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스위트 홀리데이(1)
어릴 적, 몇 살 때까지 산타를 믿었나요?
이렇게 물어본다면 도혁은 참 할 말이 많았다. 그는 무려 열 살이 될 때까지 산타 할아버지와 루돌프가 부산에 직접 와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간다고 믿을 만큼 순진했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크고 덩치는 웬만한 중학생을 앞질렀으면서 ‘엄마, 울면 안 되지?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 싫어하시니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도혁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다섯 살 차이 나는 누나도 합심해 도혁을 속여넘겼다.
‘와! 장난감 칼이야. 내가 갖고 싶어 했던 건데. 어떻게 아셨지?’
열 살의 12월 25일 아침, 도혁은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들고 어리둥절해하면서 기뻐했고, 가족들은 웃음을 참느라 죽을 노릇이었다.
그런 도혁의 동심이 깨진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열한 살의 크리스마스이브. 도혁의 아버지가 퇴근길 가져온 쇼핑백을 열어 본 게 화근이었다.
‘어……?’
그 안에는 도혁이 야심 차게 노리고 있던 변신 로봇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돌이 되어 굳어 버린 아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으나, 이미 어린 도혁은 모든 정황을 눈치채 버린 후였다.
‘흐… 흐아앙, 아빠 지금까지 산타인 척했어! 나 속였어!’
‘미안하다, 도혁아.’
‘산타는 없어요? 다 가짜야?’
‘응. 산타 할아버지는 없어…….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야. 도혁이 갖고 싶은 장난감 다 선물해 줄게.’
‘으아앙!’
동심을 파괴당한 도혁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고, 누나와 부모님은 밤새도록 도혁을 달래 주었다. 그때의 충격은 상당했으나, 나중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도 어릴 적 몇 년간은 산타의 존재를 믿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수 있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행운 가득한 어린 시절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 이후로 열 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도혁은 드디어 스무 살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어른이 되고 맞이하는 첫 겨울이라는 사실보다도 주원과 연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도혁은 원래도 크리스마스 시즌의 분위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캐럴, 화사하게 꾸며 놓은 길거리와 반짝이는 루미나리에, 이 계절만이 줄 수 있는 훈훈하고 설레는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좋을까. 미약한 상상력으로는 차마 그려 낼 수 없을 만큼, 도혁은 크리스마스가 기대되었다.
최고로 특별하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만들고 싶어.
도혁은 12월이 되자마자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특별할지, 파티는 집에서 할지 바깥에서 할지, 1박을 밖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집에서 보낼 것인가 여러 가지가 다 망설여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 이벤트. 연인으로서 주원에게 무얼 해 줘야 잘해 줬다고 소문이 날지 알 수 없었다.
“으아… 어려워.”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었다. 도혁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장 내년 2월에 있는 국제 대회를 준비하느라 12월에도 여전히 훈련은 계속되었다. 국대 4인방 모두가 K대학교 학생이라는 특징이 있었기에 진천에 입소하는 대신 학교 훈련장과 화성 펜싱 스타디움을 오가면서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도혁은 매일같이 훈련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크리스마스 생각뿐이었다. 런지를 하면서도, 러닝을 뛰면서도 크리스마스 장식물과 트리를 생각하고, 주원에게 어떤 선물을 안겨 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딴생각을 하다가 주원에게 들켜서 등짝을 찰싹 두들겨 맞기도 했다.
“이도혁, 훈련에 집중 안 하지?”
“아, 아니에요.”
“너 지금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거 티 나는데 무슨. 명령이다. 운동장 열 바퀴 뛰고 와라.”
주원이 매섭게 도혁을 쏘아보았다.
“네!”
조금이라도 꾸물럭거렸다가는 열 바퀴가 더 추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도혁은 부리나케 펜싱 경기장 밖으로 나가 앞마당을 달리기 시작했다.
“더 빨리 뛰어, 인마!”
주원이 쫓아 나와 도혁을 감시했다. 도혁은 진땀을 흘리며 전속력으로 달리며 생각했다. 저 무서운 호랑이 주장이 정말 내 사랑스럽고 깜찍한 애인이 맞는지.
애인 모드의 주원은 은근히 달달한 사람이었다. 어딜 갈 때마다 차 안에서 손을 잡아 주었고, 집에서 밥을 먹을 때 서로 너 한 입 나 한 입 먹여 주었고, 침대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할 때면 흥분에 못 이겨 도혁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 주었다.
