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선셋 세일링(4)
“여기서 더 하면 뽀뽀로 끝 안 나. 나도 유혹에 약한 인간이야, 안 돼.”
주원이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말했다.
“유혹에 약하다고요? 그럼 그냥 넘어가…….”
“그만해!”
자신을 덮치려는 도혁을 밀어내면서 주원이 욕실로 도망쳤다. 끝내 붙잡혀서 뺨에 뽀뽀 세례를 받는 주원의 얼굴은 전혀 짜증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우리끼리 인트로 다 찍었다고요.”
풀장에 도착하자 민석과 규영은 이미 풀장에 들어가 방수 카메라를 들고 B로그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미안. 수영복 좀 찾느라.”
“수영복을 지어 입은 것도 아니고 뭐 그렇게 굼떠요. 빨리 들어와요. 엄청 시원하고 좋아요.”
“알았어. 샤워 좀 하고.”
민석의 재촉에 도혁과 주원이 샤워기 아래로 향했다. 미온수로 몸을 적시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 풀장으로 다가가자, 주원이 보기에 풀이 꽤 깊어 보였다.
“풀장 좋네.”
“우리 진천에서 연습했던 데만큼은 아니지만 엄청 깊어요.”
키가 190cm가 넘는 도혁이 느끼기에도 풀이 꽤 깊어 보일 정도였다. 주원이 먼저 얕은 곳에 발을 담그고 점점 수심이 깊어지는 쪽으로 이동했고, 도혁이 뒤를 따랐다.
“형, 조심해요.”
“나 애 아니야. 수영 잘한다.”
“뭐… 빠져도 상관없긴 해요. 내가 인공호흡 해 주면 되니까.”
도혁이 실실 웃으면서 은근슬쩍 주원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주원은 간지럽다며 도혁의 얼굴에 물을 튀겼다. 그 모습을 본 규영은 차라리 눈을 가리고 말겠다며 선글라스를 주섬주섬 찾아 썼다.
“주원이 형. 우리 팀 나눠 가지고 수영 대회 열어요. 지금 풀장에 다른 사람 없으니까 뭐 찍으면서 놀기 딱 좋네요.”
“그럴까? 하긴, 조금 있다가 다른 투숙객 오면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럼 콜 하는 거죠? 수영이라면 저 김민석이 한 수영 하지 않습니까. 제가 직접 뛰어 보겠습니다.”
민석이 자신감 넘치게 팔을 휘저으며 포즈를 취해 보였다.
“나랑 규영이 형이랑 한 팀 할게요. 주원이 형이랑 도혁이 한 팀 해요.”
“좋아요.”
“그래.”
대결은 선수 한 명씩 붙어서 우열을 가리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주원과 규영이 각각 대표 주자로 선발되었고, 민석은 촬영을 맡고 도혁은 주원을 응원하기로 했다.
“다들 알겠죠? 지는 팀이 저녁 쏘는 거예요.”
“우리 주원이 형이 이길 테니까, 형님들은 지갑 열 준비 하세요.”
시작 전부터 민석과 도혁의 신경전이 대단했다. 주원과 규영 역시 상대방을 째려보고 턱을 치켜올리는 등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빴다.
“그럼 준비하시고, 출발!”
민석의 신호에 맞추어 주원과 규영이 잠영을 시작했다. 힘차게 물장구를 치며 훅훅 전진하는 두 사람의 속도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도혁이 애타게 주원의 이름을 부르며 손짓 발짓으로 응원을 했다.
“형! 주원이 형! 우리 주장 선배님, 힘내요!”
도혁의 우렁찬 목소리에 저 멀리서 망고를 깎던 풀 사이드 바 직원들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터치!”
주원이 간발의 차로 규영보다 먼저 결승선에 도달했다. 도혁이 환호하면서 물 안으로 첨벙 뛰어들어 주원을 껴안았다.
“우리 형 최고다! 너무 멋있어요!”
“에이, 졌네. 이 멤버로 밥 먹으면 돈 왕창 깨지는데.”
규영이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했다.
“우리 뭐 먹으러 갈까요?”
“오징어 바비큐랑 폭립 잘하는 집 있다던데, 거기 가자. 거기 안 가면 보라카이 다녀온 거 아니래.”
규영은 패자임에도 불구하고 맛집에 방문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자꾸 웃었다. 나머지 세 사람도 득달같이 찬성을 해,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해안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 * *
“와. 너무 맛있어.”
“살살 녹는다.”
명불허전 맛집답게 그릴 요릿집은 인산인해였고, 기다림 끝에 들어가 시킨 요리는 4인방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오징어에 바비큐 소스를 발라 구운 것과 마늘 볶음밥, 푸짐한 폭립이 너무 맛있어 네 명이 달려드니 금방 동이 났다.
“더 시킬까?”
“당연하죠.”
규영은 자기가 사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열심히 추가 주문을 했고, 민석은 테이블 위의 풍경을 살뜰하게 찍었다.
“이렇게 넷이 오니까 너무 좋다.”
