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오로라 헌팅(2)
도혁이 주원의 어머니 눈치를 보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매력적인 어머니는 사모님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굉장히 냉정하고 도도해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그녀는 직접 요리를 해서 식탁에 보쌈과 순두부찌개를 내놓았다.
“우리 안사람이 음식 솜씨가 좋아요. 참고로 도혁 씨, 후식은 내가 만든 케이크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주원의 아버지가 멋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 집안 사람들, 생긴 거랑 성격이 따로 노는구나.
도혁은 주원 아버지가 구운 케이크를 무제한으로 받아먹으며 이제야 좀 주원을 이해할 것 같은 심경이 되었다. 차가운 것도, 냉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생긴 것뿐이었다.
* * *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그와 동시에,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 존재한다. 주원과 함께한 1년, 도혁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선후배 관계의 끝은 연인의 시작을 의미하였으며 연인의 끝은 또한, 부부라는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지금 나가요?”
“어. 조금 이따가 보자.”
“내가 데려다줄까요?”
“아니야. 저녁부터 이삿짐 쌀 생각 하면 체력 아껴야지.”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손보며 주원이 말했다.
“짐이야 업체에서 싸 줄 텐데요.”
“그래도 우리가 직접 케어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렇긴 하죠. 장비 같은 건 우리가 옮길 거고…….”
도혁이 어수선한 집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오늘 저녁부터 짐을 꾸려 내일 아침 일찍 이사를 나가기로 했다.
1월 1일의 결혼 약속을 토대로 두 사람은 차근히 예식과 신혼여행 준비에 돌입했다. 주원이 졸업하는 시기에 맞춰 식을 올리면 좋겠다는 양가의 뜻이 있었기에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안 그래도 3월 초가 주원의 오피스텔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라, 어차피 집은 옮겨야 했다. 마침 잘됐다며, 둘이서 살 곳을 찾아보자고 도혁이 발 벗고 나섰다. 후보지는 연맹 사무실이 가까운 잠실, 펜싱 스타디움이 있는 화성, 그리고 정든 K대 앞이었다.
부산 출신과 서초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곳 성북구 K대 앞을 각별히 아껴, 처음에는 이곳에 새 둥지를 틀려 했다. 실제로 도혁은 몇 차례 부동산에 들러 K대 옆 동네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훈련을 위해서라면 화성에 사는 게 더 편했고, 부모님을 찾아뵈려면 서초구가 나았다. 어디에 둥지를 틀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도혁은 드디어 마음에 드는 매물을 찾아냈다.
K대 오거리에서 차로 5분여 떨어진 곳에 미분양 아파트가 적당한 가격에 나와 있었다. 주원이 원래 가지고 있던 전세금이 꽤 컸기에, 두 사람이 올림픽 포상금으로 받은 돈까지 합치니 넉넉한 전세금이 나왔다.
“형! 우리 집이다, 우리 집.”
도혁은 멀리 이사 가지 않고서도 주원과 살 집이 생겼음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방은 두 개에 욕조 딸린 욕실이 있어, 주원과 목욕하기를 좋아하는 도혁의 욕심을 채우기에도 충분한 집이었다.
“이 집이구나.”
도혁이 주원을 새집에 데려가 구경시켜 준 날, 주원은 코끝이 찡했다.
여기가 우리의 새로운 피스트구나. 여기서 앞으로의 나날이 시작되는 거야.
주원이 마음에 들어 하는 티를 팍팍 냈기에, 도혁은 더욱더 뿌듯했다. 적당한 넓이의 이 집은 특히 채광이 장점이었다. 둘 다 밝게 지내는 걸 좋아했기에 딱이다 싶었다. 부동산을 끼고 공동 명의로 계약을 하니 드디어 새집에 입주한다는 기분이 실감 났다.
도혁과 주원은 밤새도록 짐을 쌌다. 함께 사용했던 욕실용품, 세탁 세제, 언젠가 같이 장을 봐 오면서 마트에서 샀던 슬리퍼를 챙기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형. 올림픽 끝나고 나 여기 처음 굴러들어 왔던 날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무슨 생각으로 나 받아 준 거예요? 내가 들어오면 웬만해선 안 나갈 느낌은 났을 거 아니에요.”
“음… 그랬지.”
주원이 상자 테이프를 뜯다 말고 회상에 잠겼다.
한번 집에 들이면 안 나갈 것 같은 이미지이긴 했다. 정확히 말하면 껌딱지가 되어 영원히 안 떨어질 것 같았달까.
하지만 그게 싫었냐고 하면… 답은 아니오였다. 안 나갈 걸 알면서도 집에 들였다.
“왜 웃어요?”
도혁의 물음에 주원은 대답 대신 쪽, 키스를 했다.
