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 이런…….”
“쑥스러워하지 마세요. 이미 전파를 타 버렸어요.”
“너랑 붙어 있는 장면 또 SNS에 엄청 돌아다니겠다.”
“하하, 선배도 그런 거 찾아봐요?”
아차. 주원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 아니야. 안 봐.”
“보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몰라, 난.”
주원은 시치미를 떼며 슬쩍 핸드폰을 열어 SNS에 접속했다. 이미 실시간 검색어 트렌드는 1위가 ‘도혁X주원 구조’, 2위가 ‘인공호흡이 없어 아쉬웠다’였다.
그럼 그렇지. 이미 게시판은 도혁이 주원을 구조해 준 일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특히 도혁X주원 분자들이 아주 활발하게 게시판을 점령하고 있었다.
댓글
내 직업이 수상구조대라서 한마디 하고 간다. 내가 보기에 지금 채주원 완전 멀쩡하거든? 쥐도 안 난 것 같은데 생쇼 같아. 내 생각에 저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 인정. 내가 보기에도 채주원 정상인데 일부러 둘이 스킨십하는 것 같아.
➥ 누구 아이디어일까? 채주원이 유도한 건가?
➥ 아니지. 둘이 사귀니까 둘이 짜고 친 거지.
➥ 수구할 때 보면 둘이 눈에서 꿀 떨어져. 물 반 꿀 반. 기가 막힌다.
이도혁 아래 채주원 깔린 샷 초고화질로 캡쳐해 왔어.
➥ 아까 수구씬 캡쳐해 준 글쓴이랑 같은 글쓴이지? 너 천국 가라
➥ 다운로드 수 초과됐다고 다운이 안 돼. 누가 새로 좀 올려 주라.
➥ 올라온 지 30초 만에 다운로드 수가 초과됐다고? 화력 미쳤는데?
주원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처단은 어려웠다. 주원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런 주원의 심경도 모르고 도혁은 재밌다고 방송을 보고 있었다.
곧이어 화면은 피자를 먹었던 곳으로 바뀌었다. 영상에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4인방의 표정과 행동의 디테일이 아주 잘 포착돼 있었다.
“어, 이제 마니또 알려 준다!”
자막으로 민석의 마니또가 공개되었다. 그가 하루 동안 잘해 줘야 할 대상은 주원이었다.
“응? 민석이가 나였어?”
주원은 깜짝 놀랐다. 자막과 함께 영상이 리플레이됐다. 주원이 시키지도 않은 마사지를 해 주는 민석의 모습, 수영장에서도 주원에게 물과 수건을 가져다주는 모습이 여러 컷 포착돼 있었다.
“와, 민석이였구나. 나한테 잘해 주기는 했다만…….”
“다음은 제 차례네요.”
화면이 도혁의 시점으로 전환되었다. 그의 아침 일과가 짤막하게 요약돼 흘러가는 동안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규영이었다.
“규영이?”
“네. 제가 잘해 줘야 하는 사람은 규영이 형이었어요.”
편집 장면을 보니, 도혁은 레스토랑에서 규영 앞에 포크도 놔주었고, 콜라가 떨어지지 않게 직원을 불렀다. 또한 피자의 마지막 조각도 규영한테 양보했다.
“이건 또 몰랐네.”
뭐야. 도혁이 마니또가 내가 아니었다고? 그럼 잠시만. 마니또 작대기가…….
주원이 생각을 하는 동안 규영이 민석의 개판 5분 직전 옷장과 침대를 치워 주는 장면이 나왔다.
“규영이 형 마니또는 민석이 형이었네요. 잠깐. 그러면 선배가 잘해 줘야 하는 사람은… 저?”
빠르게 머리를 굴린 도혁이 주원의 마니또를 추론해 냈다.
“선배, 선배가 저를……?!”
“뭐… 일이 그렇게 됐다.”
“저 진짜 몰랐어요.”
도혁은 감동적인 영화를 본 사람처럼 동공이 흔들렸다. 벅차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아?”
“네!”
“내가 딱히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저 날 정신이 하나도 없어 가지고. 오히려 네가 나한테 잘해 줬지.”
“아니에요. 선배 저한테 잘해 줬어요.”
“내가 뭘?”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뽀뽀해 주려고 했잖아요. 아니에요?”
도혁이 정곡을 찔렀다. 주원은 씁 소리를 내며 도혁의 가슴팍을 한 대 때렸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마.”
“왜요. 선배 그때 얼마나 예뻤는데요.”
“예쁘긴 뭐가 예뻐.”
“그런 의미로 그때 못한 거 마저 해요.”
도혁이 벌떡 일어나 주원의 어깨를 감싸 안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주원은 식겁하며 도혁의 가슴을 밀어냈다.
“마니또 데이 지났잖아! 이젠 무효지.”
“그런 게 어딨어요. 다 못 했으니까 완결을 지어야죠.”
도혁은 끈질기게 밀고 들어왔다. 주원은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중이었다. 지잉, 지잉. 소파 위에서 진동이 울렸다. 주원의 핸드폰이었다.
“응? 희우 누나네.”
