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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60화 (43/115)

60화.

놓쳐서 후회라. 주원이 이제껏 생각했던 후회는 그 반대의 것이었다. 도혁과 만났을 때의 리스크, 입게 될 피해와 앞으로의 서먹함 같은 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진연후가 이야기하는 것은 도혁과 사귀지 못하고 흘려보냈을 때 네가 괴로울 것이라는 소리였다. 진연후는 희우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 난 실제로 그런 사람한테 고백한 적이 있어. 다시는 안 봐도 좋으니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더라. 지금 나누는 대화가 마지막이라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너를 친구가 아닌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털어놓고 싶었어.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시원하게 차였다. 그렇게 하니까 정말로 후회 안 남던데.

진연후가 다 지나간 이야기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채주원, 화이팅이다. 사랑싸움 그거 펜싱 칼로 물 베기야.

진연후가 소리 내 웃었다. 주원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형, 이거 제 이야기 아니에요. 아니고요!”

─ 그럼 고생해. 애인하고 잘되면 한턱 쏘고.

전화가 끊겼다. 주원은 벙쪄서 눈만 끔뻑였다.

* * *

주원은 카페 밖으로 나와 인근 공원을 한 바퀴 산책했다. 나무 그늘이 우거진 곳 아래 벤치에 앉아 있자니 공원을 산책하는 무리와 운동을 즐기는 소년, 소녀들이 그의 눈앞을 오갔다.

평화롭게 앉아 신문을 읽는 중년의 부부, 골든레트리버를 산책시키는 젊은 커플도 보였다. 다들 서로가 있어 행복하다는 듯 파트너의 곁에서 웃고 있었다.

진연후와 통화를 하니 어느 정도 감정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아까의 자신은 어른스럽지 못했다. 도혁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또다시 상처입혔다. 도혁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황당할 것이다.

하룻밤을 또다시 같이 보내 놓고, 다음 날 아침 태도를 바꿔서 거리를 두자고 한다. 자존심도 상할 것이다. 카페를 나서던 도혁의 상처 입은 얼굴이 떠올랐다. 주원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 멀리서 분수 옆 물웅덩이에 풍덩 빠지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물장구를 쳤다. 아이의 부모는 무척이나 곤란해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행복해 보였다.

그렇다. 감정이라는 건 자신의 뜻대로 빠지고 안 빠지고를 조절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러나 감정 안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일단은 이 감정을 피하지 말고 맞서자. 우선 도혁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마음을 다잡은 주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로 향했다.

방문 앞에서 주원은 망설이며 멘트를 준비했다.

똑똑. 이렇게 두드리고 문을 열까. 아니면 바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도혁에게 키스를 할까. 후자는 좀 과한 것 같아, 주원은 그냥 담백하게 노크를 했다.

응답이 없어서 전화를 걸어 보려는 찰나, 방문이 열렸다.

“…선배?”

문 너머 도혁은 그새 조금 울었는지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다.

“울었어?”

“티 나요? 망했다.”

“괜찮아.”

“세수 많이 했는데…….”

주원의 마음속에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사랑스럽다는, 예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이 더불어 딸려왔다. 한번 인정하고 나니 자신의 마음에 이름표를 쉽게 붙일 수 있었다.

주원이 가만히 서 있자 도혁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선배. 생각할 시간 필요하다면서요. 왜 이렇게 빨리 왔는데요.”

“나 들어가도 돼?”

도혁은 대답 없이 문에서 약간 비켜서서 주원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도혁의 앞을 지나는 동안 주원은 묵직한 우디향을 느낄 수 있었다. 러트 다음 날이라 아직 갈무리되지 못한 페로몬이 남아 있는 것이다.

새삼 그 향에 가슴이 뛰었으나, 주원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찾아오기는 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애-주원은 마침내 이것이 연애라고 인정하기로 했다-하면서 자신이 을이 되어 사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혁을 울리고 싶지 않았다. 어색하고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도혁이 자신을 보고 웃지 않는 것이 싫다. 그렇다면 진심을 다해 사과를 해야 한다. 도혁이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주원은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도혁이 먼저 말했다.

“미안해요, 선배.”

“뭐가 미안해?”

주원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설마 나에 대한 애정을 철회하겠다는 뜻인가? 주원은 저도 모르게 논리가 점프했다.

이것이 사랑에 빠진 비이성 상태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주원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도, 도혁아.”

주원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입을 여는데 도혁이 마저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철없게 굴었죠. 미안해요, 선배. 너무 제 마음만 억지로 밀어붙인 것 같아요. 나도 좀… 참아 볼게요. 잘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도혁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주원의 가슴이 찡해 왔다. 이 커다란 멍멍이는 또 혼자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도혁이 네가 잘못한 것은 없는데. 주원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가 도혁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도혁의 고개를 손으로 들어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선배……?”