“자, 집중 또 집중. 이도혁, 정신 차리고!”
열 바퀴를 도는 동안 도혁은 아픈 다리를 잊고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고민에 푹 빠졌다.
“고생했다. 다들 내일 보자.”
“하… 내일 또 봐요?”
“죽겠네, 죽겠어. 감독님보다 형이 더하다니까.”
“조용히 하고 내일 헤쳐 모여.”
주원이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는 민석과 규영을 돌려보내고 도혁과 함께 차로 향했다. 도혁 역시 허벅지가 터지는 고통을 겪은 터라 차에 올라서 허벅지를 툭툭 쳤다.
“가자.”
“네, 형.”
주원이 운전을 하는 동안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캐럴 송이 흘러나왔다.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네.”
주원이 살며시 웃으며 볼륨을 높였다.
“형도 크리스마스 좋아해요?”
“응. 캐럴 송도 좋고… 추운 분위기도 좋고, 나 눈도 좋아해.”
“그렇구나.”
역시 주원에게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도혁은 생각했다.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 볼까?
도혁은 핸드폰을 열어 포털 사이트에서 <크리스마스 애인 선물>, <특별한 크리스마스> 같은 검색어를 쭉 서치했다. 대부분 자기 브랜드의 향수, 액세서리, 옷을 사라는 광고가 검색되었다.
애인한테 선물하세요! 라고 화려하고 번쩍번쩍한 배너를 단 아이템들을 눌러 보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유명한 브랜드의 비싼 향수라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세상 그 어떤 향기보다도, 도혁에게는 주원에게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특유의 민트향이 최고로 향기로웠기 때문이었다. 맡기만 해도 숲속 한가운데 들어온 듯한 상쾌한 향기. 이 우주에 단 한 명, 주원만이 가진 특별한 내음. 그런 향을 향수 따위로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향수는 기각!
흠… 대신 액세서리는 어떨까? 팔찌나 목걸이나…….
도혁은 지금까지 자신이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대부분의 값비싼 물건은 다 주원이 사 준 것이었고, 하물며 지난 고백 때도 커플링은 주원이 마련한 것이었다. 잘은 몰라도 미친 듯이 비싼 브랜드에서 최고급으로 사 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도 좋은 액세서리를 사 줘 볼까? 싶었지만 그건 또 망설여졌다.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보라카이 여행 이후로, 도혁은 주원과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 중이었다.
결혼하고 싶다. 단순히 연애 상대로 그치는 게 아니라 주원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도혁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기념비적인 날에, 주원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면서 쥬얼리를 건네고 싶었다.
그럼 결론적으로 이번 크리스마스는 향수도, 쥬얼리도 아닌 특별한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기고, 세상에 단 하나뿐이며, 대체 불가능한 것을 선물해 주고 싶은데…….
그런 종류로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도혁은 끙 소리를 내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때 그의 눈에 확 들어온 포스팅이 있었다.
한 베이킹 교실 블로그에 <이번 크리스마스는 직접 만든 케이크를 선물해 보시면 어떨까요?>라는 배너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어, 이게 뭐지.
클릭해 보니 먹음직스럽고 또 아기자기한 케이크 사진이 귀엽게 첨부돼 있었는데, 빨간 리본에 초록색 리스 장식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듬뿍 자아냈다.
바로 이거다! 도혁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덩치가 산만 하고 딱 봐도 체육 계통으로 보이는 도혁이었지만, 이래 봬도 요리라면 나름 자신 있었다. 주말마다 주원을 먹일 브런치를 담당하는 훌륭한 셰프로 인정받고 있기도 했고, 가끔은 난이도 높은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베이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레슨을 받으면 어느 정도 잘 만들 자신이 있었다. 손재주가 좋은 편이고 요리에 대한 감각도 있었으니까.
좋아. 올해 크리스마스는 도혁이표 케이크다!
* * *
다음 날, 도혁은 블로그에 적힌 이메일로 연락을 넣었다.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베이킹 스튜디오에 찾아오면 여러 수강생들과 함께 케이크 특집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안내였다.
제 애인을 위해서 정말 맛있고 정성스러운 케이크를 만들고 싶어요. 원데이 클래스로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케이크 수업을 여러 번 듣고 싶은데 가능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