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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55화 (38/115)

55화.

“누나, 놀리지 말라니까요.”

“진짜 너희 안 사귀어?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잘 어울리는데.”

“사귀긴요. 절대 아니에요, 누나까지 저 놀리면 어떡해요. 제발 그만하세요.”

주원이 죽는소리를 해 대며 희우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도혁은 그런 주원의 태도가 씁쓸했다.

나랑 엮이는 게 그렇게 싫은가? 실제로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 맞잖아. 아직 사귀는 건 아니라 해도 그 직전까지는 간 관계 아니야?

도혁은 속으로 섭섭했으나 공식 석상에 와 있는 지금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오늘 지도할 아이들이 펜싱복으로 갈아입고 쪼르르, 피스트 앞으로 모여들었다. 희우가 가운데 서서 아이들에게 활기찬 인사를 건넸다.

“오늘 펜싱 수업에 온 여러분, 반가워요. 저는 에페 선수 서희우라고 합니다.”

“와아! 서희우다!”

“예쁘다!”

주니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에페 어린이는 한 명뿐이니까 저랑 한 팀을 이룰 거고요. 사브르 어린이 중에 1번 번호표 받은 선수 있죠?”

“네! 저예요!”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씩씩하고 장난기가 많아 보이는 게, 도혁의 눈에는 딱 그맘때의 자신 같았다.

“1번 친구는 여기 서 있는 늠름한 선수 보이죠? 이도혁 국가 대표와 한 팀이 될 거예요. 그다음으로 2번 친구는 채주원 선수와 한 팀이고요. 그럼 모두 자기 짝과 인사 나눌까요?”

3:3으로 파트너가 정해졌다.

“자, 재킷은 이렇게 착용하는 거예요. 칼은 이렇게 잡고. 잘 알겠죠?”

“네! 클럽에서 배워서 알아요. 근데 언니 너무 예뻐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희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여자아이와 상냥하게 눈을 맞췄다. 남자아이와 날아 차기를 하며 놀고 있는 자신과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에 도혁은 머쓱해졌다.

“살뤼(인사). 사브르는 무조건 먼저 공격해야 돼. 그렇지, 잘하네.”

도혁은 남자아이를 맞은편에 세워 놓고 선제공격 기회를 줬다. 아이가 빠르게 전진하며 칼을 겨누었고, 도혁은 그 칼을 막고 역습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렇게 막았으면, 바로 역공으로 전환해야 돼. 알지? 제일 멋있는 게 찌르기인 거. 쉼 없이 찌르고, 상대를 피스트 끝까지 몰아붙여야 해.”

“네, 알겠어요!”

“잘한다. 다시!”

“으아아!”

“좋아. 잠깐 쉬자.”

아이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물을 마셨다. 그러면서 도혁을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봤다.

“근데 형 키 엄청 크다……. 뭐 먹고 그렇게 컸어요?”

“밥 세 공기씩 먹으면 돼.”

“전 그렇게 많이 못 먹는데요.”

“노력해야지. 인생은 노력이야. 예를 들어서 나도 어려서는 잘 못했어. 근데 무조건 밥 세 공기씩 먹고 하루에 다섯 시간 운동하니까 조금씩 늘더라고.”

“정말요?”

“물론. 그때 제일 중요한 건 적극적인 자세야. 마르셰(전진)만 제대로 해도 웬만해서는 안 져. 무조건 빠르게 정확하게 앞으로 차고 나가야 돼. 뒤에 공간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달려 나가봐.”

도혁이 아이를 피스트에 세우고 달리는 폼을 봐 주었다.

“지금 다 좋은데 망설임이 살짝 느껴지는 것 같아. 이러면 공격이 늦어지거든. 허벅지에 힘을 주고 파파박 치고 나가는 거야. 펜싱은 무조건 전진, 또 전진이야. 다시 해 보자.”

“네!”

아이를 연습시켜 놓고, 도혁은 주원의 조를 힐긋 봤다. 주원은 점잖은 중학생과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가끔은 옆 피스트의 희우와 몇 마디를 나누기도 했다.

둘이 자꾸 이야기하네. 신경 쓰여.

도혁은 안 보는 척하면서 계속 두 남녀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 숙제를 다 한 아이가 다시 도혁을 불렀다.

“자, 다시 전진하자. 포기란 없다!”

한 시간 가까이 연습을 하자 아이의 체력이 방전됐다. 아이를 잠깐 보호자에게 보내고, 도혁은 피스트 옆에 덜퍼덕 앉았다.

힐끔 보니 주원은 여전히 진지하게 수업 중이었다.

오늘 나한테 말도 잘 안 거네.

도혁이 의기소침해져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눈앞으로 생수병이 불쑥 들어왔다.

“이거 마셔요, 후배님.”

“엇, 선배님.”

희우가 도혁에게 물병을 내밀고 있었다.

“목말라 보여서.”

“고맙습니다. 선배님도 드세요.”

“그럴까요, 그러면?”

“네. 어서 앉으십시오.”

도혁이 깍듯하게 인사하며 희우를 옆자리에 앉혔다.

불과 두 번째 보는 사이인데도 희우는 도혁 앞에서 편안하게 말을 했다. 이것저것 사소한 이야기와 아이들에 대한 화제로 말을 이어 가다 보니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나저나 방송 너무 잘 봤어요. 후배님 멋지더라.”

