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네?”
“눈 감고 고개 숙여.”
“예?!”
도혁이 펄쩍 뛰었다.
“설마 저희 키스해요?”
“가볍게 할 거야. 빨리 눈 감아.”
주원이 도혁의 양 뺨을 감쌌다. 곧 도혁이 꿈이라도 꾸듯 살포시 눈을 감았다. 주원은 도혁의 얼굴에 조금씩 자기 얼굴을 가깝게 가져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10cm, 5cm, 3cm. 거의 닿기 직전까지 왔다. 주원은 도혁의 키에 맞춰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렸다.
순간 이 녀석이 나보다 크다는 사실에 약간 짜증이 났지만, 할 일은 제대로 해야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그때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원이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방향을 살폈다.
“헉.”
하마터면 크게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 저 멀리 규영과 민석이 유유히 산책을 하고 있었다. 둘이서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직은 주원과 도혁을 발견 못 한 상태였으나, 조금만 더 걸어오면 그들의 사정권에 들어오고도 남을 판이었다.
주원은 반응속도가 빠른 선수였다. 그는 판단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도혁의 몸을 꽉 끌어안고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뒤로 휙 날았다. 아무리 도혁보다 약간 작다고는 하지만 주원 역시 국가 대표 펜싱 주장답게 훌륭한 피지컬의 소유자였다. 물론 도혁을 끌어안을 때 약간, 아주 약간 버거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서, 선배?”
당황한 도혁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주원은 손바닥으로 도혁의 입을 틀어막고 ‘쉿’ 소리를 냈다.
“저쪽에 애들 있어. 잠깐만 이러고 있자.”
주원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도혁은 곁눈질을 한 번 하더니 사태를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서 있었다. 바스락바스락, 민석과 규영이 천천히 걸어가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는 동안 한껏 긴장한 주원은 도혁과 거의 끌어안다시피 몸을 밀착했다.
도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규영과 민석을 피해 숨어있는 스릴 있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주원의 민트향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도혁은 눈을 감고 그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도혁이 사랑해 마지않는 향이었다. 상대방의 향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주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원 역시 도혁과 워낙에 가깝게 붙어 있는 탓에 그의 우디향을 확실하게 맡을 수 있었다. 처음 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알파의 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규영과 민석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끌어안고 있는 동안 주원은 점점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이 밀착해 있는 탓에 두 개의 심장 소리가 섞여서 울렸다. 지금 뛰는 게 자신의 심장인지 상대의 심장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형들 갔어요. 이제 괜찮아요.”
도혁이 주원의 등을 쓸어내렸다. 낮은 목소리가 제법 어른스럽게 주원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가슴이 두근 하고 울렸다.
뭔데 지금 이 상황, 이 느낌?
주원은 자신 안에서 불쑥 고개를 쳐드는 위화감을 느꼈다. 한없이 천진무구한 강아지 같던 녀석이, 다르게 보인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이 느껴진다. 심장이 어지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주원은 이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도혁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진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언제부터였을까. 광안리에서 키스한 다음부터? 아니면 내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기습뽀뽀를 하던 날?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바로 지금부터.
쿵쿵,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도혁이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켜 오며 주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심장 뛰네요, 선배. 놀랐나 보다.”
그 말에 주원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 어… 좀 놀랐어.”
말로는 놀라서라고 하지만 이 심장은 도혁과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에 뛰는 것이다. 그리고 주원은 그 사실을 도혁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패색이 짙어질 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다. 어떻게든 게임을 승리로 끝마친다.
그건 알파의 본능이자 주원이 스물세 해를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도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인정할 수 없었다. 알파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순순히 네놈한테 넘어갈 것 같으냐? 절대 아니다.
주원은 도혁의 품 안에서 혼자 이를 갈았다. 그를 뿌리칠 생각도 않고, 심지어 꼭 안겨서 말이다.
* * *
“오늘 밤이 마지막 촬영이에요. 오늘 저녁에 올림픽 개막 D-60일 기념으로 선수님들끼리 의지를 다지는 친목 행사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모습 좀 찍어도 될까요?”
“네, 좋습니다. 친목 행사라고 해 봤자 별것 없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펜싱 국대 전통이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행사를 하나요?”
“각자 나이프 들고 숙소동 상에 모여서 폴라로이드 찍고요. 뒷면에 롤링 페이퍼처럼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 적습니다.”
“와! 너무 재미있겠어요.”
“잘 찍어 주세요.”
