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응. 편하게 물어봐.”
“같이 펜싱부셨던 거죠?”
“내가 한 학년 위에 부장, 주원이가 그 밑 학년의 부장이었어. 중1 때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됐지.”
“와… 혹시 그때 졸업 앨범 갖고 계세요?”
“집에 가면 있는데, 왜?”
“주원 선배 졸업 사진 좀 찍어서 저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건 화질이 너무 흐려서…….”
“알았어.”
“부탁인데 고등학교도 좀.”
“그래, 그래.”
진연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이를 깨물었다. 이 자리에 없는 주원에게 마음속으로 응원과 애도를 보냈다. 이런 대형견 같은 후배가 쫓아다니는데 천하의 주원이라 해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같은 시각, 주원의 차에 오른 희우는 옆자리에 앉은 주원을 보며 씩 웃었다. 그녀의 시원시원한 눈매가 가늘어지며 짓궂은 표정이 드러났다
“도혁이 귀엽더라.”
“뭐가 귀여워요.”
“얼굴도 잘생겼고. 맞지?”
“…잘생겼긴 한데…….”
“그런 도혁이와 주원이는 무슨 관계일까?”
주원은 곤란함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희우는 항상 눈치가 빠르고 눈썰미가 좋아 대표팀 내에서 그녀의 레이더를 피해 가는 커플이란 없었다.
하지만 도혁과 자신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가. 녀석이 들이대고 나는 도망치는 그런 관계.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희우 누나 보기에는 대체 어떻다는 거지? 주원은 궁금했다. 그때 희우가 알아서 입을 열었다.
“내가 예상하는 건, 주원이가 도혁이 좋아한다는 거.”
“…네? 그 반대가 아니라요?”
“응. 이렇게 넋 빠지고 당황하고 감정 못 추스르는 채주원 처음이야.”
“…제가 그래요?”
“그렇다니까? 도혁이가 다가오려고 하면 밀어내고, 또 막상 도혁이가 멀어지면 전전긍긍하잖아. 아까도 도혁이가 너 쳐다볼 때는 딴짓하더니만 도혁이가 연습 돌입하니까 넋 놓고 보더라?”
“그, 그거는……!”
주원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늘따라 도혁한테 눈길이 가서 여러 번 훔쳐본 게 맞긴 하지만, 그걸 희우가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솔직하게 말해 봐. 너 도혁이 좋아하지?”
“무슨 소리예요, 누나.”
바로 정색이 나왔다. 희우는 아랑곳 않고 계속 주원을 몰아붙였다.
“반응 보니까 맞네.”
“대답 안 할게요, 노코멘트.”
“흠, 채주원. 사랑 앞에서 솔직하지 못한 남자였네.”
“솔직하지 못하다뇨, 제가 얼마나 진실된 인간인데!”
주원은 고개를 저으며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희우의 눈에 여전히 주원은 진심을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안 되겠다. 네가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놓을 때까지 나 서울 안 올라가.”
“뭐라고요, 누나?”
“버스 시간 미룰래.”
희우가 핸드폰을 열어 버스 티켓 앱을 켰다.
“자, 봐라. 나 다음 차로 바꿨다?”
“진짜로 바꾼 거예요?”
“어. 네가 입 안 열면 나 서울 안 간다니까?”
지금 희우는 월척을 낚은 낚시꾼이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커플, 가만히 두고 보는 건 범죄 아니야? 그녀는 결국 터미널 앞 카페로 주원을 끌고 가는 데 성공했다.
“여기 아메리카노 두 잔, 얼음 많이, 제일 큰 사이즈로요.”
“네.”
희우는 자기 얼굴만 한 커피를 받아 들고서 주원 앞에 마주 앉았다.
“자, 이제 채주원 너는 솔직해진다.”
희우가 마치 최면술을 걸듯이 말했다. 마술사를 방불케 하는 손짓까지 해가며 유난을 떨었다.
“제가 언제는 가식적이었어요, 누나?”
“그래? 그럼 이것부터 대답해 봐. 너 이도혁 좋아해, 아니야?”
“절대 아니죠.”
주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도 없이 들이켜며 희우의 눈을 피했다.
“아니라고? 그럼 이것도 대답해 보자. 주원이 너, 도혁이가 거슬려, 안 거슬려?”
“…거슬리긴 해요.”
“신경 쓰이지?”
“뭐, 어떤 의미로는요. 귀찮잖아요.”
“오호, 귀찮다라.”
희우는 건수 하나 잡은 기자처럼 눈을 빛내며 테이블 위로 팔짱을 꼈다.
“귀찮고, 신경 쓰이고, 거슬리고. 근데 시야 밖에 있으면 어때? 예를 들어서 지금처럼 걔랑 같이 안 있을 때. 걔가 뭐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렇게 물어본다면 답은 하나였다. 궁금하다. 진연후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지, 혹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을지, 그게 아니더라도 도혁이 어떤 상황일지 궁금했다. 아까 회식 때 희우와 자신이 과하게 친하게 지내 도혁의 기분이 상해 버린 건 아닌지 신경도 쓰였다. 솔직히 그랬다.
“…궁금하죠.”
“내가 딱 답 내려 줄게. 그거 좋아하는 감정이다.”
“네? 말도 안 돼요.”
