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프로미스 인 미드나잇(3)
혼자 낑낑대고 있는데, 도혁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형… 왜? 목말라요?”
“아니, 너 무거워서 깼다.”
“안 깔아뭉갰는데…….”
도혁이 주원의 이마에 쪽 하고 키스했다. 그러면서 또 팔을 들어 자신을 얽어매려 하기에, 주원은 잽싸게 그의 팔을 밀어냈다.
“왜요.”
“밖에 해 뜨려고 한다.”
“네? 진짜?”
도혁이 홱 몸을 돌려 등 뒤의 창문을 봤다. 하얗고 하늘하늘한 커튼 한 장만 드리워진 터라 창밖이 잘 내다보였다. 주원이 말한 대로 어두운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소원! 소원 빌어야 되는데.”
“일출 보면서 소원 빌게?”
“네. 저 준비해 놓은 게… 으아, 어디 갔지.”
도혁이 벌떡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옷을 빠르게 꿰입었다.
“형도 빨리 옷 입어요. 해 엄청 빨리 뜬다. 얼른!”
“알았어.”
주원도 캐리어에서 바지와 후드티를 찾아 입고 점퍼를 걸쳤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복도로 뛰어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로비로 내려오자 주원과 도혁처럼 일출을 보려는 목적인지, 제법 많은 가족과 커플들이 내려와 있었다.
“나가요!”
도혁이 주원의 손목을 잡고 뛰었다. 지난밤 격렬한 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체육인들답게 아침부터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가 가능했다.
도혁이 비싼 돈을 주고 리조트를 예약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리조트 뒷마당에서 연결되는 프라이빗 비치였다. 두 사람은 빠르게 뛰어 백사장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사위는 어둑어둑했지만, 하늘이 남색으로 물든 것이 희미하게 해가 떠오르려는 기미가 보였다.
“춥죠?”
도혁이 주원의 옷깃을 여며 주었다.
“괜찮아.”
“그래도 추울 것 같아. 여기, 내 주머니에 손 넣어요.”
도혁이 주원의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손가락끼리 얽히자 온기가 아스라이 피어올랐다.
“가만히 있으니까 더 춥네. 좀 걸을래요?”
“응. 그러자.”
도혁과 주원은 바닷가를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그러는 동안 느릿하게 하늘이 밝아 왔다.
“너랑 손잡고 있으니까 하나도 안 춥네.”
“정말요?”
“당연하지.”
주원이 웃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로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도혁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그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싶다.
만난 지는 이제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도혁은 주원에게 있어 커다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주원은 크리스마스 이후 치열하게 고민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땅히 주지 못한 것도 있었고, 또한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무얼 주면 좋을지 결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도혁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바쁜 와중에도 주원은 백화점을 몇 차례 오가고, 연후와 함께 남자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논의했다. 희우가 최근 남자친구에게 선물한 물건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했고.
고민 끝에 주원이 고른 것은 시계였다. 나의 시간을 너에게 주겠다, 우리의 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뜻을 담아서였다.
주원이 픽한 모델은 국내에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고, 어느 백화점에 물건이 있는지 조사하기도 어려웠다. 브랜드의 국내 본사에 문의해 서울 시내 어느 매장에 딱 두 개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원은 곧바로 차를 몰았다.
브랜드 매니저는 안 그래도 방금 한 개가 팔려 이제 단 한 개만이 남은 상태였다며, 주원더러 운이 좋다고 했다. 실물로 보니 고급스러우면서도 매니시한 디자인이 심플한 맛이 있었다. 이 시계를 놓치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주원은 생각했다.
‘어떤 분에게 선물하실 건가요?’
‘아주 소중한 사람이요.’
‘그럼 정말 잘 고르셨어요. 명품 중의 명품이거든요.’
매니저가 시계를 정성껏 포장해 주원에게 건네주었다. 그 이후로 어떻게, 어떤 타이밍에 전달할까 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는데 마침 도혁이 여행 이야기를 꺼내 준 덕분에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좋아. 여행지에 프러포즈하면서 시계를 줘야겠다. 주원은 그런 계획을 가지고 방금 호텔 방을 빠져나오는 와중에도 시계를 꼼꼼히 챙겼다.
둘이 백사장의 끄트머리에 도착했을 무렵, 주위가 조금씩 밝아 오더니 수평선에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해 떴어요!”
“소원 빌어야지?”
“네. 기도하려고요.”
도혁이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주원은 살짝 발을 들어 도혁의 뺨에 입 맞췄다. 도혁이 한쪽 눈을 뜨고 눈을 찡긋했다.
