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여러 번 신호가 가고 나서야 주원이 전화를 받았다.
“선배, 어디예요. 호텔에 없어요?”
─ 나 좀 멀리 나왔어.
주원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 있었다. 간밤의 여파 때문이었다.
“네? 나가긴 어딜 가요.”
기껏해야 호텔 건물 안일 줄 알았건만. 도혁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그냥 좀… 산책 좀 하려고 나왔어.
“선배, 왜 그래요. 기분 안 좋아요? 네?”
주원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도혁으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안 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런데 이미 밖에 나갔다니 저 걱정돼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네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 그래.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는 주원은 미안함을 느꼈다.
─ 아냐. 별일 아니고… 그냥 커피 한잔하고 싶어서 나온 거야. 호텔 주변에 괜찮아 보이는 데가 있길래.
“그럼 다행이고요.”
─ 응.
“선배, 저 거기로 찾아가도 돼요?”
─ 뭐?
“보고 싶어요.”
─ 아…….
“어딘지만 알려 줘요. 빨리 나갈 테니까요.”
─ …알겠어.
주원은 전화를 끊고 도혁에게 카페 위치를 전송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은 거미줄을 친 것처럼 점점 복잡해져 갔다.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으며, 주원은 빈속에 커피를 들이부었다.
도혁은 순식간에 나타났다. 반팔 티에 조거 팬츠 차림의 그가 문을 열고 나타나자, 카페 아르바이트생을 포함해 점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빠듯이 쏠렸다. 오늘 핸섬 가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우리 카페를 찾아 주네, 그런 표정이었다.
“선배!”
도혁이 단숨에 달려와 주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카페 안의 눈동자들이 지진을 일으켰다. 뭐야, 저 핸섬 가이들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다들 소리 없는 경악에 빠진 와중에 주원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느꼈다.
“왜 이래. 이러지 마.”
“선배, 왜 그래요. 수줍어서 그래요?”
“수줍기는. 얼른 앉기나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주원이 도혁의 등짝을 후려쳤다. 도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주원이 도혁을 밀어내고 자리에 앉혔다. 눈치 빠른 점원이 아까 주원이 주문해 놓은 아이스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좀 마셔.”
“선배도 마셨어요?”
“응. 아까 마셨어.”
“아이스였나 봐. 손이 차네요.”
도혁이 손을 뻗어 주원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겹쳤다. 그러면서 은은하게 웃었다.
“어제 너무 꿈같았는데… 이렇게 얼굴 보니까 현실처럼 느껴져요. 너무 좋다.”
“그런 말 하지 마.”
“알아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요.”
“그래도, 하지 말라고.”
대놓고 차가운 반응에 도혁은 흠칫했다. 주원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런 주원의 반응은 도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선배, 왜 그래요. 저한테 서운한 일이라도 있어요?”
“그런 건 아니야. 네가 나한테 섭섭하게 군 적 한 번이라도 있었냐.”
“그럼 왜 이렇게 차가운데요. 무슨 일인지 말해 줘요.”
주원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당분간 거리 두자.”
“뭐…라고요?”
도혁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듣던 중 충격적인 말이었다.
“실은 내가 좀 혼란스러워서 그래.”
“우리… 우리,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잖아요.”
도혁이 다급하게 말했다.
간밤에 주원과의 시간은 애정이 넘쳤다. 적어도 도혁은 그렇게 믿었다. 주원 역시 자신 못지않게 기분이 좋아 보였고,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러트의 열기에 휩싸이긴 했지만 도혁은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결코 주원을 상처 입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했다. 마치 두 사람이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퍼붓고, 지쳐 잠든 주원을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거릴 둔다는 것인지, 도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전 여태껏 저희가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느려도 전진하고 있다고 믿었다고요.”
도혁은 비록 서툴게나마, 주원과의 진짜 연애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앞으로도 조금씩, 차분하게 전진하면 될 거라고 조급해지는 마음을 달래 왔다. 주원과의 관계는 짧은 피스트 위가 아닌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여정이라고 믿어 왔으니까.
그런데 상대는 자신에게 거리를 두자고 한다. 지금까지 달려와 거리를 좁혀 놨는데, 거리를 두자고 말할 줄은 몰랐다. 그로서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으며,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만에 하나 도혁이 조금 더 연애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상대방이 이렇게 나올 때 자신도 여유를 갖고 한발 물러섰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사랑이 처음이었다.
스무 살짜리의 풋사랑에는 직진과 도전, 실패라는 몇 가지 간단한 개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주원이 거리를 두자고 하는 것에 대해 반발심이 일었다. 한마디로 불안해졌다.