“어… 이럼 안 되는데? 우리 짐 싸야 하는데 유혹하는 거예요?”
“어, 맞아.”
“뭐?!”
도혁이 주원을 덮쳐 신나게 키스했다. 옮길 짐만큼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은 많았고, 추억은 짙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새집으로 옮겨 간다.
신혼집은 차로 불과 5분 거리였기 때문에 아침에 시작한 이사가 오전에 다 끝났다.
짐을 다 부린 후에는 또 다른 배송 기사가 왔다. 새로 구매한 침대였다. 가구점과 시간을 맞추어 배송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적당한 시간에 침대가 도착했다.
“드디어 킹사이즈!”
도혁의 염원이자 로망이었던 대형 침대가 안방에 들어섰다. 도혁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설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예. 잘 사세요.”
배송 기사가 나가고 집에 둘만이 남았다. 아무리 포장 이사라고는 해도 짐 상자를 풀어서 정리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이 두 사람에게 그게 뜻대로 될 리가 없었다. 도혁이 주원의 손목을 잡아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야, 짐 정리해야지.”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지금 급해요. 얼른 침대 사용해 봐야 한다고요.”
“대낮인데.”
“우리가 언제부터 시간 가렸다고.”
도혁이 주원을 널찍한 침대로 밀어 눕혔다.
“와, 진짜 넓네요.”
그동안 주원의 좁은 침대에서 이런 짓 저런 짓을 다 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한번 관계를 하면 침대가 부서지든지 주원이 부서지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이제는 우리 둘이 뒹굴어도 공간이 남는다며, 도혁이 만개하도록 웃으며 기뻐했다.
“넓어서 좋아?”
주원이 도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연하죠. 이제 형 불편한 일이 없을 거예요.”
도혁이 주원에게 장난스럽게 키스했다. 주원이 팔을 뻗어 도혁을 안고 몸을 굴렸다. 정말 데굴데굴 굴러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넉넉한 침대였다.
* * *
이제 남은 것은 결혼식 준비였다. 졸업식이 2월 26일, 식은 2월 27일에 올리면 좋겠다는 게 두 사람의 의견이었다. 둘은 우선 민석과 규영을 불러내기로 했다.
“어이, 오랜만.”
“형. 도혁이, 반갑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데이트 자리에 우릴 불러냈어? 그것도 이렇게 좋은 데로.”
민석이 한우 전문점 안을 훑으며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규영은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민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도혁이 더 멋있어졌네, 짜식. 정장까지 빼입고.”
“그러게. 둘 다 정장 입었네? 연맹이라도 다녀왔어?”
“응. 연맹 다녀왔어.”
실제로 식당에 도착하기 직전 연맹에 들러 회장과 임원진들에게 결혼 소식을 전한 두 사람이었다. 맹효웅은 뒷목을 잡고 잠깐 쓰러지는 시늉을 했으며, 장 감독과 박 코치는 헛웃음을 짓다가 어처구니가 없다고 난리를 쳤다. 그래도 잘 구워삶아 장 감독을 주례 자리에 세우는 데 성공했고, 도혁과 주원은 자신감을 얻은 채 학교 앞으로 돌아왔다.
“연맹은 뭐 하러 갔어?”
규영이 묻자 주원이 테이블 아래에서 조용히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거 돌리러.”
“이게 뭔데요, 형?”
“청첩장.”
“누구 거요? 혹시 희우 누나 결혼하나… 아니 잠시만, 형이 돌렸다고요?”
규영과 민석이 잠시 시선을 교환한 다음 헐, 소리를 냈다.
“설마!”
“나 도혁이랑 결혼한다. 축하해 줘.”
“풉!”
민석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규영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알 없는 안경을 매만졌다. 최근에 접한 소식들 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지, 진짜예요? 결혼한다고?”
“응. 결혼하게 됐어.”
“저랑 형이랑 결혼해요.”
도혁이 굳이 한마디를 보태며 수줍게 눈을 깔았다. 민석은 머리가 어지러워 벽에 몸을 기대었고, 그나마 정신이 있는 규영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니, 둘이 사귀는 건 알았는데 결혼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어린데 어떻게……. 아니, 어떻… 말도 안 돼.”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도혁이 배시시 웃었다.
“저도 안 믿깁니다, 형님.”
“실은 너희가 우리 식에 증인으로 와 주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부탁하려고 해.”
주원이 의젓하게 말했다.
“아니, 당연히 가는데. 와… 근데 어이가 없다. 갈게요, 가는데… 와! 막내랑 주장이랑 결혼이라니!”
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민석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결국에는 따라 웃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헤어진 다음, 도혁과 주원은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식까지 불과 몇십 일도 안 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식은 스몰 웨딩으로 간소하게 진행한다 쳐도 신혼여행이 큰 문제였다.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