주원이 턱을 괴고 후배들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신나는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올림픽을 위해 치열하게 달려온 사실을 잘 알기에, 그에게는 네 명이 뭉친 이번 여행이 더욱 특별했다.
“형이 좋다니까 저도 너무너무 좋아요.”
도혁이 배시시 웃으며 주원에게 살코기를 발라 주었다. 규영은 눈꼴이 셔서 실내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선글라스를 낄 뻔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공격당하고 있는 것인지, 펜싱 게임이었으면 이미 15:0이 되어 나가떨어졌을 상황이었다. 아아, 괴롭구나. 규영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렇게 다시 국대 뽑힌 것도 난 개인적으로 맘에 든다. 넷이 호흡 맞춰 온 게 있으니까 이번 시즌도 잘할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눈빛만 봐도 척척이잖아요.”
민석이 콜라 잔을 들어 올리자 나머지 세 사람도 음료수 잔을 번쩍 들어 올려 잔을 맞부딪쳤다.
“건배!”
“K4를 위하여!”
“다음 올림픽까지 쭉쭉 가 봅시다.”
“그러려면 너희 다 나한테 특훈 받아야 돼. 각오해라.”
주장다운 주원의 발언에 세 후배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표정만큼은 한없이 밝았다.
그릴 요릿집에서 시킬 수 있는 모든 메뉴를 시켜 먹은 다음, 다음 달 열릴 세계 선수권에 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 질 녘이 됐다. 넷은 밖으로 나와 해변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노을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노을 좀 봐.”
“끝내준다.”
앞다투어 하늘과 구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그들 앞에 현지인 남자가 다가왔다. 즉석에서 투어를 모집하는 호객꾼 같아 보였다.
“헤이! 여러분 선셋 세일링 보트 타세요.”
“보트요?”
“저기 보면 다 타고 있잖아요. 지금 나가야 경치가 좋거든요. 어때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얕은 바다에 정박한 돛단배에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올라타고 있었다. 배 자체는 많아야 서너 명이 탈 만큼 작았고, 큰 돛이 달려 있어 풍력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듯이 보였다. 주로 커플이나 가족 단위의 소규모로 뭉쳐 제각기 항해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규영이 손을 들고 말했다.
“오케이. 그럼 우린 빠져 주자, 민석아.”
차라리 규영은 지금 빠지는 게 기회다 싶었다. 그는 좋다며 민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과장되게 기쁜 티를 냈다.
“따로 타자고? 아… 맞네. 눈치가 있다면 우리가 빠져 줘야겠구나.”
“아니, 형님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도혁이 치솟는 광대를 숨길 생각도 없이 너스레를 떨었다. 누가 봐도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됐어. 너랑 주원이 형이랑 타.”
민석이 도혁의 등을 떠밀었다.
“흠흠. 얘들아, 조금 이따 보자.”
“재미있게 타고 오세요!”
민석과 규영이 한 팀, 도혁과 주원이 한 팀을 이루자 현지 호객꾼 입장에서는 돈을 두 배로 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민석과 규영을 자기 동료에게 냉큼 넘기고 도혁과 주원을 해안가 끄트머리로 데려갔다.
“배에 타세요. 운항은 제가 할 거니까 편하게 앉아만 계시면 됩니다.”
“오케이. 알겠어요. 주원이 형, 조심해서 올라와요.”
도혁이 먼저 배에 타 주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자신을 애지중지 돌봐주는 도혁이 참 고마웠지만 동시에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180cm도 넘는 알파를 무슨 요정 다루듯 다 이끌어 주고 손을 잡아 주는 상황이라니. 남들 보기 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혁의 눈빛에 깃든 진심 어린 걱정과 염려, 다정함에 이끌려 주원은 차마 그 손길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손 이리 줘요.”
“응.”
주원이 도혁의 손을 기꺼이 잡았다. 도혁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쥐듯이 주원의 손을 잡고 끌어올렸다.
“조심.”
“알았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배는 따로 선실도 없고 천장도 없는, 그냥 그물망으로 된 자리에 앉는 구조였다. 시원한 바닷바람은 기본이었고 스릴은 덤이었다.
“하늘 색깔 좀 봐요. 연보라색이랑 분홍색이랑 섞였어.”
“오묘하다. 신기해.”
새털구름 사이로 주홍빛 노을이 선연한데도, 하늘은 분홍색과 연보라색 사이 어디쯤의 예쁘장한 색을 띠고 있었다. 빛의 그러데이션이 장관을 이루며 주원의 옆얼굴에 쏟아졌다. 도혁은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조금씩 그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외국인이니까 못 알아듣겠죠?”
“응?”
“고백하려고요.”
도혁이 주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빛에 담긴 마음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벌써부터 짐작이 갔다.
“형, 아니 주원아.”
목소리는 달콤했고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주원은 이름이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화낼 타이밍조차 잡지 못했다.
“이 바다만큼 사랑해.”
도혁이 보여 준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서, 주원은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주원은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나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애인이 또 있을까. 이럴 때 말없이 키스로 화답해 주는 애인이 최고 아닐까 하고. 상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