“진짜야. 내가 지금 남자친구 사귀기 시작할 때 딱 그랬어.”
“아… 아니, 진짜예요?”
“어, 지금 내 남자친구 오메가잖아. 처음에는 어떻게 오메가인 내가 오메가인 남자를 의식하고 신경 쓸 수 있지? 신기했거든. 걔가 뭘 하든 거슬리고 귀찮았기도 하고. 근데 걔가 딱 일주일 해외여행 가니까 미치겠더라.”
“왜요?”
희우는 손가락으로 숫자 7을 만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나갔다.
“하루째는 괜찮았어. 근데 이틀째 되니까 살짝 의식돼. 사흘째? 왜 전화를 안 하나 궁금해져. 나흘째? 내가 먼저 걸어 볼까 하는 미친 생각이 들어. 그리고 오 일째. 내가 못 참고 전화를 했고, 육 일째. 날 좋아한다는 걔의 말이 더 이상 헛소리로 안 들리고 진지하게 들려. 칠 일째. 그냥 사귀기로 했지.”
“헉.”
“사랑이란 그런 거야, 주원아. 너 도혁이 좋아해.”
희우의 말에 주원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얼음만 남을 때까지 벌컥벌컥 커피를 들이켠 다음, 주원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누나, 하지만 전 알파예요. 걔도 알파고요.”
“그런 게 뭐가 중요한데?”
희우의 말에 주원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게 왜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답을 할 수 없었다. 알파는 오메가와 만나는 게 상식이니까? 알파와 알파 커플은 극히 드무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쳐. 그러면 넌 도혁이 안 보고 살 수 있니?”
그 말에 대한 대답은 곧바로 떠올랐다. 절대 아니다.
* * *
“아직도 안 오네……. 희우 선배랑 뭘 하는 걸까.”
터미널을 다녀와도 두 번은 더 왕복했을 시간인데 안 온다. 분명히 희우 선배와 단둘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거야.
도혁은 손목시계를 한 번 봤다가 굳게 닫힌 현관을 한 번 보기를 반복했다. 소파에 웅크려 앉아 주원을 기다리고 있자니 꼭 집 지키는 강아지가 된 것 같아 울적했다.
도혁은 옷장으로 가 주원이 깔끔하게 걸어 놓은 유니폼 재킷을 꺼내 한 아름 품에 안았다. 주원 본연의 민트향이 코끝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냄새를 맡으니 더욱 사무치도록 주원이 그리웠다.
“선배… 주원 선배.”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도혁은 시무룩한 낯빛으로 침대에 누웠다. 품에는 유니폼을 꼭 끌어안은 모습이었다.
“얼른 와요……. 다른 사람하고 너무 오래 있지 말아 줘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눈가를 적시려던 때, 현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혁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선배, 오셨어요!”
도혁이 헐레벌떡 뛰어와 문을 열어 주었다.
“어, 왔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그게… 그냥 희우 누나가 좀 늦게 간다고 해서 같이 있다가 왔어.”
“…그랬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기다렸네요.”
도혁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주원은 꿀꺽, 침을 삼키고 시선을 돌렸다.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주원은 지금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희우와 대화 끝에 내린 결론.
‘나는 이도혁을 좋아한다’라는 명제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부정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자신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며 서로를 지켜봤던 희우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되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감정에 최선을 다하라’는 충고만 들었다. 대화를 피하려던 주원을 끝끝내 붙들고 늘어지는 희우에게 마지못해 제 감정을 실토해야 했다. 민망한 부분만 빼고 모조리 다.
선수촌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원은 희우와 나눈 대화를 곰곰이 곱씹었다. 사실 희우가 짚어 준 거의 대부분은 주원 스스로도 얼마 전부터 깨닫고 있던 것들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버텼던 것뿐이지.
한밤중의 도로에는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뿐, 아무것도 없었다. 음악도 틀지 않고 운전을 하던 주원은 문득 옆자리를 봤다.
오늘은 희우를 태우기는 했지만, 그 한 건을 제외하고는 최근 몇 달간 이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덩치가 커다랗고, 웃을 때는 한없이 어린아이같이 천진무구한 얼굴을 한 후배.
주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의 끝에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나답게 굴자.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자.
* * *
도혁은 깨어 있었다. 그는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주원을 반겼다. 평소와 같은 일상의 풍경이었지만 달라진 것은 주원의 마음뿐이었다. 한번 제 감정을 인정하자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도혁의 숨결 하나 손길 하나가 다 무던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쟤가 이렇게 잘생겼었나?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키도 큰 게 몸도 좋네.
주원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경이었다. 희우 누나는 왜 친절하게 내 감정을 짚어 줘 가지고는……!
내가 이도혁을 좋아한다니. 감정적으로 끌려다니고 있다니. 자존심 상해.
주원이 혼란의 바다에서 나 홀로 헤엄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도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선배, 희우 선배랑 대체 무슨 이야기 하면서 여태껏 시간 보내신 거예요?”
“어? 별… 별거 없었어.”
“표정이 왜 그러세요. 설마, 제 이야기라도 한 건가요?”
도혁이 미간을 좁혔다. 주원은 양심이 찔려 눈을 굴렸다. 한 시간 넘게 네 얘기만 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