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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58화 (41/115)

58화.

도혁이 주원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눈이 마주쳤다. 그저 짧은 눈 맞춤에 불과할 뿐인데, 주원은 굉장히 이 상황이 머쓱했다.

“진짜예요?”

“어? 아니야. 나 씻으러 갈게.”

주원은 옷가지를 집어 들고 허둥지둥 욕실로 향했다. 전혀 폼 나지 않는,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의 연속이었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 왜 이러냐. 진짜로 쟤를 좋아하나 봐.

주원은 벅벅 세수를 하다가 거울을 봤다. 평소와 똑같은 자신이 비쳤다. 하지만 표정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누가 봐도 고민이 많은 자의 얼굴에, 주원은 괴로워졌다.

“아아… 안 돼.”

마음 주지 않기로 결심했잖아! 잘못 틀어지면 평생 안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 건 바로 나라고! 근데 왜 자꾸 셀프로 돌진을 하려고 해?

채주원, 이도혁은 알파야. 그것도 아주 강하고 페로몬이 진한 우성 알파라고. 러트 때 생생하게 체험했잖아?

러트 때는 형질인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낱낱들이 드러난다. 자신의 형질이 얼마나 강력한지, 페로몬의 농도가 어떤지 가감 없이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세컨대 도혁의 페로몬은 자신보다도 더 짙고 강했다. 묵직한 우디향에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도혁을 좋아한다고? 이게 말이 되냐고……! 상알파 채주원이, 나보다 더 지독한 알파 놈을 좋아한다고?

주원은 얼굴에 찬물을 뿌리며 괴로워했다.

한편 바깥에 앉은 도혁은 체온계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37.8도. 러트에 돌입하기 전 알파의 전형적인 체온이다. 보통 37.5도가 넘어가면 일주일 내에 러트 사이클이 온다는 의미였고, 38도에 도달하는 날 러트가 터지는 것이 보통이다.

“곧이겠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러트 관리 캘린더는 의미가 없었다. 호주에서 주원과 동시에 러트를 맞이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다. 그런데도 다시 러트가 찾아오려 한다는 것은 페로몬 체계가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선배한테 말을 해야겠어.”

도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을 했다. 호주에서 사고를 친 다음 날부터 이들은 ‘러트 파트너’라는 명목으로 묶인 와중이었다. 그러니 이번 도혁의 러트는 주원과 함께 보내야 할 것이다.

“선배, 다 씻었어요?”

“어, 도혁아.”

때마침 씻고 나온 주원이 침대맡으로 다가와 드라이어를 틀었다. 검은 머리가 윤기 있게 마르는 동안, 도혁은 몇 번이고 말을 골랐다.

“머리 다 됐어요. 그리고 선배, 저 말이에요.”

“응?”

“…다음 주쯤에 러트 올 것 같아요.”

“뭐?”

주원이 수건을 떨어뜨렸다. 듣던 중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지난 러트에서 한 달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또 러트가 온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곤란한 소식이기도 했다. 이제 막 도혁을 연애 상대로 의식하기 시작한 주원으로서는 함께 보낼 러트 사이클이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얘랑 나랑, 다시 또 그렇고 그런 일을 하는 거야? 당장 다음 주에?

주원의 눈앞으로 그날 밤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지난번의 러트 사이클, 그것은 주원에게 있어 짐승에게 압도당하는 감각을 선사했다. 그것도 야생의 밀림 한복판에서, 맹수에게 잡혀가 살점 하나하나를 뜯어 먹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도혁의 러트는 강렬했고 페로몬은 지독했다.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그 이후로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장난스러운 뽀뽀와 진지한 키스는 했지만 러트를 해소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명색이 파트너인 이 상태에서 도망갈 길은 없었다.

“아… 그렇구나. 다음 주…….”

“네. 아마 베를린 펜싱 월드컵 나갔을 때이지 싶어요.”

“그래. 베를린…….”

“미리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필요한 준비는 제가 해 갈 테니까, 선배는 그냥 마음의 준비만 해 두세요.”

필요한 준비가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도혁의 말마따나 마음의 준비가 문제였다.

그다음 날부터는 어색함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주원은 아침에 일어나 누워 있는 도혁을 볼 때도, 같이 아침 식사를 할 때도, 오전 훈련을 할 때도 도혁을 의식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체향이 점점 짙어질 때마다 긴장의 정도도 더해졌다.

또한 도혁이 틈틈이 체온계로 체온을 재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긴장감에 온몸이 굳었다. 하지만 주원이 의식한다고 해서 올 러트가 안 오는 건 아니었다.

“선배.”

주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했다.

“응, 무, 무슨 일인데.”

“저 지금 37.9도예요.”

출국하는 비행기 안, 도혁은 주원의 옆자리에 앉아 작게 소곤거렸다. 우디향이 묵직하게 주원의 코끝을 스쳤다.

