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오로라 헌팅(3)
도혁은 씻고 나와서 식탁 의자에 앉아 웹서핑을 시작했다.
“신혼여행지… 오늘은 진짜 골라야 하는데.”
“우리 여행지?”
“네. 너무 고르기 힘들어요.”
“나도. 다 좋아 보여서 더 고르기 어렵더라.”
이런 면에 있어서는 의외로 도혁이 더 준비성이 좋고 주원은 아무 데나 좋다는 스타일이었으므로, 도혁이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이었다. 도혁은 며칠 전부터 온갖 여행사의 상품과 맞춤형 크루즈를 샅샅이 뒤지며 특별한 신혼여행을 기획 중이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회의 해요.”
“가족회의?”
“예비 신랑들이니까 가족이지. 이리 와서 내 옆에 누워요.”
“알았어.”
주원도 도혁의 옆자리에 앉아 같이 핸드폰 화면을 봤다. 뭘 봐도 주원 눈에는 다 똑같이 요란스럽고 화려했고 재미있어 보였다.
“우리 형, 밤하늘 좋아해요?”
“좋아하지.”
“노르웨이랑 아이슬란드 중에 골라야 하는데.”
도혁이 선택지를 내밀었다.
“오, 아이슬란드랑 노르웨이? 좋은데?”
“우리 추운 데로 가자고 약속했잖아요. 제가 신경 써서 골라 봤어요.”
도혁이 노르웨이의 인구, 수도, 문화부터 시작해 주요 음식과 관광지를 빠짐없이 설명했다.
“음…….”
“아이슬란드는 별거 없어요. 좀 황량하다고 해야 하나, 시내에도 맛집 이런 거 잘 없고. 근데 아이슬란드 오로라가 진짜 멋있대요.”
“오로라?”
“네. 밤하늘에 막 초록색 파란색 이렇게 휘리릭 지나가는 거요.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거.”
도혁이 오로라 사진을 찾아 보여 주었다. 하늘을 가득 물들인 빛무리가 너무도 아름다워,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너무 예쁘다. 난 여기 갈래.”
“아이슬란드가 나아요?”
“응. 여기로 하자.”
“오케이, 접수. 그런데 형…….”
도혁이 고개를 돌려 주원을 바라보았다.
“안 믿겨요.”
“뭐가?”
“내가 형이랑 신혼여행지 정하고 있다는 게. 신혼집 소파에 앉아서.”
주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지.”
“저 처음 봤을 때 첫인상 어땠어요? 귀엽다 아니면 멋지다?”
“음… 아니. 다짜고짜 토했던 게 기억나.”
솔직한 대답에 도혁이 속상한 티를 내며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아, 진짜 너무한다. 그거 내 흑역사인데.”
그때의 상황들이 또렷이 기억나는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린 도혁이었지만 주원은 그저 재밌기만 했다.
“난리도 아니었지, 나 붙잡고 막 토하는데… 그 와중에 전화번호 달라고 끼 부리고…….”
“그만, 그만 얘기해요.”
도혁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주원이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역시 넌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진짜 너무해.”
“그럼 도혁이는. 형 처음 봤을 때 어땠어.”
“TV로요? 아니면 실물로요?”
“후자 쪽.”
주원이라고 해서 그날의 첫인상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냥 자신을 동경했다는 도혁의 눈에 자신이 처음 잡혔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했다.
“아, 장난 아니었죠. 웬 남신이 걸어 들어오는데… 식당 안이 아주 환하게 빛나더라고요.”
“도혁아. 내가 물어봤지만 남신은 좀 민망하다.”
“아니, 진짜 남신 그 자체였다니까요? 그날 눈이 부셔 가지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응?”
도혁의 과장된 표현에 주원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읊조렸다.
널 만나서 다행이야.
날 좋아해 줘서 고마워.
