서 따로 인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얼굴 좀 가까이 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