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스위트 홀리데이(4)
“얼른 먹여 주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요.”
한 여자 강습생이 말하자 주변에서 나도 그렇다며 동조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남편한테 비밀로 하느라 너무 힘들어요. 맨날 어디 가냐고 물어보는데 이제 핑계 댈 것도 없네요.”
“연습한 케이크 집에 가져가지도 못하고 셀프로 먹어 치우니까 살만 찌고요.”
“저도요! 저도 살쪘어요.”
수강생들이 앞다투어 말하자 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쿡쿡 웃었다. 주원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났다.
순식간에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맨날 뭔가를 고민하던 도혁, 갑작스럽게 살 오른 얼굴, 몰래 쳐다보던 핸드폰, 바닐라 향……. 나한테 케이크를 구워 주려고 했구나.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건가.
다시 보니 평소보다 뽀둥하게 살 오른 얼굴이 너무도 귀여웠다.
그래. 내 앞에 근사한 수제 케이크를 짠 하고 보여 주는 그날까지, 이 일은 모른 척해 줘야겠다. 주원은 굳게 결심하고 돌아섰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거리에는 캐럴 송이 울려 퍼지고, TV에서는 <나홀로 집에>가 방영되었다. 장 감독도 박 코치도 오늘만큼은 가족과 보내야겠다면서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 훈련을 하지 않기로 했다.
민석은 뛸 듯이 기뻐하며 혼자 여행을 떠났고, 규영은 소개팅 자리가 생겨 간만에 새 안경테를 맞추고 약속 장소로 갔다. 주원은 도혁이 집 데이트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도혁은 주원과 집에서 오붓하게 트리를 꾸미면서 놀고 싶다고 했다. 둘은 인터넷으로 미리 주문했던 트리와 각종 장식품 재료를 아슬아슬하게 배송받았다.
“이게 뭐야! 어떡해!”
“도혁아, 이거 전봇대 아니야?”
그런데 도혁이 사이즈를 잘못 보는 바람에 엄청나게 커다란 트리가 배송되어 왔다. 택배 상자가 지나치게 크다 싶을 때부터 불길했지만, 뜯어 보니 두 사람의 키와 맞먹을 정도로 커다란 트리 세트가 들어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 국가대표 펜싱 선수를 시켜도 될 만큼 트리는 길쭉길쭉하고 덩치도 좋았다.
“와, 우리 키 작았으면 조립도 못 했겠다.”
주원이 나무를 차곡차곡 끼워 맞추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잘못 골랐어요.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미안하긴. 제대로 분위기 나고 좋네, 뭐.”
주원이 씩 웃으며 트리를 똑바로 세웠다. 그러면서 도혁을 은근하게 관찰했다.
“방울 장식이랑 리본 좀 줘 봐.”
“여기요.”
도혁이 바닥에서 장식품들을 집어 주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주원은 트리를 꾸미면서 은근슬쩍 도혁의 표정을 살폈다.
케이크를 어디다 숨겨 놓았을까. 궁금한데?
지난번 미행했을 때 보고 들은 정보에 의하면 도혁은 오늘 최종 완성된 케이크를 집 안으로 들여왔을 것이다. 어제 오후 외출했다가 달달한 바닐라 향을 묻히고 밤늦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주원은 일부러 현관이나 주방 쪽에 얼씬도 않고 시치미를 뗐다. 도혁이 케이크를 잘 숨길 수 있도록 협조한 것이다.
“진짜 잘 만들었다, 우리.”
“괜찮지? 내가 보기에도 그래.”
“이제 별 달게요.”
도혁이 커다란 별 장식을 집어 트리 꼭대기에 매달았다.
“완성!”
분명히 한낮에 시작했는데 트리를 다 만들고 나니 저녁 6시였다. 창밖에 깜깜하게 어둠이 내린 줄도 모르고 트리에 푹 빠져 있었다니, 주원은 뻐근한 팔과 어깨를 스트레칭하며 트리를 감상했다.
“너무 예쁘다. 우리 트리 사진 찍어요.”
“응, 찍자.”
두 사람은 핸드폰으로 트리를 촬영하고, 그 앞에 나란히 앉아 얼굴을 맞대고 셀카를 찍기도 했다. 타이머를 맞춰 놓고 사진을 찍다가 도혁이 고개를 휙 돌려 키스하는 장면에 맞춰 셔터가 눌리기도 했다.
“이도혁, 너 고단수다.”
“그런가요?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도혁이 웃으며 주원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오늘 제가 요리하려고 이것저것 사 놨어요. 형이 좋아하는 스테이크 해 줄게요.”
“언제 준비했어?”
“몰래몰래 조금씩 준비했죠.”
도혁이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솜씨 발휘해 볼게요. 우리 형은 먹기만 해요.”
그러고는 정말 그 말에 맞춰 도혁은 화려한 요리 실력을 뽐냈다. 크림소스와 베이컨이 조화를 이룬 파스타,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스테이크의 맛이 환상적이었다. 거기에 적당하게 쌉싸름하고 그윽한 향의 와인까지 준비해 두었기에, 주원은 여느 레스토랑보다 더 만족스럽게 식사할 수 있었다.
“내가 애인 하나는 잘 뒀다.”
“당연한 이야길 하시네요.”