“재미있게 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찍어 줘서 나야말로 고맙지. K4 중에 나는 우리 도혁이가 제일 멋있었어.”

“그렇게 자꾸 칭찬만 해 주시면… 너무 감사합니다.”

도혁은 하루 종일 의식하고 있던 희우가 자신을 칭찬해 주자 머쓱했다. 뭐라도 되돌려 줄 말을 찾아 헤매는데, 희우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후배님, 주원이를 너무 많이 쳐다보네요?”

“네?!”

“눈길이 떠나질 않아요. 주원이 닳겠다.”

“제, 제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스러움에 도혁은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냥 쳐다봤다고요.”

희우가 깔깔거리며 일어났다. 그녀는 슥 하고 자리를 떠 주원 옆으로 갔다.

“수업 적당히 해.”

“네, 안 그래도 우리만 안 쉬는 것 같아서 이제 그만하려고요. 고생했어. 잠깐 쉬자.”

주원이 학생을 보호자에게 보낸 다음, 그는 희우의 옆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생수병을 열어서 물을 마시는데 희우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도혁이가 너 참 좋아하나 봐.”

“뭐라고요?”

주원은 물을 마시다 말고 당황하며 대답했다.

“자꾸 너만 쳐다봐. 그래서 내가 한마디 해 줬어. 주원이 닳겠다고.”

“무, 무슨 그런 이야기를……. 그냥 쟤가 저를 잘 따라요. 방도 같이 쓰고 하니까 요새 많이 친해졌고요.”

주원은 곤란한 이야기가 어서 지나가길 바라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근데 그거 알아, 주원아?”

“뭘요?”

“너도 똑같아.”

“똑같다니요.”

“너도 계속 도혁이만 쳐다본다고.”

“…제가요?”

“응. 지금뿐만 아니라 아까 아침부터 1분에 한 번은 도혁이 쳐다보던데, 뭐.”

주원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은연중에 도혁을 좇고 있었다니 부끄럽기도 했다. 심지어 남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니, 어쩌면 평상시에 민석이나 규영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 아닌데, 진짜 아닌데.”

주원은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희우는 집요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내친김에 물어보자. 너 물에 빠졌을 때, 진짜 빠진 거 맞아?”

이번에는 정말로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누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른 척하지 말구, 나도 이거저거 찾아봤거든.”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희우가 순간 두려워지는 주원이었다. 하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쓰며 주원은 침착하게 답했다.

“그건 왜요. 별거 없었어요.”

“흠… 그래?”

그렇게 말하며 희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옆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주원은 태연한 척 생수를 마저 마셨다. 한편 먼발치에서 남녀를 지켜보며 도혁은 또다시 오해에 빠져들었다.

뭐야, 저 정다운 모습은?

도혁은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두 남녀를 보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설마 둘이 분위기 잡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도혁이 눈을 부라리자 초등학생 제자가 깜짝 놀랐다.

“형, 눈을 왜 그렇게 뜨세요?”

“어? 내가 왜?”

“누구 잡아먹을 것 같아요.”

“아… 아니다. 미안.”

도혁은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었다. 하지만 희우와 주원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 나의 적극성을 보여 주지. 공격 포인트는 모조리 내 거다!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요. 다들 재미있었지?”

수업이 끝난 후 희우가 아이들을 중앙으로 모아 놓고 직접 사인을 해 주고, 선물을 챙겨 주었다. 아이들은 선물을 받아 들며 환하게 웃었다.

“네.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도혁 형님도 너무 재미있으셨고요.”

도혁이 지도했던 아이가 그를 따라 했다. 눈을 부라리며 칼을 정열적으로 휘두르는 모습이 그럴싸해, 보호자들도 아이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하여튼 여러분, 오늘 추억 잊지 않고 꼭 미래의 국대 되기로 약속해요!”

“네! 저도 꼭 국가 대표가 될 거예요.”

“진천 선수촌 다시 올래요!”

아이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보호자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럼 우리도 회식 장소로 가 볼까?”

“메뉴 꽃등심이라던데요. 누나 소고기 킬러잖아요, 잘됐다.”

“그러게. 안 그래도 너 불러내서 꽃등심 한번 먹으러 가려고 했었어.”

연맹은 격려의 의미로 작은 회식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도혁은 벌써부터 분위기 오붓한 주원과 희우를 보며 경계심을 발동시켰다.

“그럼 주원아, 내가 운전할까? 네 차랑 내 차랑 기종이 같잖아. 내가 몰게.”

“아니에요, 누나. 제가 운전할게요.”

두 남녀가 연습실을 나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도혁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림을 그려 보았다. 주원과 희우가 운전석과 조수석을 차지하고 나란히 앉는다면 자신이 외톨이가 된다. 그러는 와중에 남녀는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었다. 그건 허락할 수 없었다.

“선배님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도혁이 네가?”

“저 주원 선배 차로 부산도 갔다 온 몸이에요. 운전 잘합니다.”

“어머, 진짜?”

“네. 믿고 맡겨 주세요.”

“후배님한테 시켜도 되나? 괜히 미안하네.”

“진짜 괜찮습니다.”

도혁이 나서고 들자, 주원은 별생각 없는 듯 쉽게 운전대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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