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프로미스 인 미드나잇(5)
좌로 우로 몸을 낮췄다가 세우며 자유자재로 슬로프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주원이 감탄했다.
보드깨나 탔다는 소리가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도혁은 보드의 에지를 이용해 활주한 다음 몸을 반 바퀴씩 돌리는 턴까지 선보였다. 체구에 비해 무척이나 민첩한 동작이었다.
나도 질 수 없지. 내가 누군데.
주원도 스키를 타고 슬로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거침없이 스피드를 붙이는 그의 모습에 주변에서 스키를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저 사람 스키 선수인가? 프로야?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주원이 순식간에 도혁을 따라잡았다. 한번 눈의 질감에 익숙해지자 스피드를 붙이기가 쉬웠다.
“형 최고!”
마침 턴 때문에 뒤돌아 있던 도혁이 손을 흔들었다.
“어어.”
슬로프 도착점에 거의 다 온 시점이었다. 도혁이 살짝 균형을 잃고 급정거하며 날을 세웠다.
“이도혁!”
주원이 놀란 마음에 급히 스키를 멈춰 세웠다.
“손 흔들면 안 되지. 안 다쳤어?”
“끙…….”
“이리 봐 봐.”
주원이 도혁의 옆에 앉았다. 도혁은 허리를 짚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앉았다.
“진짜 많이 다친 거 아니야? 어떡해?”
쪽.
도혁이 주원을 덥석 껴안으며 볼에 입술을 찍었다.
“야!”
“꾀병 좀 부려 봤어요.”
도혁이 주원의 뺨에 제 얼굴을 비볐다.
“하여간…….”
주원이 도혁을 흘기며 눈을 한 움큼 집어 흩뿌렸다.
“아! 차가워!”
“벌이다.”
“복수할 거예요.”
도혁이 장갑 낀 손으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야구공보다 더 크게 뭉친 눈을 주원의 옷 안에 넣겠다고, 도혁은 주원을 쓰러뜨렸다.
“아! 하지 마!”
“시원하게 해 줄게요.”
차가운 눈 뭉치가 목덜미에 닿자 주원이 바둥거렸다. 도혁은 또 뭐가 그리 좋은지 웃어 대다가 주원을 아예 깔아 눕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꼴불견 커플이었다.
“우리 간식 먹자.”
격렬하게 운동했더니 칼로리를 많이 소비했다. 슬로프를 세 번 왕복한 둘은 바로 휴게실로 향했다. 뜻을 모아 따뜻한 어묵탕을 시키고 거기에 커피, 알감자, 각종 분식류를 시켜 상을 푸짐하게 차렸다.
“식사네, 식사.”
“슬로프 몇 번 더 타면 다 꺼지게 돼 있어. 먹어.”
“그건 그래요.”
도혁이 주원에게 작은 붕어빵을 집어 먹여 주었다. 주원은 도혁의 앞접시에 탱글탱글한 어묵을 소복이 쌓아 주었다.
간식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어느덧 저녁 해가 질 무렵이 되었다. 방금 먹은 간식으로 체력이 회복되었는지, 도혁이 주원에게 보드를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형 왠지 잘할 것 같아요.”
“그래?”
“다리 근력도 좋고 균형 감각이 좋잖아. 몇 번만 자빠지면 무조건 잘 타게 돼 있어요.”
“자빠지는 건 필수야?”
“그건 솔직히, 네.”
“흠… 아프겠는데.”
망설이는 주원을 끌고 도혁은 장비를 교체하러 갔다. 보통 보드는 자기 신장에 비례한 길이로 타야 하기 때문에, 주원에게 맞는 보드도 꽤 길었다.
“일단 나 따라와 봐요. 나 일타강사야.”
“일타강사라니. 너 누구 가르쳐 본 적 있어?”
“어… 형이 첫 제자이긴 한데요.”
도혁이 눈을 굴리면서 주원을 살짝 비껴간 시선으로 보며 곤란해했다.
“그래도 안 다치게 제가 잘 가르칠 거예요. 우리 형 너무 소중하니까.”
“알았다, 알았어. 가자.”
“너무 좋아!”
신이 난 도혁이 주원을 끌고 초급자용 슬로프로 향했다. 처음은 얕은 경사에서 배워야 안전할 것 같다며, 주저앉아서 일어나는 법부터 가르쳤다.
“뒤에 중심 실으면 쭉 미끄러져 버려요. 그러니까 균형을 완만하게 잡아야 해요.”
“이렇게?”
주원이 보드를 짚고 일어났다.
“어? 일어났다! 와! 한 번에 일어났어!”
“이거 어려운 거야?”
“당연하죠. 보통은 뒤로 넘어지거나 앞으로 자빠져서 데굴데굴 구르거나, 아니면 아예 못 일어나는 경우도 다반사예요.”
과연 주변을 둘러보니 초보자들이 강사나 친구의 도움을 받고도 못 일어나고 있었다.
“일어나려면 근력이 아니라 균형 감각이 중요한 것 같은데?”
“맞아요. 이거 힘으로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우리 형 천재다.”
“내가 누군데. 허벅지로 전 세계를 제패한 남자야.”
“아, 그렇지. 맞아, 맞아.”
도혁이 장갑 낀 손으로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미끄러지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바닥 면이 아니라 날로 하는 거예요. 혹시 형 스케이트 타 봤어요?”
“타 봤지.”
“그때 에지 쓰잖아요. 여기도 이 날을 에지로 쓰는 거거든요. 자, 이렇게 하면 가고 이렇게 하면 멈춰요.”
도혁이 일어나 전진과 멈춤을 손수 보여 주었다. 주원은 그의 전신을 스캔하듯 유심히 관찰하더니 곧 동작을 따라 했다. 그러자 얼마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조금씩 미끄러졌다가 멈추는 게 가능해졌다.
“와! 형 앞으로 왔어! 대박.”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겠다.”
“진짜 잘하네. 자, 이제 조금 더 길게 갈 수 있겠어요? 저쪽 대각선으로 가는 거예요. 보드가 이렇게 직각이 되면 너무 빨라져서 위험하거든요. 최대한 비스듬하게 천천히 이동한다고 생각해요.”
“알았어.”
도혁이 주원이 가는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켜봐 주었다. 덕분에 주원은 손쉽게 주행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펜싱 선수 특유의 하체 근력과 균형 감각 덕분에 주원은 금세 보드에 익숙해졌다.
“잘한다, 형.”
“칭찬받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일타강사님.”
“우리 기념사진 한번 찍을까요?”
도혁은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도록 보드를 45도 틀고, 주원은 그 대칭으로 포즈를 취한 다음 보드를 내려다보는 사진을 찍었다. 도혁이 SNS에 사진을 올리자 순식간에 좋아요와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