도혁이 눈썹을 까딱하며 주원의 와인 잔을 채워 주었다. 향이 좋은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이라 산뜻하면서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보글보글 시원하게 터지는 기포를 바라보다가, 주원은 문득 생각했다. 이전에도 잠시 했던 생각이지만, 도혁과 평생을 함께한다면 어떤 형식이 좋을지에 대해서.
내일도 모레도 도혁이랑 이렇게 지낸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려면 역시 우리 관계를 공고하게 만들어야겠지.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서서 타인들도 우릴 인정해 주고 또 끈끈하게 엮일 수 있도록.
…그럼 역시 결혼인가.
긴 생각의 끝은 결혼이었다. 아직은 도혁도 자신도 나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커리어를 쌓고 안정된 다음에 결혼을 하는 게 맞겠다 싶었지만, 일단은 결혼이 하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알파는 오메가와 결혼하는 확률이 가장 높았고, 드물게 베타와 짝을 이루었지만, 법률상으로 알파와 알파끼리도 결혼이 가능하긴 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원은 자신에게 배우자가 생긴다면 그건 무조건 도혁이리라 생각했다.
평생 도혁과 함께할 수 있다면. 남들도 도혁을 자신의 짝으로 여기고 인정해 준다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을 것 같았다.
잠깐, 그럼 집은 또 어디에 구하지? 그냥 여기를 신혼집으로 삼아야 돼? 아니야.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진천 가까운 곳도 괜찮고… 아니다. 나중에 도혁이나 나나 연맹에서 한 자리씩 차지할 텐데 그러려면 잠실이 낫지 않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주원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누구를 만나도 단 한 번도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굴러떨어진 스무 살짜리를 만나서 별생각을 다 하네.
“다 먹었어요?”
“응.”
“우리 그러면 어… 후식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도혁이 주원의 눈치를 봤다. 가만 보니 테이블을 정리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얘 지금 케이크 꺼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구나. 귀여워 미치겠네.
주원은 도혁을 꽉 깨물어 주고 싶었지만 잠시 그 마음을 내려놓고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래. 디저트 할 만한 거 있나?”
“있어요!”
도혁이 우렁차게 외쳤다. 주원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디저트가 있다고?”
“네. 기대하세요.”
도혁이 긴장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둘은 최근 냉장고를 양문형 대형 모델로 바꾸었는데, 이 모델의 특징은 야채칸이 굉장히 크고 넓다는 것이었다. 도혁은 바로 그 야채칸을 열고 새하얗고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저기 넣어 놨었구나. 그래서 내가 몰랐어.
“형… 이거 한번 볼래요.”
도혁이 천천히 걸어와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주원이었지만, 도혁의 기대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뭐야?”
“우리 사귀고 나서 첫 크리스마스잖아요. 특별한 걸 마련하고 싶었는데 뭐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케이크 만들었어요.”
“케이크?”
“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케이크요.”
“와… 대단하다. 나 정말 놀랐어. 너무 고마워. 최고야.”
주원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오버액션을 했다.
“아까워서 어떻게 먹어.”
“처음 만들어 본 거라서, 잘됐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먹어 봐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혁이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드디어 아담한 사이즈의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생크림이 깔끔하게 발려 있었으며, 시럽으로 코팅한 생딸기와 청포도가 깜찍함을 더했다. 거기에 D.H & J.W이라는 레터링이 고급스럽게 수를 놓은 모습에 주원은 진심으로 놀랐다.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네. 베이킹 선생님이 좀 도와주시긴 했지만, 스펀지도 제가 굽고 크림도 일일이 손으로 발랐어요. 한 다섯 시간 걸린 것 같은데.”
도혁이 해맑게 웃으며 주원을 바라보았다.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처음 만들어 봤다고 말했지만, 케이크는 이대로 베이커리 전문점에 진열해 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손재주가 좋은 건 알았지만 이런 재능이 또 있을 줄이야.
“이거 먹기 너무 아깝다. 사진으로 남겨 놔야겠어.”
주원이 하염없이 사진만 찍자, 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같이 나눠 먹어야 의미가 있죠.”
도혁이 상자 안에서 케이크 칼을 꺼내 주원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주원의 등 뒤로 다가와 그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꼭 웨딩 케이크를 함께 자르는 신혼부부처럼, 둘은 손을 겹치고 케이크를 커팅했다.
“간지럽다.”
“어디가요?”
“마음이.”
둘은 서로에게 케이크를 먹여 주었다. 달콤한 바닐라 향이 포인트가 되었다. 주원은 가슴속까지 사르르 녹일 듯한 크림의 맛에 감탄하며 순식간에 한 조각을 먹어 치웠다.
“우리 형, 잘 먹네.”
“너무 맛있어.”
주원이 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 도혁의 얼굴에 묻혔다.
“어? 형 유치해.”
그렇게 말하면서 도혁이 주원의 입가에 크림을 듬뿍 묻혔다. 곧장 달려들어 쪽쪽 빨아 먹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으아!”
도혁이 자신을 덮치자 주원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아, 간지러워! 이도혁!”
“형이 먼저 시작했거든요?”
“항복, 항복!”
좁은 주방 안에서 도망치는 주원을 끌어안으며 도혁은 기도했다.
산타 할아버지,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장난감 칼도 로봇도 다 필요 없고, 저에게는 형만 있으면 돼요.
다시 한번 산타 할아버지를 믿어 볼게요.
어느새 창밖으로는 굵직한 눈송이가 펑펑 내리고 있었다. 완벽하고, 새하얗고, 달콤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시작이었다.
스위트 홀리데이 외전 마침.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