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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56화 (39/115)

56화.

씻고 나온 세 사람이 주차장에 모였다. 도혁은 당당히 운전석에 착석, 희우는 조수석에 태우고 주원을 뒷자리로 보내 버렸다. 견우와 직녀를 찢어 놨다는 만족감이 스멀스멀 도혁의 온몸에서 풍겨 났다.

도혁은 일부러 희우에게 자주 말을 걸며 운전했다. 주원과 그녀의 대화를 원천봉쇄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희우 선배님,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나 인천체고.”

“오, 펜싱 명문이네요. 제 동기도 거기 나왔는데. 용희라고 아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걔 중학교는 어디 나왔어?”

“인천체중이요. 보통 인천이나 경기도 사는 친구들은 그 라인을 많이 타더라고요.”

“그렇긴 해. 우리 집도 인천이니까.”

“그럼 여담인데요, 좋아하는 색은 무슨 색이세요?”

“어?”

지극히 쓸모없는 질문이자 낚시성 질문이었다.

“혹시 노란색? 오늘 셔츠가 노란색이시잖아요.”

“음… 노란색 좋아하긴 하는데, 제일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야.”

“그러시구나. 그러면 라일락 좋아하세요?”

뒷자리에 앉은 주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체 뭐라는 거야.

“근데요, 누나.”

주원이 슬그머니 대화에 끼려 하자, 도혁은 다정하게 눈을 마주치는 남녀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노래 틀게요, 선배님들.”

도혁이 라디오를 켜 헤비메탈을 주로 틀어 주는 주파수에 접속했다. 요란한 드럼 소리와 기타 소리가 스피커를 찢어먹을 듯이 튀어나왔다.

“잘 안 들려. 주원아, 뭐라고?”

“저도 잘 안 들려요.”

주원과 희우는 몇 번 대화를 시도하다가 말았다. 도혁은 스스로의 전략에 만족해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 후 차는 <진천가든>이라는 간판을 단 널찍한 고기집 부지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인공 연못이 있고 주차장이 광활한, 대형 고깃집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내려요, 누나.”

주원이 뒷좌석에서 먼저 내린 다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희우는 고맙다며 해사하게 웃으며 주원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한발 늦은 도혁은 허겁지겁 차에서 내려 희우와 주원을 따라갔다. 고깃집 안에서 자리를 선점하려면 부지런히 가야 했다.

도혁은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걸었다. 덕분에 두 남녀를 추월해서 룸 구조로 이뤄진 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연습실을 썼던 멤버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알은체를 하며 도혁 일행을 반겨 주었다.

“왔어? 고기는 우리가 미리 시켜 놨어. 희우 누나도 편하게 앉아서 드세요.”

“응, 맛있게 먹어, 얘들아.”

테이블은 딱 하나 남아 있었는데, 3인 상차림으로 세팅된 상태였다. 한쪽 면에는 수저 두 벌이, 한쪽 면에는 한 명만 앉으라고 수저 한 벌이 놓여 있었다. 도혁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리고 빠르게 판단해 두 명이 앉는 자리 쪽에 앉았다. 자기 옆에 희우가 오든 주원이 오든, 둘을 찢어 놓는 데는 무조건 성공이었으므로.

그런데 애석하게도 희우가 먼저 나섰다.

“도혁이가 혼자 앉아야 편하지 않을까? 주원이랑 내가 두 명 자리에 앉는 게 상대적으로 나을 것 같아.”

“네?”

“도혁이 덩치 생각하면 혼자 앉는 게 괜찮지.”

희우가 배려심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며 도혁을 방석에 앉혀 주었다. 악의 없는 친절에 도혁은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고기는 제가 열심히 굽겠습니다.”

곧 고기가 서빙되어 나왔다. 마블링이 골고루 되어 윤기가 흐르는 꽃등심이었다. 도혁은 큼직하게 조각난 고기를 집어 숯불이 타오르고 있는 불판에 얹었다. 치익, 하면서 맛있는 소리가 났다.

“와. 후배님, 잘 굽는다.”

“고맙습니다.”

도혁은 수줍어하며 고기를 열심히 구웠다. 주원 먹일 생각에 부풀어서였다. 잘 구운 고기를 가위로 잘라 사이드로 빼놓자, 아니나 다를까 주원이 잽싸게 고기를 집었다. 그럼 그렇지. 맛있게 드세요. 도혁은 내심 흐뭇해하며 노릇노릇 익어 가는 고기들을 주원의 앞으로 가져가려 했다.

“누나 먼저 먹어요.”

주원이 희우의 앞 접시에 고기를 올려놨다. 도혁은 너무 충격을 받아 집게를 놓칠 뻔했다.

“나 먼저 먹어도 돼?”

“레이디 퍼스트죠.”

“우리 주원이는 말도 잘하지 어쩜.”

아니, 이 상황 뭔데. 고기는 내가 굽고 분위기는 둘이 좋아?

도혁은 짜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우더러 먹던 고기를 뱉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녀는 이러나저러나 하늘 같은 대선배였다. 그러니 요령껏 주원을 인터셉트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주원 선배도 드세요.”

도혁은 가장 잘 익은 조각을 집어, 바로 주원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주원이 살짝 사람들의 눈치를 본 다음 입을 열었다.

“맛있죠?”

고기를 오물거리며 주원이 끄덕였다. 도혁은 너무나 만족스러워 절로 웃음이 났다.