주원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가 곧 전화를 받자, 도혁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하필이면 희우 선배한테 전화가 오다니. 또 그걸 내 눈앞에서 받다니.
이미 주원과 무럭무럭 사랑을 키워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혁 입장에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예전에 둘이 같이 캠핑을 갔을 때, 주원은 희우에게 별다른 연애 감정은 없다고 했었지만 도혁 입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 누나. 방송 보지 말아요. 나 창피해서 미치겠으니까요.”
주원은 즐거운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도혁은 시무룩해졌다.
멋지고 잘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오메가라는 형질. 도혁은 한동안 구석에 숨겨 두고 모른 척했던 질투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름 친해졌고, 그렇고 그런 일도 있었으며, 최근에 키스도 했다만… 아직 나는 선배의 애인이 아니야. 그에 비해 희우 선배는 너무 막강한 존재다.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이 없었을까?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감정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도혁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음 주에요?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알겠어요. 그때 보고 저랑 도혁이 뽀뽀 사진은 저장하지 마세요. 제발요, 네.”
주원이 곧 전화를 끊었다. 도혁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주원이 선뜻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에 희우 누나 진천 온대.”
“네?”
도혁의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희우 선배가 여기 온다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유소년 재능 기부 행사 때문에. 너도 그 행사가 뭔지는 알지?”
“아, 주니어들이랑 국대랑 클래스 여는 거요?”
도혁도 펜싱 꿈나무 재능 기부 행사라면 들어 봤다. 체고 친구가 참석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국가 대표들과 친선경기도 하고 같이 식사도 했다며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연맹은 매년마다 행사를 개최했는데, 덕분에 주니어들의 의욕이 고취되고 선수들도 포상금을 두고 경쟁하면서 사기를 올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응. 이번에 연맹에서 올림픽 전에 열자고 했거든. 참고로 종목당 두 명씩이야.”
“그럼 설마.”
“플뢰레는 철호랑 민균이 형, 에페는 연후 형이랑 희우 누나. 그리고 사브르는 나랑… 아직 파트너를 못 정했네.”
“당연히 저 아니에요?”
도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아니면 누가 나가는데요.”
“너 나갈래?”
“당연하죠. 선배 가는 데 제가 가지 누가 가요.”
“알았어. 그럼 너랑 나랑 행사 나가자.”
“약속한 거예요.”
“난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그럼 뽀뽀해요.”
“뭐? 여기서 뽀뽀가 왜 나와.”
“약속의 징표죠.”
도혁은 결국 손바닥으로 입술을 한 대 얻어맞았다. 툴툴거리며 물러나는 그의 눈에는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이제 좀 주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했건만, 치명적인 연적의 등장이라니.
안 되겠어. 내가 이번에 확실히 희우 선배와 주원 선배의 관계를 밝혀내고, 둘 사이에 뭐라도 생기려고 하면 끼어들어야겠다.
도혁은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되새기며 행사를 기다렸다. 물론 다시 주원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우와 메시지를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는 주원은 도혁을 밀어내지도 만져 주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자, 도혁은 금방 서운해져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결심했다. 반드시 연적을 물리치겠노라고
그다음 금요일, 진천 선수촌은 아침부터 바빴다. 각 지방에서 진천을 찾아온 주니어 선수들을 환영하느라 강당에 국가 대표팀 전원이 모여 앉았다.
“오늘 일일 주니어 교실에 참가하러 와 주신 유소년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어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연맹장이 박수를 유도했다. 도혁은 단상 위로 올라가 사브르 명찰을 단 초등학생 선수 뒤에 섰다. 그의 왼쪽 옆으로는 중학생을 지도하게 된 주원이 있었다. 하지만 도혁의 시선은 주원에게 가 있지 않았다. 그보다 한 칸 더 옆, 주원과 나란히 선 희우에게 붙박인 듯 고정되었다.
어디 한번 보자, 주원이 형이랑 시선 교환이라도 하나……?
그때 희우가 도혁의 열렬한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인사를 했다. 아차 싶은 도혁은 허겁지겁 인사한 다음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다.
총 여섯 팀을 두 연습실에 나누어 수용하기로 했다. 얄궂게도 채주원, 이도혁, 그리고 서희우 조가 한방을 쓰게 되었다. 도혁은 두 남녀를 감시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긴장이 됐다.
그런 도혁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희우가 도혁의 옆으로 와 말을 걸었다.
“우리 후배님, 오랜만이네요.”
“아… 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전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아. 키도 큰 것 같고.”
“아, 그래요? 실제로 그때보다 2cm 정도 크기는 했는데…….”
체대 입시 준비 때만 해도 190.5cm를 기록하던 키가 최근에는 192cm로 자랐다. 도혁은 희우의 눈썰미에 적지 않게 놀랐다.
“예리하십니다, 선배님.”
“내가 관찰력이 좋거든. 그때는 분명히 주원이랑 차이가 엄청까지는 안 났는데, 지금은 훌쩍 커서요.”
“그런가요?”
“응. 근데 두 사람 방송을 봐서 그런가? 나란히 서 있으니까 그림이 너무 좋아. 아, 보기 좋다.”
희우가 도혁과 주원을 번갈아 가리키며 소리 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