주원이 부탁하자 작가는 여부가 있겠냐며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4인방의 부탁으로 카메라는 먼 곳에 설치되었다.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공개하는 건 좋은 일이었으나, 롤링 페이퍼의 내용이나 편지를 나누면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은 국민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선수들은 이때 많이 감정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끼리니까 편하게 말하자. 규영이, 민석이, 막내. 다들 첫 올림픽이잖아. 기대도 되겠지만 부담도 크리라 생각해. 하지만 지금까지 나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
주원의 말에 세 후배는 울상을 지으며 선배가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올렸다. 도혁은 급기야 눈물을 보이려 했다.
“주원 선배가 아니었더라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애당초 국대에 자원한 이유가 주원과 함께 있기 위해서였으니. 늦봄, 급하게 치러진 보궐 선발전에서 도혁은 얼마나 열심이었던가. 그때는 국대가 아니면 정말로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다. 주원이 자신의 온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사적으로는 오묘하고 애매한 지위를 점해 나가고 있다.
도혁은 결심했다. 이 기세를 몰아붙여 선배의 애인이 되고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막내도 사진 찍자.”
국대 전속 사진사 민석이 도혁을 벽에 세워 놓고 포즈를 잡게 했다. 중세 기사 같은 포즈를 취하게 한 다음 셔터를 누르고 폴라로이드를 인화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멋지게 나온 사진에 멤버들이 감탄했다.
“도혁이 무슨 왕자님 같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기사 같은데?”
주원도 슬쩍 사진을 봤다. 기백과 당당함으로 무장한 도혁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파워풀한 검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 자식 제법이네. 주원은 속으로 흐음, 입맛을 다시며 사진의 뒷면을 펼쳤다.
“나부터 쓸게.”
“네.”
뭐라고 쓰지.
주원은 마땅한 문구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난 올림픽 때는 대선배들 틈바구니에 끼어 막내로서 출전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저 선배님, 힘내십시오. 형님, 저를 잘 이끌어 주세요. 이런 식의 아첨 멘트를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혁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선배였고, 또 동시에 짝사랑 상대이기도 했다. 복잡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담백한 편지를 쓰려니 무척이나 막막했다.
“음…….”
굳이 말하자면 사적인 관계를 배제하고 같은 종목 선배로서 용기를 돋워 주는 말을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대하기에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과하게 초롱초롱했다.
“너 자꾸 그렇게 나 쳐다볼 거야?”
“네.”
“내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놈도 아니고…….”
주원은 혀를 한 번 찬 다음, 정갈하고 깔끔한 글씨로 빈칸을 채워 나갔다.
도혁아, 너랑 함께한 올여름을 잊지 못할 거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도 진실이 된다. 이 어정쩡한 관계가 파국을 향하든, 해피엔딩을 맞이하든 간에 이 녀석과 함께한 열기 넘치는 여름을 어떻게 잊겠는가. 생각만 해도 열정과 애정이 넘쳐나는데.
또한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같이 진천에서 땀을 흘리고 먼 곳까지 날아가 함께 싸운 선수를, 주원은 성격상 쉽게 잊을 수 없다. 올림픽에 앞서 있었던 과정들. 열전에 참가하는 약 2주. 그리고 올림픽 폐회식, 오륜기가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모든 장면은 머릿속에 생생하게 박제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장면을 들추든 그곳에는 네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저 읽어 볼래요.”
도혁이 빼꼼 고개를 들어 주원 옆으로 왔다. 문구를 읽은 그는 호들갑을 떨며 자기 허벅지를 쳤다.
“선배, 글도 잘 쓰면 어떡해요.”
“내가 원래 좀 해.”
“미쳤어, 미쳤어. 진짜죠, 선배 절대 올여름 안 잊을 거죠.”
“당연하지.”
“약속해요.”
도혁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주원은 기꺼이 엄지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채 선수도 고생 많으셨어요. 여러분도 촬영 협조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작가와 연출진들이 펜싱 경기장을 떠나며 연신 4인방에게 인사를 전했다. 주원은 차에 오르는 그들을 배웅하다가 아차, 했다.
“저기 그런데요, 피디님. 저희 마니또 게임 결과는 안 알려 주시나요?”
오늘 하루 종일 궁금증을 유발했던 건 역시 마니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주원의 질문에 여자 피디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방송으로 확인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알려 드리면 재미없으니까요. 주말에 꼭 본방 사수해 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