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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53화 (36/115)

53화.

“아… 진짜 그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네.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테니 기대해 주시고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방송 기다릴게요.”

주원은 진심으로 방송을 기다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혁이 자신의 마니또일 듯했다. 목숨도 구해 줬고, 알레르기도 챙겼다. 하지만 그건 그 자식이 늘 하던 패턴인데… 내 애인처럼 구는 거.

주원 혼자 열심히 추리를 하는 동안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 주말이 되었다. 민석과 규영은 각각 외박을 나갔고, 주원과 도혁은 선수촌에 남았다.

도혁은 부산 가기가 멀고 귀찮아 남았고, 주원은 서울 집에 가려면 한 시간 정도 운전하면 갈 수 있었으나 얼렁뚱땅 선수촌에 남았다.

주원은 이왕 선수촌에 남기로 한 김에 그동안 기초 훈련이나 든든히 해 둬야겠다 싶었다. 오전에는 도혁과 같이 운동장을 돌며 운동을 했다. 아침부터 땀을 흘리고 나니 두 사람 다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밥 먹으러 갈까요, 선배?”

“응. 급식 말고 다른 거 먹으러 나가자.”

“좋아요. 오늘은 제가 모시죠.”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진연후 형님한테 들은 곳이 있어요. 여기서 좀 가긴 해야 하는데, 화로구이 나오는 한정식집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도혁이 말하는 곳은 진천시를 벗어나는 곳에 위치한 유명 한정식집이었다.

“아, 나도 연후 형하고 거기 이야기했어. 화로구이 맛있고 반찬도 잘 나온다고 하더라.”

“그럼 여기로 갑시다.”

씻고 나온 두 사람은 상쾌한 마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 운전은 제가 할게요.”

“왜?”

“선배님 피곤하니까 쉬시라고요.”

도혁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걸친 다음,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았다.

식당까지 가는 길은 제법 시간이 걸렸으나 도로변의 풍경이 시원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또한 도혁이 쉴 새 없이 말을 걸었기 때문에, 주원은 자주 웃으며 한 시간을 금방 넘길 수 있었다.

“식당 좋네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좋다.”

대감집을 연상케 하는 한옥 구조의 식당이었다. 입구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직원이 두 사람을 맞이해 안채로 안내했다. 꼭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들어, 주원은 예스럽고 고풍스러운 소품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갈비 정식으로 주세요. 고기는 추가해서 10인분으로 맞춰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물러가고 방 안에는 둘만 남았다. 한쪽 문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는데, 그 너머로 작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푸르른 소나무와 이름 모를 여름 꽃나무, 인공 폭포가 어우러진 풍경이 조화로웠다.

“와, 너무 좋네요. 피서 온 것 같아요.”

“그러게. 그나저나 피서 하니 생각난 건데, 너 올여름에 놀러 한 번 못 가서 어떡하냐. 남들은 워터파크다 계곡이다 한참 놀러 갈 땐데.”

“아, 안 그래도 종강했다고 애들이 워터파크 놀러 가는 SNS 많이 올리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전 하나도 안 부러워요. 선배랑 이렇게 진천에 있는 게 진정한 피서죠.”

“왜, 나랑 있으면 시원하기라도 해?”

“네. 서늘해서 기분 좋아요.”

도혁이 테이블 위에 얹힌 주원의 손을 잡았다.

“야, 왜 갑자기 손을 잡고 그래.”

주원은 타고나길 체온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도 땀을 과하게 흘리지 않았고, 늘 깔끔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늘한 살갗에 도혁의 뜨거운 손이 닿자 놀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뜨거워, 너.”

“제가 체온 높다는 소리 많이 듣긴 해요. 많이 더웠어요?”

“더… 덥다기보다는.”

열기가 전염되는 것 같아. 도혁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체온만이 아닌 심박 수도 같이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주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어색해지려는 찰나, 다행히도 식사 서빙이 나왔다. 주원은 손을 잽싸게 뺐다. 도혁은 아쉬운 기색이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음식은 보기만 해도 푸짐했다. 먼저 흑임자죽을 한 그릇 먹으니 곧이어 서버가 테이블에 다른 반찬들을 차례로 내려놔 주었다. 삼색 연근조림, 잡채, 구절판 등 색깔이 화려한 채소 반찬들이 깔리고 생선찜, 수란, 견과류 조림 등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반찬 중에, 버섯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주원은 의아했다. 보통 한정식집에 가면 버섯 밥과 표고 튀김은 물론이고, 청포묵 무침에도 버섯을 저며 넣는 등 버섯의 향연이 펼쳐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나리탕과 불고기, 떡갈비 등 어느 요리에서도 버섯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집은 음식에 버섯을 안 넣네?”

주원이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내자 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예약하면서 다 빼 달라고 했어요.”

“뭐?”

“아까 출발하기 전에 선배 몰래 예약했거든요. 발견해 줘서 고마워요.”