굳이 체온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지금 도혁이 러트 직전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디향은 시시각각 진해지고 있었다. 공항으로 오는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눈만 감고 있더니, 아마도 몸을 휩싸는 열기 때문이었으리라.

“아… 37.9도면 곧이네. 아마 내일 정도……?”

“네. 99% 확률로 내일요. 참고로 코치님한테는 슬쩍 귀띔해 놨어요.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하루 정도 저 찾지 말아 달라고요.”

“그 말을 믿으셔?”

“믿던데요. 거기 덧붙여서 선배가 저 간호해 줘야 한다고, 선배도 연습 빠질 수 있다고 말해 놨어요.”

“으음… 알았어. 일단 내일 네 상태 보자.”

주원은 비행 내내 심란했다. 조금씩 열이 오르는지 도혁은 자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슬쩍 이마를 짚어 보니 불덩이를 품은 듯, 열이 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짠하고 안타까워 주원은 손등으로 여러 차례 도혁의 이마를 식혀 주었다.

“으음…….”

도혁이 주원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손 역시 델 듯이 뜨거웠다.

“선배…….”

낮은 목소리가 주원의 귓가를 습하게 데웠다. 주원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만 끈적거려라, 이 자식아! 이렇게 굴지 않아도 내일 우리는 육체의 대화를 나누기로 약속된 사이니까!

자신의 마음을 당당하게 마주한 주원은 떨렸다. 그것도 아주 미치도록. 마음이 통하고 났으니 분명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의 러트가 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준비를 하기는커녕 도혁의 열기에 자꾸만 이끌리는 기분이었다. 태양의 중력을 벗어나기 힘든 행성처럼 말이다.

* * *

“공지가 있어. 도혁이는 개인 사정으로 내일 하루 휴가야. 그렇게 알고 주원이는 막내 챙겨.”

“네!”

호텔 방을 배정받는 과정에서 박 코치가 4인방에게 공지했다. 민석과 규영은 독일 편의점 구경을 가겠다며 호텔 밖으로 나갔고, 남겨진 주원과 도혁은 침묵 속에 짐을 옮겼다. 둘 다 말이 없어 캐리어 끄는 소리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굳이 더하자면 도혁이 걸을 때마다 아주 그윽한 나무 향이 묵직하게 복도에 퍼졌다는 점 정도만이 특이점이었다.

“여기네. 1669호.”

한참 걸은 끝에 객실을 찾았다. 주원은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독일답게 깔끔하고 정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였으며, 침대가 컸다.

“우선… 짐 풀고,”

“선배.”

주원이 캐리어를 벽에 기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와락, 도혁이 뒤에서 주원을 끌어안았다.

“이도혁.”

“저, 아까 사람들 있어서 말 못 했는데……. 하아, 지금 시작된 것 같아요.”

뜨거운 입술이 주원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주원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마주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이성은 멀리 날아가 버린 듯, 그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예상보다 하루 빠른 러트였다. 마음의 준비는커녕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선배, 허락해 주세요.”

“도혁아.”

“…제발요, 미칠 것 같아요.”

더운 숨을 내뿜는 도혁은 괴로워 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이름을 갈구하는 그를 보자니, 주원은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려 왔다.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열기를 해소해 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선배.”

주원은 말없이 몸의 힘을 풀었다. 그러자 도혁이 와락, 주원을 깊게 끌어안고 침대로 향했다.

* * *

긴 밤이 지났다. 먼저 일어난 것은 주원이었다.

“하아…….”

옆자리에는 도혁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도 고르고 잠이 깊게 들었는지 움직이는 기척 하나 없었다.

이마를 짚어 보자 열기는 말끔히 가셔 평상시 체온으로 돌아와 있었으며 얼굴빛도 평화로웠다. 주원은 그 모습을 들여다보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간밤에 자신이 적극적으로 응했기 때문이었다. 적극적이기만 했는가, 나중에는 쏟아지는 감각에 못 이겨 울기까지 했다.

태어나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러트의 열기에 못 이겨 정신없이 휘말렸던 지난번과는 전혀 달랐다. 주원은 맨정신으로 그 모든 감각을 감내해야 했다. 간밤에 있었던 모든 일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부담스럽게도, 자신이 도혁에게 했던 말도 다 기억났다.

“…채주원 미친놈.”

주원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옆자리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도혁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휙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아래에 흩뿌려진 옷가지들이 혼란스러운 주원의 혼란스러움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도혁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일어났다.

“으음… 선배.”

옆자리부터 더듬어 보았지만, 공간은 텅 비었고 시트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디… 있어요, 선배…….”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주원을 몇 번이나 불러 보았지만, 도통 손에 그가 잡히지 않았다. 도혁은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그런데 침대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주원이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도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그가 어제 입고 있던 옷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와 미묘하게 위치가 바뀐 캐리어만이 벽을 덩그마니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 어디 갔어.”

일어나 앉은 도혁은 핸드폰을 열었다. 하지만 부재중 전화나 문자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주원의 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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