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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107화 (1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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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 프로미스 인 미드나잇(1)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한 해가 다 끝난 기분이 든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도혁에게는 12월 26일부터가 진정으로 설레는 시기였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주원의 생일, 12월 31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형. 생일인데 우리끼리 축하 파티 해요.”

“연맹 회식 안 가려고?”

펜싱 연맹은 매년 말일마다 펜싱인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는데, 전현직 선수는 물론, 한국 체육회 이사와 별의별 요직에 있는 주요 인사들이 다 참여하는 만큼 그 의미가 컸다.

이번 올림픽에서 큰 성과를 낸 만큼 연맹은 사브르팀이 꼭 참석해 자리를 빛내 줄 것을 요청했고, 특히 주원에게는 기념사를 준비해 달라는 특별 주문까지 넣은 상태였다.

“아뇨. 가긴 가야죠. 대신에 적당한 시간에 빠져나와서 우리끼리 동해 가요.”

“동해?”

“같이 펜션 여행 가자고요. 일출도 보고.”

매년 12월 31일은 2차, 3차까지 회식을 따라가며 윗사람의 비위를 맞춰 왔던 주원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커다랗고 귀여운 애인과의 밀월여행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12월 31일은 연말연시라는 이름하에 묻히는 날짜였다. 이래저래 약속 잡기도 힘들었고, 사귀었던 사람들이 있을 때는 연맹 일을 우선시하느라 제대로 된 파티 한 번 열지 못했다.

“좋아. 가자.”

“진짜죠, 형? 약속한 거예요?”

도혁이 호들갑을 떨며 주원을 덮치듯 껴안았다.

“무거워.”

“우리 형 최고다. 너무 좋아.”

“나도 그래.”

“뭐라고요? 내가 너무 좋다고?”

“두 번은 말 안 해 줘.”

“으아, 제발 다시 말해 주세요. 나 잘 못 들었단 말이야. 제발!”

그게 12월 26일의 광경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도혁이 숙소를 예약했다고 알려 주었다.

“뭐야. 여기 비싼 데잖아.”

“아니에요. 그렇게 안 비싼데.”

강원도 동해시에서 가장 유명한 리조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숙소는 호화로운 5성급 시설에 투숙료가 비싸기로 유명했다. 리조트 투숙객은 바로 옆에 있는 스키장을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당일치기 스키 여행객은 받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러니 엄청나게 비쌀 수밖에 없었다.

“안 비싸긴. 여기 얼마인지 소문 다 났는데.”

“괜찮아요. 제가 냈으니까.”

“내가 돈 줄게.”

“네? 싫어요.”

“뭐가 싫어. 너 통장 구멍 났겠다.”

“아니거든요?”

도혁이 성을 냈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우리 형 거기 데려갈 만큼은 돼요. 내가 이번에 CF를 몇 개를 찍었는데.”

“아, 맞네.”

도혁은 최근 남성용 화장품, 그리고 스포츠웨어 브랜드 하나와 스마트워치 한 곳의 홍보 모델로 기용되었다. 둘 다 마케팅에 적극적인 곳이라 화보와 TV 방영 CF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주원 역시 라이벌 스포츠웨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혁이 받은 모델료가 짭짤할 것으로 예상은 됐다.

“내가 우리 형 호강시켜 주려고 CF 찍었다고요. 형 생일이니까 진짜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가지고요.”

“알았어. 군소리 없이 따라가서 실컷 즐기고 놀게. 됐지?”

“당연하죠! 약속의 의미로 뽀뽀.”

쪽. 주원이 도혁의 양 뺨을 붙잡고 뽀뽀했다. 도혁은 그제야 배부른 사람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주원의 품에 안겼다.

성별 막론하고 애인과 생일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요, 그걸 또 호화로운 리조트에서 보낼 줄은 몰랐다. 모르긴 몰라도 인생은 살아 보고 나서 평가할 일이었다. 주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며칠이 흘러 12월 31일이 되었다. 펜싱 연맹이 있는 잠실 근처의 특급 호텔, 연회장은 수많은 선수들과 관계자로 북적였다.

“맛있는 거 많다.”

“진짜요. 때깔도 좋아라.”

규영과 민석은 오랜만에 운동복을 벗어던지고 정장 차림으로 행사장을 찾았다. 규영이 뷔페 코너를 휩쓸어 접시를 알차게 채우는 동안 민석은 전속 사진사라도 된 것처럼 회장 내부를 카메라에 담았다.

“도혁이 넌 안 먹어?”

“저 곧 있으면 나가서 상패 받아야 돼서요.”