“너… 뭐 하러 이런,”

“선배가 못 먹잖아요. 앞으로도 나랑 다니면 이런 일 많을 거예요. 난 선배가 아픈 꼴 못 봐요.”

철부지 찡찡이가 이런 연애 고수 같은 짓을 하다니. 주원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처음 봤을 때에 비하여 지금, 도혁의 연애 스킬은 무섭도록 성장해 있었다.

“너… 진짜 연구 많이 했구나.”

“진화 중입니다.”

“후우… 어쩔 수 없다. 칭찬해 줄게.”

“그럼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도혁이 쓱 머리를 내밀었다. 주원은 격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대신에 선배, 고기 구워서 딱 한 점만 제 입에 넣어 주세요.”

“알았다.”

주원이 작은 화로에 고기 조각들을 올렸다. 치익, 맛있는 소리를 내며 소갈빗살이 적당하게 익어 갔다. 그는 참기름만 찍은 소갈비를 도혁의 입으로 대령했다. 도혁은 맛깔스럽게 고기를 해치우고 씩 웃었다.

뭐지……? 지금 이 상황, 데이트 같은데.

“너무 맛있어요. 선배 최고.”

아니야. 아니다. 나는 그냥 휴일에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도혁이랑 나온 것뿐이야.

그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며 고기를 굽고, 도혁의 입 앞에 대령하기를 반복했다.

식사를 느긋하게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자 마침 국대 관찰 예능 K4 방송이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주원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옆에 도혁이 딱 붙어 앉았다. 주원은 도혁과 거리를 두기 위해 옆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도혁은 지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내가 그냥 포기하고 만다. 주원이 가만히 있자, 도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주원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머리 위로 올린 것이다.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한 주원이 도혁을 쳐다보자, 도혁은 주원의 손을 잡고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못 당하겠네.”

주원의 웃음에 도혁 또한 활짝 웃었다. 그는 용기를 얻었는지 아예 대담하게 나왔다. 주원의 허벅지를 확 베고 누운 것이다.

“야! 뭐 해.”

주원이 저항했으나 이미 자리를 잡고 누운 도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너무 편하다.”

그는 숫제 눈을 감고 ‘나 행복해요’를 온몸으로 나타내는 도혁을 매정하게 치워 버릴 정도로 냉혈 인간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자세가 굳었다. 주원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도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간간이 도혁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이렇게 기분 좋아하는데 한 번쯤 져 주지 뭐.

광고가 끝나고 방송이 시작되었다. 도혁이 말을 꺼냈다.

“선배, 제가 오늘 저녁만 기다리면서 한 주 보낸 거 아세요?”

“왜?”

“제 마니또가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서요. 도저히 짐작이 안 가더라고요.”

“헷갈렸다고?”

“네. 말도 마세요.”

도혁이 정말 힘들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전 제가 마니또를 잘 맞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민석이 형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그날 아침에 민석이 형이 갑자기 저 붙잡고 마사지해 주길래요.”

“너한테 마사지를 해 줬어?”

“네. 제가 지나가는데 갑자기 제 허리가 휘었다면서 물리치료실로 끌고 가더라고요. 여기 주물렀다 저기 주물렀다 난리던데요.”

“그런데 중간에 의심되는 사람이 바뀌었어?”

대체 누굴 의심했던 걸까. 주원은 그의 추리가 궁금했다.

“네. 제가 수영할 때 사실 규영이 형 발 밟았거든요. 근데 쿨하게 넘어가 주셨어요. 그 형 아픈 거 못 참잖아요. 그래서 규영이 형이다, 확신을 했죠.”

주원의 입장에서는 도혁이 엉뚱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있었다니 귀여웠다. 하지만 자신이 마니또로서 모자랐나 싶기도 했다.

“나는 의심 안 했어?”

“선배요? 선배는…….”

도혁이 말을 흐렸다. 그가 뺨을 긁적이며 입술만 달싹이자, 주원이 대답을 재촉했다.

“왜 말을 안 해.”

“그게… 많이 바랐죠.”

“뭐라고?”

“저는 선배가 저에게 잘해 주면 누구보다도 행복할 놈이니까요. 마니또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도혁은 쑥스러운지 큼직한 손바닥으로 뺨을 쓸었다. 뜻하지 않은 고백을 받은 셈이 된 주원은 머쓱함에 목 뒤를 긁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지 마.”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혹시 제 마니또셨어요?”

“묻지 말고 방송 봐.”

“선배 마니또는 또 누구였어요?”

“그것도 묻지 말고 방송으로 확인해.”

주원은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꼈다. 도혁은 낮게 소리 내 웃었다.

“시작한다.”

“와, 저게 저렇게 편집됐네.”

진천 선수촌에서의 생활이 잘 정리되어 흘러가고, 하이라이트로는 수영장에서의 훈련이었다.

수영장에서 주원이 쥐가 나 곤란해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도혁이 주원을 구조해 물 밖으로 끌어내는 장면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원은 공중파에 박제된 자신의 나약함에 고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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