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선셋 세일링(1)
“여권 잘 챙겼지?”
현관문을 열기 전, 주원이 뒤따라 나오는 도혁에게 물었다.
“당연한 소리.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까지 잠갔다는 거 아니겠어요.”
“잘했네.”
“우리 형이랑 훈련 말고 여행으로 해외 나가는 건 처음이니까 실수가 있으면 안 되죠. 그것도 무려 휴양지 리조트인데요.”
“그러게. 연맹이 센스가 있었어. 포상 휴가지를 우리 맘대로 고르게 해 주다니, 내가 연맹에 불만이 많은 인간이지만 이거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오늘은 4인방이 지난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에 대한 포상 휴가를 떠나는 날이었다. 감독, 코치, 선수 4인방, 그리고 스태프에게까지 골고루 여행 상품권이 주어졌는데, 꼭 다 같이 안 가고 각자 알아서 써도 된다는 말에 전원이 쾌재를 불렀다.
감독과 코치 등 기혼자들은 배우자와 골프 여행이나 떠나겠다며 일찌감치 비행기를 탔고, 젊은 스태프들 중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유럽 여행을 떠났다. 4인방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함께 바다가 아름다운 휴양지를 선택했다.
그동안 격렬하고 치열하게 싸웠으니 이제는 선베드에 누워 하루 종일 햇빛이나 쬐었으면 좋겠다는 게 네 명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민석이 동남아의 대표 휴양지 보라카이가 가는 길은 험해도 최고라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다들 바다를 좋아하는 편이라 쉽게 의견이 모아졌다.
“바다 얼마나 예쁠까요. 숙소 수영장 너머로 바다 보인다던데.”
설렌다고 잠을 설쳐서 눈은 충혈되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할지언정 웃음만은 환하게 지으며, 도혁이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주원 역시 도혁에게 밤새 괴롭힘당해 잠을 거의 못 잔 것은 마찬가지라, 도혁과 비슷한 다크서클을 달고 있었다.
여행 전날이니까 진한 스킨십은 자제하자는 주원의 의견이 있었지만 도혁은 그런 소리 집어치우라며 철저하게 묵살했다. 어차피 도혁이 특유의 파워풀한 애교를 부리며 다가오면 뿌리치지는 못하는 사람이 바로 주원이었다.
때로는 박력 있게, 때로는 가녀린 척 두 얼굴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도혁은 ‘제발 한 번만요.’와 ‘우리 형. 어차피 할 거면 반항은 그만해.’를 기가 막히게 섞어 쓰며 주원을 함락시켰다. 동거 생활도 제법 긴 시간이 지났지만 이런 일이 몇 차례나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 알고 보면 도혁이 엄청난 고단수는 아닐까, 주원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몸은 엄청나게 피곤했지만 주원은 비몽사몽간에 문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물론 한없이 무거운 몸과는 달리, 여행이 주는 특유의 설렘과 떨림은 어김없이 그를 찾아왔다.
“나도 더운 지역 리조트는 처음이라서 좀 기대되네.”
“섬 이름도 예뻐요. 보라카이.”
“가는 데 시간 걸리는 만큼 좋았으면 좋겠다.”
“어, 벌써 다섯 시예요. 얼른 나가야겠다.”
현관문을 부랴부랴 열어젖히고 두 사람은 오피스텔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으로 내려오자 초겨울의 새벽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라 그런지 주차장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에도 도혁은 손과 얼굴이 제법 시렸다. 원래 추위를 잘 안 타는 편인데도 그랬다. 자신도 시려운데 장갑을 끼지 않은 주원의 손이 차가워질까 걱정이 돼, 도혁은 주원의 손을 꼭 잡았다.
“왜.”
“우리 형 손 시릴까 봐.”
“시리긴 무슨. 나 추위 잘 안 타.”
“안 타기는, 어젯밤에도 형 나한테 꼭 안겨서,”
“조용히 해라. 누가 듣겠다.”
“힝… 우리 형 너무 매정해.”
“짐이나 실어.”
사귀고 나서 제일 먼저 바뀐 것은 호칭이었다.
도혁은 이제 정식 애인 사이가 되었으니 선후배 호칭 따위는 집어치우겠다며 박력 넘치게 주원에게 ‘주원아’라고 불렀다가 먼지가 날릴 정도로 얻어맞았다.
심지어 주원은 도혁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고, 도혁은 훌쩍거리며 메신저에 대고 장문의 반성문을 작성했다.
아주 가끔 흥분이 극한에 달하는 그렇고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한두 번 주원아라고 부르는 건 괜찮았다.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대인배처럼 넘어가 주었지만, 평상시에도 이름을 부르는 건 젊은 꼰대 주원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솔직한 심경이랄까, 비밀은 따로 있었다. 평소에 그렇게 불리면 그렇고 그럴 때가 연상되어서 주원조차 흠칫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죽었다 깨나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으므로, 주원은 대충 기강을 잡아야 한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않느냐 등의 말로 때웠다.
결국 절충안으로 나온 게 주원이 형이라는 호칭이었다. 말을 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원은 강경하게 존댓말을 요구했다. 도혁은 애인 사이끼리 웬 존대냐며 형이란 호칭을 쓰는 김에 반말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는 기막히게 아픈 꿀밤이었다.