“아, 맞네. 주원이 형이 시상자고 네가 수상자지? 재미있어 정말.”

민석이 이야기하는 것은 펜싱 연맹에서 뽑은 ‘올해의 펜싱인’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주원은 일찌감치 대통령상을 받았기에 논외로 치고 에페의 진연후, 사브르의 이도혁을 놓고 내부 임원들끼리 각축을 벌였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도혁이 수상자로 최종 선정되어 오늘 트로피를 받기로 결정되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죠. 올해의 펜싱인 수상이 있겠습니다. 이도혁 선수, 단상으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단상으로 향하는 도혁의 등 뒤로 엄청난 박수갈채가 뒤따랐다. 그렇게 길지 않은 길이었지만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주목한다는 생각에, 국제 무대도 훌륭히 소화해 낸 도혁이었지만 유달리 긴장이 됐다.

“이도혁 선수님. 이리 가까이 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 네……!”

사회자가 도혁을 재촉했다. 곧이어 시상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시상자는 바로 주원이었다.

오늘도 너무 멋있다. 머리 저렇게 넘기니까 무슨 왕자님 같아……! 왕자님 애인이니까 나는 공주인가? 아닌데. 나는 이웃 나라 왕자?

잡생각을 하는 사이 주원이 성큼 다가왔다.

“작년도 수상자가 올해 수상자에게 상을 주는 셈이 되었네요. 멋집니다.”

사회자가 객석의 박수를 유도했다.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주원이 도혁에게 트로피를 건넸다. 도혁은 허리를 굽실굽실 숙여 가며 트로피를 받고, 연이어 전달되는 꽃다발을 한 아름 품에 안았다. 엄청나게 큰 꽃다발이었으나 도혁의 덩치가 커다란 탓에 몸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그럼 수상 소감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주원이 단상에서 내려가고, 무대에 도혁 혼자 남았다. 말을 유창하게 하고 싶어 대본을 준비해 왔으나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지 않고 목이 깔깔했다.

“아… 그게, 여러분.”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나의 벅찬 마음을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익숙해, 이런 자리에서는 어떻게 해야 제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도혁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도혁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고, 커다란 변화가 있던 한 해였다. 평생 꿈에 그리던 올림픽에 나간 것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승리해 문자 그대로 로마 땅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한 것도, 멋진 명승부를 기록으로 남긴 것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일평생 동경해 왔던 주원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온갖 역경을 디딘 후 마침내 주원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로소 도혁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너무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선수님이 말씀 대신 웃음으로 갈음하시네요.”

사회자의 말에 관중들이 소리 내 웃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혁이 느끼는 행복과 보람, 감동은 말 몇 마디로 정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 * *

주원과 도혁은 차를 가져왔단 핑계로 술을 마시지 않고 식사만 했다. 연회장 내 분위기가 무르익은 9시경이 되자 슬슬 강원도로 출발할 타이밍이 됐다 싶었다.

규영과 민석에게는 일이 있어 나간다고 하고, 장 감독과 박 코치와는 예의 바르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어차피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시 특훈인데 무슨 놈의 인사냐.”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요.”

“그래. 한 해 동안 수고 많았다.”

주원은 도혁을 데리고 맹효웅 회장에게 가 인사를 시켰다. 그는 주원의 기백에 흠뻑 반한 상태였고, 또 도혁이 획득해 온 메달이 흡족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태클을 걸지 않았다.

“우리 선수님들, 살펴 가시게.”

오히려 어떻게 해야 이들을 다음 올림픽까지 뛰게 할 수 있을지, 요새 맹효웅의 고민은 그것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할 사람들에게 다 인사했으니 이제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주원과 도혁은 비밀 여행이라도 떠나는 사람들처럼 신이 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빼서 도로로 나가 보니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만만찮았다. 어떻게 해서 10시 전에 고속도로를 탔지만, 강원도 방면 도로는 연말 여행을 떠나는 차로 가득했다.

“다들 내일 일출 보러 가나 봐.”

“저만 그 생각을 한 게 아닌가 봐요. 너무 막히네.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나도 일출 보러 가고 싶었는데.”

주원이 조수석에 앉은 도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혁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가 혼자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창밖을 보더니, 잠깐 정장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뭐지? 왜 저래. 딴생각에 푹 빠진 것 같은데……. 또 혼자 뭔가 생각하고 있구나. 뭔지는 몰라도 계획이 있나 본데.

이미 도혁과 지낸 시간이 꽤 되었기 때문에, 주원은 충분히 도혁의 정신세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도혁이 지금 골몰해 있는 그 ‘뭔가’는 아마도 주원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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