혹시 거리를 두는 동안에 선배가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을 걷어차게 되면 어떡하지. 그는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덧 그의 말투는 긴박해져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탓이었다.
“그러니까, 선배는 저 보기 싫다는 거죠?”
“야, 그게 아니잖아.”
“아니면 뭔데요. 같이 자고 나서 거리를 두자면 그게 어떻게 다른 뜻으로 해석이 돼요?”
주원은 어이가 없었다. 잠깐 시간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말할 일인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말한 거나 다름없잖아요.”
눈앞의 스무 살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애꿎은 커피잔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짧은 침묵이 끝나고, 도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카페에서 나갔다. 딸랑, 문에 달린 벨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주원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다투고 싶었던 게 아닌데, 상처를 입혀 버렸다. 나야말로 스무 살짜리만도 못하네. 왜 이렇게 서툴어진 건데. 늘 여유롭게 인간관계를 다루던 내가, 어쩌다가.
자괴감이 밀려왔다. 맹세컨대 주원은 지금까지 연애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한 번도 감정적으로 휩쓸려 본 적이 없었다. 애정을 받으면 받은 대로 돌려주었고, 상대나 자신이나 애정이 식으면 식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소위 어른의 연애였다. 능숙하고, 매끄럽고, 철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하지만 도혁과 하는 짓은 꼭 소꿉놀이 같다. 어떤 날에는 철없는 불장난 같기도 하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미안한데,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겠는데 연락할 용기가 없다. 그랬다가는 널 좋아해서 두렵다는 말을 해 버릴까 봐. 지금껏 숨겨 왔던 모든 감정을 한순간에 쏟아 내 버리고 나약한 모습을 보일까 봐.
“미치겠네.”
주원은 두통이 몰려오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토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도 청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도혁이인가? 그는 서둘러 액정을 확인했다. 그런데 발신자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연후 형>
에페팀의 진연후였다. 이 시간이면 한국은 밤일 텐데 무슨 일이지. 주원은 연결 버튼을 눌렀다.
“형, 무슨 일이에요.”
─ 어, 주원아. 너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아… 그렇게 들리세요?”
─ 딱 들으면 알지. 나 눈치 좋잖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 진천에서 회식이 있었을 때, 진연후가 뜻 모를 문자를 보냈었다.
‘힘내라, 채주원. 만만치 않을 거 같다’
주원은 그 문자에 ‘형,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라고 답을 보냈지만 진연후는 웃는 이모티콘만 보내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따로 얘기할 시간이 없었는데 마침 진연후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진연후는 주원처럼 알파였지만 형질을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귀공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매너가 좋고 젠틀해 알파나 베타에게 대시를 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다방면으로 연애 경험이 많았다.
그렇다면 연애 조언을 구하기에 좋지 않을까. 주원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진연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 뭐 하고 있나 싶어서 전화했는데, 우리 주원이 목소리가 너무 우울한데? 훈련이 잘 안 되는 거야?
“그건 아니고요……. 마음이 좀 심란해서요.”
─ 강철 멘탈 채주원이 무슨 일이래. 말해 봐.
“…저 상담 좀 해도 돼요?”
─ 당연히 되지.
“어… 그러니까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주원은 슬그머니 거짓말을 시작했다. 진연후는 별다른 태클 없이 계속 이야기해 보라고 말했다.
“한쪽이 잠깐 거리를 두자고 했는데, 상대방이 화를 내더란 말이죠. 그래서 좀 뭐라고 하지……. 싸웠대요.”
─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데? 사귀어?
“어… 사귀는 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 사이인 것도 아니에요.”
─ 친구 이상 연인 미만?
“맞아요.”
─ 거리를 두자고 한 이유가 뭔데.
“…자꾸만 그 애가 좋아지는 게 두렵대요.”
─ 왜 두려운데? 좋아하는데, 왜?
“헤어지게 되면 다시는 볼 수 없으니까요. 둘은 이미 선을 넘은 관계고… 사귀게 되면 마음을 다 줘 버리게 되고……. 그런데 만약에 헤어지게 되면 끝이잖아요. 그대로 영원히 그 애를 잃게 되면…….”
진연후는 잠깐 답이 없었다. 주원은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고 초조했다.
“연후 형은 이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미 답이 나온 것 같은데.
진연후가 웃음을 섞어 말했다.
“답이 다 나왔다니요, 무슨 뜻이에요?”
─ 흔한 사랑싸움이잖아. 너무 평범한 이야기라서 굳이 해설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좋아서 무섭다니, 푹 빠졌네. 그냥 사귀라 그래.
“…그냥 사귀라고요?
─ 응. 엄청 좋아서 겁날 정도인데, 그런 사람 놓치면 후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