그래도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나이답게 도혁은 은근슬쩍 타이밍을 봐 가며 말끝을 짧게 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주원이 정신없을 때.
“형, 이제 진짜 추워졌다.”
“그래도 지금 우리가 가는 데는 엄청 덥대. 여름 날씨라던데.”
“그래서 나 이 안에 다 여름옷만 챙겼어.”
주원은 차에 짐을 싣고는 다시금 빠진 게 없는지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두툼한 겨울 점퍼를 입고 있지만 트렁크 안에는 여름옷과 수영복이 가득했다. 옷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바다와 눈부신 모래사장, 이국적인 풍경이 떠올라 도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자, 다 실었으니까 우리 얼른 가요. 빨리 공항 가고 싶어.”
트렁크에 캐리어를 야무지게 실은 도혁이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래. 가자.”
* * *
평일 새벽의 도로에는 그렇게까지 차가 많지 않았고, 영종대로를 건널 때도 시원시원하게 달릴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인천 공항에 도착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승객을 찾는 정신없고 산만한 안내 방송, 캐리어를 들고 우다다 뛰어가는 여행객들, 항공사 카운터 앞에 줄 선 사람들이 연달아 내뿜는 하품. 그런 것들이 이곳이 새벽의 공항임을 잘 나타내 주었다.
“공항 오랜만에 오니까 좋네. 대회 때문이 아니라 여행 때문에 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저도 그래요. 이 북적북적한 소리도 듣기 좋네요.”
공항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사연을 품고 간다. 도혁과 주원은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후 첫 비행을 할 예정이었다. 그 사실만으로 둘은 충분했고, 또 특별할 만큼 행복했다.
민석, 그리고 규영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에 잠깐 커피 한잔 정도 마실 만한 짬이 났다. 도혁은 출발 전에 꼭 커피를 마셔 줘야 새벽 여행이 제대로 완성되는 법이라며 주원을 데리고 출국장의 상징 격인 프랜차이즈 카페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생각해 둔 메뉴가 있었는지 바로 이야길 꺼냈다.
“여행 기념으로 망고 바나나 셰이크 먹어요.”
“그것도 괜찮겠다. 어차피 비행기에서 잘 거니까 커피 말고 그걸로 먹지 뭐.”
“제일 큰 걸로 사 올게요.”
“어, 그래라.”
주원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지만 도혁이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내가 살게요.”
“무슨 소리야. 이걸로 사 와.”
“이번에 제가 선발전 MVP로 뽑혔지 않습니까. 상금이 빵빵해서 제 통장도 토실토실해졌어요. 제가 사 올게요.”
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뻐기듯 굴었다. 지난 국대 선발전을 통해 주원, 도혁, 민석, 규영이 다시 한번 국가대표 멤버로 확정되었다. 주원 입장에서는 올림픽 멤버 그대로 뭉친 것도 내심 기쁘고 후배들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도혁이 MVP로 선정된 게 굉장히 고양되는 일이었다.
최종 순위로는 주원에 이은 2위였으나 단 1년 만에 엄청나게 기량이 향상된 점, 세계 랭킹 1위인 주원과 결승에서 접전을 벌인 점 등이 고려된 결과였다.
다시 돌이켜 봐도 선발전 날의 접전은 끝내줬다. 주원을 수세에 몰아붙이고, 심지어 잠깐 역전까지 이뤄 낸 도혁은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최종 결과야 주원의 승리였지만 도혁의 파이팅하는 자세만큼은 챔피언에 비견해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도혁은 수상 소감으로 다음 기회에는 주원을 꼭 꺾겠다고 공식 선언했으며, 주원은 이길 테면 이겨 보라며 유쾌하게 맞받아쳤다. 그런 자신감 자체가 도혁 개인이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잘 보여 주었다.
물론 문체부 장관상과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주원의 커리어에는 아직 한참 못 미친다 할 수 있어도, 도혁은 성큼 자라난 선수였고, 또 성장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었다.
MVP 시상식이 있던 날 주원은 기특한 애인을 레스토랑으로 불러내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도혁이 갖고 싶어 했던 신기종 태블릿과 이어폰을 선물로 준비했고, 또 호텔 룸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도혁은 태어나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주원에게 길게 키스했다.
“그래. MVP가 쏘는 망고 바나나 맛이 어떤가 한번 먹어 보자.”
도혁은 그 말에 신이 나서 뛰듯이 걸어가 주문을 하고 음료수와 함께 돌아왔다. 컵 홀더를 끼우고 빨대까지 꽂아 주원의 손에 한 잔을 들려 주고서, 자기는 먹지도 않고 주원이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을 넋 놓고 관찰했다.
“넌 안 마셔?”
“형이 마시는 모습 보니까 배가 불러서.”
“허세 부리지 말고 마셔. 기내식 나오려면 한참 남았어.”
“어! 맞다. 배고픈 건 못 참지.”
도혁이 음료수 잔을 집어 들더니 다섯 모금 만에 가장 큰 사이즈를 끝장냈다.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