“우리 예쁜 주원아, 왜 이렇게 애교가 늘었어.”
“어쭈. 새해부터 반말이야.”
“네가 너무 예쁘니까 그렇지.”
도혁이 주원을 붙잡고 입술에 쪽쪽, 키스를 날렸다. 간지럽다고 벗어나려 하는 주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무슨 소원 빌었어요, 형?”
“나야 뭐…….”
“저는요. 형이랑 평생 같이 있고 싶다고 빌었어요.”
“나돈데. 우리 똑같은 소원 빌었네.”
주원이 도혁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그의 뺨을 쓸었다. 도혁은 순한 강아지처럼 그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도혁아.”
“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주원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시계 상자를 꺼냈다.
“어……?”
도혁의 눈이 커졌다. 주원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천천히 상자를 열어 눈부시게 빛나는 시계를 도혁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형.”
“도혁아, 손 줘 봐.”
주원이 도혁의 손목을 내밀게 해 시계를 천천히 채워 주었다.
“반지는 지난번에 줬었고, 뭐 할까 고민하다가 이걸로 골랐어.”
시계를 다 채워 주고 도혁을 보자, 도혁은 놀란 표정이었다.
“내 선물이 그렇게 감동적이야?”
내심 뿌듯한 기분으로 물었는데 도혁은 놀라도 너무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얼이 빠진 듯 보였다.
“아니, 저기……. 네, 저기… 엄청 감동받기는 했는데요.”
도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점퍼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익숙한 블랙 케이스에 주원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주원이 선물해 준 시계 브랜드의 시그니처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거…를 저도 준비했는데.”
곧이어 열린 상자에서 나온 물건에, 주원은 입을 떡 벌렸다. 도혁이 꺼낸 시계는 방금 전 주원이 도혁에게 선물해 준 것과 똑같았다. 비슷한 것도 아니고, 같은 라인도 아니고, 그냥 똑같은 것.
“세, 세상에. 우리 둘이 똑같은 걸 고른 거야?”
“저도 진짜 놀랐어요. 아… 어떡해. 이거 서울 시내에 딱 두 개 남았다고 해서 헐레벌떡 달려갔었는데.”
“내가 매장 가니까 방금 누가 하나 사 갔다더니… 그게 너였어?”
“내가 간발의 차로 빨랐나 보다.”
주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미미하게 올라오는 웃음은 감추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사랑하는 채주원. 같은 선물이지만 받아 줄 거지?”
“물을 필요도 없어.”
주원이 손목을 내밀자, 도혁이 웃으며 시계를 채워 주었다. 두 사람의 손목에서 같은 시계가 반짝였다.
“이거 그 이야기랑 똑같네.”
“무슨 이야기요?”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아, 그거는 똑같은 선물은 아니었나? 서로한테 필요한 거 사 주려고 뭐 파는 이야기였나……. 어쨌든 생각이 통했다는 점에선 비슷한 거 같아.”
도혁도 언젠가 부모님에게서 들어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형이랑 나랑 통했다.”
도혁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비는 소원도 똑같고, 선물도 똑같네요.”
도혁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너랑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
“나도 그래요. 사랑해요.”
“저기, 좀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데.”
주원은 지금이야말로 이야기를 꺼내기 적당한 타이밍임을 깨달았다. 서로를 향한 진심이 담긴 선물, 백사장을 수놓은 아름다운 일출, 춥지만 서로를 꼭 안아 줄 수 있는 체온. 그런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사랑하는 이도혁. 나랑 결혼해 줄래, 아니. 결혼하자.”
주원이 도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자, 도혁은 잠시 조각상처럼 굳었다.
“지금 저기… 뭐라고.”
도혁이 눈을 끔뻑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원으로서는 예상한 반응이었다. 도혁은 스무 살이고, 자신이라고 해 봤자 이제 겨우 스물세 살. 아니, 이제 한 살씩 더 먹었지만 어쨌든 어린 나이다. 결혼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올 수도 있었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거 알아. 넌 아직 대학교 1학년이고 스무… 스물한 살이고. 알파인 나랑 평생을 함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벅차게 다가올 수도 있어. 정식으로 부모님께 소개하고 사귀는 거랑 결혼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도 하고…….”
도혁을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에 주원은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이야기를 꺼내 놓으려 했다.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이 결심은 결코 장난이 아님을 다 낱낱이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나 진지해, 이도혁. 너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다.”
“아니, 저기. 형, 아니 주원아.”
도혁이 주원의 말허리를 잘랐다. 주원은 순간 긴장했다. 도혁의 얼굴이 유례없이 진지하게 굳어 있는 탓이었다.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