주원이 도혁의 양 뺨을 감쌌다. 도혁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주원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맑은 갈색 눈을 보며 주원이 말했다.

“…미안해.”

이번에는 도혁이 놀랄 차례였다. 이대로 차이는 건가? 미안하다는 말 다음에 나올 말이 두려웠다. 만약 선배가 이 관계를 그만두자고 말한다면 그 절망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도혁의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은 너무도 감동적인 것이었다.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어. 미안하다. 거리를 두자고 한 말 취소할게.”

“…선배, 선배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러지 말아요. 다 제 잘못인데요.”

다정하면서도 애틋한 도혁의 목소리에, 주원은 널찍한 등에 팔을 올려 꽉 끌어안았다. 도혁의 품 안은 따뜻하고 편안했으며, 옅은 우디향이 아늑했다. 간밤에 자신을 온통 물들이던 향이었다.

가슴 뛰네, 이 자식. 아니다. 이거 내 심장 소리인가……?

한번 연애 상대로 인식하고 나니 주원은 도혁의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주원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 가슴, 하물며 향기까지도.

주원은 헛기침을 하며 도혁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도혁은 애교를 부리며 주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에이, 선배.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요.”

“아, 잠깐만 놔 봐.”

“싫어요.”

도혁은 주원의 뺨에 소리 나게 뽀뽀했다.

“야! 너 갑자기 뭐야.”

“선배가 너무 귀엽잖아요.”

“뭐? 내가 귀여워?”

일평생 잘생겼다, 멋있다는 말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살았던 주원인데 귀엽다니. 자존심이 상한 주원이 발끈했다.

“내 눈에는 너무 귀엽고, 잘생겼고, 멋있고, 사랑스러워요. 세상에서 최고예요.”

도혁은 주원이 부서질 정도로 세게 안으며 소곤거렸다.

“…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냐.”

“네. 사실이잖아요.”

도혁은 내친김에 주원의 입술에도 뽀뽀를 하려 들었으나, 주원은 그를 휙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이러고 있다가는 어젯밤의 일을 반복할 것만 같았다.

“오늘 쉬는 날인데 계속 방에 있기는 지루하지? 우리 화해한 기념으로 밖에 나가서 점심이라도 먹자.”

“방에 있으면 안 돼요? 선배랑 같이 있고 싶은데.”

“안 돼. 너 방에 있으면 또 어제처럼,”

“어제처럼, 뭐요?”

주원의 눈을 들여다보며 도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열받은 주원이 그의 등짝을 가볍게 때리자 도혁이 과장되게 아픈 척을 했다. 그러면서도 도혁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얼른 옷이나 갈아입어.”

“넵!”

완전히 기운을 차린 도혁이 신나게 대답했다.

주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혁은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처럼 캐주얼한 티셔츠 차림이 아니라 대체 언제 챙겼는지 모를 하얀 솔리드 셔츠를 꺼내 입었다. 어두운색 슬랙스에 셔츠를 입으니 안 그래도 키가 크고 피지컬이 좋은 그의 모습이 모델같이 보였다. 그럴싸한 수준이 아니라 수준급의 외모였다.

주원은 저도 모르게 도혁을 홀린 듯 바라보다 급하게 시선을 수습했다. 주원은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겼다. 어떤 식당에 들어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도혁처럼 적당히 포멀한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옷 갈아입기가 만만치 않았다. 도혁이 마치 코알라처럼 주원의 등에 달라붙어서 “선배, 선배.” 노래하듯 불러 댔기 때문이다.

“아, 제발 좀 비켜. 옷 좀 갈아입자.”

그렇게 말하며 자꾸 밀어내도 도혁은 접착제를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되레 주원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왔다. 거기에다가 도혁은 빈틈을 타서 주원의 뺨에 쪽, 뽀뽀까지 했다.

“이 자식이!”

“헤헤. 저 민첩하죠?”

도혁은 지치지도 않는지 주원의 얼굴 이곳저곳에 뽀뽀를 해 댔다. 주원은 펜싱 칼을 막아 내듯이 도혁의 애정 공세를 막아 내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 녀석 진짜 기분 좋은가 보다. 도혁이 좋은 건 결국 주원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호텔에서 나와 제법 멀리까지 걸었다. 대중교통을 타려 했지만, 도혁이 같이 걷자며 우긴 끝에 긴 거리를 산책하기로 했다. 바람도 상쾌하고 날씨도 좋아 길거리는 초여름의 낭만으로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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