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도도! 멍멍!(1)
밤새 괴롭힘을 당한 탓인지 주원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사실 오늘만이 아니라 세계 선수권 대회가 끝난 이후 매일같이 지독한 짓을 당하고 있었기에, 주원은 눈꺼풀이 천근만근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국제 대회가 끝난 뒤에는 푹 쉬면서 컨디션을 끌어 올려야 할 텐데, 어떻게 된 게 도혁 때문에 체력이 더 소진되는 요즈음이었다.
“굿모닝, 자기야.”
쪽. 주원의 감긴 눈가에 입을 맞추는 도혁은 새벽녘부터 혈기왕성했고, 기운이 넘치던 얼굴에는 윤기가 좔좔 흘렀다.
“으음… 나 좀 자게 놔둬.”
“나랑 안 놀 거야?”
“노는 게 아니라… 괴롭히는 거잖아. 나 잘래.”
주원이 몸을 웅크리며 도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도혁은 하룻밤 새 수척해진 주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쪽쪽, 버드 키스를 날렸다.
어쩜 우리 형은 자는 얼굴도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마음 같아서는 사진을 천만 장 찍고 비디오로 녹화해 놓고 싶어. 나만 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아… 너무 예쁘다.
“너 또 내 얼굴 쳐다보고 있지.”
주원이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긴.”
“자기, 피곤해요?”
“응. 누구 덕분에 죽을 것 같아.”
“알았어. 그러면 자기 코 자요.”
도혁이 주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주원은 곧 세상모르고 잠들었고, 도혁은 그런 그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잠든 주원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 안에서 주원을 끌어안고 내내 누워 있고 싶었지만, 주원이 일어나면 배고파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뭐라도 만들어 둬야 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나온 도혁은 벽면의 스위치를 눌러 주방 조명을 켰다. 프로답게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은 뒤 냉장고를 연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재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음… 우리 자기가 좋아할 만한 게… 베이컨이 보이는군. 토마토도 싱싱한 놈이 있으니 샌드위치를 만들어야겠어.”
오늘의 메뉴는 베이컨, 레터스, 토마토를 넣고 머스터드소스로 맛을 낸 샌드위치로 낙점되었다. 약간의 상큼함을 더해 줄 다진 피클, 레몬즙, 고소한 마요네즈와 버터를 꺼내 놓고 식빵까지 야무지게 찾아낸 도혁이 콧노래를 불렀다.
“그냥 만들면 심심하니까 TV나 볼까?”
도혁이 고개를 돌리면 바로 거실이었고, 커다란 TV가 시야에 들어오는 구조였다. 리모컨으로 TV 전원을 켰더니 마침 동물 관찰 프로그램인 <애니멀 팜>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오늘의 테마는 고양이 특집입니다. 전국의 랜선 집사님들, 기대되시죠?
MC의 멘트에 도혁의 귀가 쫑긋 섰다.
도혁은 고양이를 워낙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까만 재규어 같은 주원 때문에 고양잇과 동물 전체가 호감이라고 봐야 했다. 굳이 말하자면 주원은 재규어 20%에 도도한 고양이 80% 정도의 이미지랄까. 도혁 안에서 주원은 까칠하지만 가끔 애교 섞인 골골송을 부르는 매력적인 고양이었다.
─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고양이가 있죠. 치즈 무늬, 고등어 태비, 젖소 무늬 그리고 새까만 올 블랙 고양이도 있습니다.
화면에는 다양한 고양이들이 나와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도혁은 올 블랙 고양이에 시선이 갔다. 역시 우리 자기는 검은 고양이를 닮았다니까……. 아, 방 안에 있는데 또 보고 싶네.
도혁이 샌드위치를 만드는 둥 마는 둥 하면서 TV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침실 문이 열리면서 주원이 나왔다.
“어! 자기야, 일어났네요?”
“으응… 어.”
주원이 눈을 비비며 졸음을 잔뜩 매달고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도혁은 샌드위치를 도마에 놓고 쪼르륵 주원에게 다가가 가벼운 키스를 해 주었다.
“몸은 좀 어때요.”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수준.”
“아… 미안. 이제 살살 해야겠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주원이 도혁을 가볍게 흘겼다. 도혁은 그런 주원의 모습이 신선했고 또 귀여웠다. 동거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서 도혁은 주원의 새로운 면을 하나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주원은 늦잠을 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혁이 넘치는 사랑을 퍼부어 준 날이면 꼭 느지막하게 일어나 오전 내내 꾸벅꾸벅 졸곤 했다. 도혁은 그럴 때의 주원을 유난히 좋아했다. 평소보다 주원이 유순해지기 때문이었다.
도혁이 먹을 것을 떠먹여 줘도 얌전히 받아먹었고, 키스를 하자면 순순히 했고, 이런저런 스킨십을 해도 잘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시시 웃어 주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침실 문을 열고 등장한 오늘의 주원도 멍한 상태였다.
“배고프죠?”
“응.”