“뭐야, 도혁 후배님. 주원이만 챙겨 줘? 왜 나는 안 줘?”

“네?”

“나만 차별하지 말라구.”

희우가 애교 있게 말했다. 도혁은 허둥지둥 고기 한 점을 집어 희우의 앞 접시에 올렸다.

“그래, 이렇게 나도 챙겨 줘야지. 주원이만 챙겨 주면 안 돼.”

끙. 두 사람 다 챙겨 주게 생겼네.

이후부터 도혁은 죽어라 고기를 굽고 잘라 반은 희우에게 반은 주원에게 먹였다.

“상추 더 가져올게요.”

“좀 먹고 가져오지.”

“아니에요. 지금 가져올게요.”

도혁이 빈 그릇을 들고 리필 바로 향했다. 도혁이 웬만큼 멀어지자 희우가 툭, 주원을 쳤다.

“왜요.”

“너 딴생각하지?”

“제가 언제요.”

“방금도 그렇잖아. 고기 먹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멍하니 허공 구경하던데?”

희우의 지적에 주원은 당황했다. 자신이 그렇게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젠 좀 말해 줘 봐. 너랑 도혁이, 뭐 있지?”

“있긴 뭐가 있어요.”

“속이려면 귀신을 속여라. 내가 너 봐 온 기간이 1, 2년이니?”

그건 사실이었다. 주원은 희우가 자신의 바보 같은 모습을 지켜봤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나아가 근본적인 부끄러움이 그를 휩쌌다.

왜 나는 남몰래 도혁을 훔쳐보는가?

“어때, 주원아. 누나 손바닥 위를 못 빠져나가겠지?”

“…좀 이따가 저 상담 좀 해 주실 수 있어요?”

마침내 주원의 입에서 부탁의 소리가 나왔다. 희우는 무릎을 치며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상추 가져왔어요. 깻잎도 있길래 가져왔는데 드세요.”

“잘 먹을게.”

희우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싱글거리며 고기로 쌈을 싸 먹었다. 역시 남의 연애만큼 재미있는 건 없구나. 그녀는 감탄하며 탱글한 고기를 꼭꼭 씹었다.

“그럼 난 희우 누나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숙소로 갈게.”

회식이 끝난 후, 희우는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주원은 식당에서 터미널까지 희우를 실어다 주기로 약속하고, 도혁을 에페팀 진연후의 차에 태워 보냈다. 도혁은 남녀가 단둘이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시간은 늦었고 여자 혼자는 위험했으므로 기사도를 발휘해 주원을 양보했다.

“안녕하세요, 연후 형.”

“도혁이 안녕.”

펜싱 국대 최고의 매너남 진연후가 SUV 조수석에 타는 도혁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는 부드러운 인상만큼이나 목소리도 그윽하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젠틀함이 묻어나는 인물이었다.

“의자 젖힐래? 노래 틀어 줘?”

“아뇨. 저 이대로도 편합니다.”

“그럼 이야기나 하면서 갈래?”

“좋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아까 보니까 고기를 산더미처럼 먹더니만.”

“아… 그냥 조금…….”

진연후의 말마따나 도혁은 기운이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주원과 함께 숙소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원 선배는 희우 선배와 같이 가 버렸다. 두 사람은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도저히 내가 낄 자리가 없는 것 같네. 그런 생각들이 도혁을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진연후는 시무룩해져 있는 도혁을 힐긋 봤다.

“그냥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열혈 막내가 웬일로 이렇게 힘이 없을까? 혹시 주원이랑 싸웠어?”

“네?”

“하루 종일 주원이만 쫓아다니는 걸로 유명하잖아, 우리 도혁이.”

“제가 그래요?”

“어, 아주 그래.”

“음… 그래서 주원 선배가 절 귀찮아하시는 건가.”

도혁이 자신감 없이 중얼댔다. 진연후는 도혁에게 사탕을 건네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주원이는 그런 이유로 사람 귀찮아하지 않아. 내가 오랫동안 봐 왔거든.”

“선배, 주원 선배랑 친하세요?”

“그럼. 중학교 고등학교 같이 나왔는걸. 동네 주민이기도 하고. 비시즌일 때 가끔 한강변에서 마주쳐. 항상 운동하더라.”

“와, 진짜요? 지나가다가 주원 선배 보면 어떤 느낌이에요?”

“음?”

진연후는 도혁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주원이 무슨 영화배우도 아니고, 지나가다가 보는 게 대수는 아니었다.

“주원 선배는 갖춰 입고 운동하나요? 아니면 평범하게?”

“어… 갖춰 입는 편.”

“맨몸으로 뛰는 편인가요, 아니면 자전거?”

“보통 맨몸으로 뛰는 편 같던데. 뭐 끌고 나온 적은 없었어.”

“그렇구나. 한강변… 마주치기 좋은 장소.”

“도혁이 너 주원이 좋아해?”

진연후가 장난조로 말했다. 그로서는 아무런 악의도, 선입견도 없는 농담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혁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사랑은 아니고요!”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을 해. 놀랐잖아.”

“죄, 죄송합니다. 제 말은 사랑은 아니고…….”

“됐어, 됐어.”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가지고는 사랑이 아니긴.

진연후는 상황이 파악되었으나 어른스럽게 모르는 척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요, 연후 형.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돼요? 주원 선배랑 중고등학교 같이 나오셨다고 하니까 궁금한 게 많아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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