눈은 반쯤 감겨서 도혁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끌려와, 주원은 거실 소파에 기대앉았다.
“내가 얼른 샌드위치 갖다줄게요.”
“응…….”
도혁은 잽싸게 다시 주방으로 가서 빵 위에 버터 녹인 것을 펴 바르고 마요네즈와 머스터드소스를 뿌렸다. 그러고 나서 잘 씻은 레터스와 기름을 쪽 뺀 베이컨, 둥글게 선 토마토를 얹고 다시 레터스와 빵으로 마무리하니 그럴싸한 샌드위치가 완성되었다.
샌드위치는 사각형보다 삼각형으로 썰었을 때 더 맛있다지.
도혁은 완성된 샌드위치를 접시에 예쁘게 썰어 담은 후 주원에게 가져다주었다.
“자, 샌드위치 먹어요.”
주원은 눈을 거의 감은 채로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어? 엄청 맛있다.”
“그렇죠? 제가 요리 좀 잘하잖아요.”
“진짜 잘 만들었네. 재료가 어디서 났어.”
“냉장고에 있던 걸로. 베이컨도 토마토도 다 상태가 좋아서 그냥 만들어 봤어요.”
손에 잡히는 대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과하게 훌륭한 맛이라, 주원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넌 나중에 식당 차려도 되겠다. 떼돈 벌 것 같은 맛인데.”
“에이, 싫어요.”
“왜 싫어.”
“난 형한테만 먹을 거 만들어 주고 싶어.”
유치 찬란한 대화가 오갔다. 둘은 키득거리며 서로의 뺨에 한 차례씩 뽀뽀를 남겼다.
─ 고양이는 수염으로 균형을 잡습니다. 쓸모없는 부위 같아도 아주 섬세하고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소리죠.
주원이 TV로 시선을 돌렸다.
“어, <애니멀 팜>이네. 보고 있었어?”
“네. 심심해서 켜 놨는데 마침 고양이 특집이더라고요.”
“고양이?”
“저 고양이 엄청 좋아해서요.”
“흠… 그렇구나.”
끄덕이는 주원을 보며 도혁이 물었다.
“근데 형은 고양이랑 강아지 중에 뭘 더 좋아해요?”
“음…글쎄.”
주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가, 도혁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강아지. 아니다. 강아지라기보다는 개 느낌이 좋은데.”
“개? 큰 개요?”
“어. 아주 큰 개. 골든레트리버 같은 종.”
주원이 피식 웃으며 도혁과 눈을 맞췄다. 도혁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한 마리의 알파 늑대, 야생의 수컷 느낌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본인과 골든레트리버를 연관 짓지는 못했다.
“아, 먹었더니 졸리다. 무릎 좀 줘 봐.”
“무릎이요?”
“응. 그대로 가만히 있어.”
똑바로 앉은 도혁의 허벅지 위로 주원이 몸을 기울여 누웠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도혁의 광대가 솟아올랐다.
“머리 만져 줘.”
주원이 도혁의 손을 끌어다가 제 머리 위에 얹었다. 마치 자길 쓰다듬어 달라고 애교를 피우는 무릎 고양이 같은 모습에 도혁은 가슴이 벅찼다.
확실히 보라카이 여행 이후로 형 태도가 달라졌단 말이지.
물론 도혁의 눈에는 평소에도 엄청 사랑스럽고 멋있고, 섹시한 주원이었지만 요즘의 주원은 확실히 묘하게 다른 맛이 있었다. 애교가 늘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나긋나긋해진 면이 있었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불 주먹에 얻어맞으려나? 아직 꼰대 본능이 죽은 건 아니라서…….
“너 왜 안 쓰다듬냐?”
“아, 얼른 할게요.”
도혁이 웃음을 꾹 참으며 주원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흑발을 보고 있자니 정말 까만 고양이를 쓰다듬는 기분이었다. 주원은 눈을 지그시 감고 나른한 고양이처럼 미소 지었다.
주원이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는 정오 가까운 시간이었다. <애니멀 팜>이 끝나고 주말 드라마 재방송도 끝나고, 정오 뉴스가 갓 시작하려는 때였다. 부스스하게 눈을 뜬 주원이 먼저 제안을 했다.
“우리 오늘 모처럼 쉬는 날인데 옷이나 쇼핑하러 갈까?”
“어, 좋죠. 안 그래도 겨울 코트 예쁜 거 내가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음… 밖에 나가서 맛있는 먹고 싶기도 하고.”
“그럼 둘 다 해요. 어차피 샌드위치 소화 다 됐을 거 아니야.”
“그건 그래.”
샌드위치 따위야 간에 기별도 안 간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밥은 옷을 쇼핑하고 먹기로 결론이 났다. 우선 번화가에 나가 옷을 둘러보기로 하고 두 사람은 간단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씻고 멋지게 차려입은 주원은 옷을 사러 가는 사람이 아니라 패션쇼를 하러 가는 사람이 따로 없었다.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