* * *
주원 본인보다도 도혁이 더 손꼽아 기다린 졸업식이 다가왔다. 양가 부모님도, 도혁의 누나도 주원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그다음 날 있을 결혼식 때문에 조금 정신이 없긴 했지만, 자신의 가족과 도혁의 가족들이 건네는 축하까지 살뜰히 챙긴 주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올해 졸업생 대표는 채주원 학생입니다.”
졸업식이 열리는 대강당 안, 주원은 힘찬 박수를 들으며 단상에 올랐다. 졸업생 대표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주원은 적지 않게 놀랐고, 또 기뻐했다. 그리고 주원보다 더 신이 나서 사방팔방에 소문을 내고 다닌 게 도혁이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에다가 학교의 간판스타이니만큼 주원이 그 자리에 서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훌륭한 언변까지 갖추었기에 주원의 연설에 졸업식장 내의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정확히는 조금씩 눈시울을 붉혔고, 도혁이 엉엉 울었다.
“어라? 이도혁 선수 아닙니까. 지금 우네요.”
“찍자. 일단 찍어.”
취재차 나온 스포츠 신문 기자들이 도혁을 발견하고 셔터를 눌렀다. 도혁의 눈물은 주원의 연설에 대한 감동의 눈물에서 벅찬 기쁨의 눈물로 변해 있었다. 처음 시작은 연설이었지만, 단상에 서서 학사모를 쓴 주원은 너무나 멋있었고, 빛이 났다.
저 남자가 내 남편이 된다니……! 나만의 알파가 된다니. 세상에, 난 복 받았다.
도혁이 감개무량해 우는 줄도 모르고, 스포츠 신문 기자들은 하염없이 도혁의 모습만 찍었다.
“감사합니다. 이상 채주원이었습니다.”
주원이 인사를 마치고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도혁이 잽싸게 달려가 그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졸업 축하해요!”
“고마워.”
“펜싱부 주장 채 선배. 이렇게 부르는 것도 마지막이겠네요.”
도혁의 말에 주원이 싱긋 웃었다. 이제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하나뿐인 호칭이 생길 예정이었다.
바로 다음 날, 두 사람은 교외의 펜션에서 스몰 웨딩을 치렀다. 펜싱 연맹 사람들과 지인, 친구, 가까운 친척들만 초대한 비밀스러운 자리였다. 떠들썩하게 소문낼 필요가 없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물론 도혁 입장에서는 주원이 자신의 것이라는 징표를 원했으므로, 나중에 공개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
주례석에 선 장 감독은 누구보다도 뿌듯한 표정이었다.
“내 제자들끼리 사랑에 빠졌다니, 내가 시킨 건 아니지만 뿌듯합니다. 그럼 먼저 채주원 군에게 묻겠습니다. 배우자인 이도혁 군을 영원토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주원이 차분하게 대답하고 도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혁은 감격에 찬 눈빛으로 화답했다.
“그럼 또 물어보죠. 이도혁 군은 채주원 군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펜션 뜰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외치는 도혁 때문에 객석에서 한바탕 웃음이 피어났다. 주원은 행복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도혁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랑해.”
주원이 도혁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주례가 명하기도 전에 입을 맞춘 제자가 발칙하고 민망스러워, 장 감독은 고개를 돌렸다.
“요즘 애들이 이렇네요. 그래도 축하합시다.”
하객들이 앞다투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 * *
공항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펜션이었던 터라, 그대로 밤 비행기로 출국하기로 했다. 도혁과 주원은 부모님과 사돈댁에 인사드리고 희우와 연후, 민석과 규영을 배웅했다. 장 감독과 박 코치 맹 회장도 잊지 않았다.
웨딩카에 올라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얼굴만 쳐다봐도 재미가 있어 고개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 된 일인지 출국장에 기자들이 여럿 나와 있었다.
“이도혁 선수님!”
“채주원 선수님. 결혼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두 분 결혼식 하고 오시는 길, 맞습니까?”
갑작스럽게 쏟아진 플래시에 도혁과 주원은 화들짝 놀랐다.
“사실인가요, 루머인가요!”
흥분해서 묻는 기자에게, 주원은 차분하게 말했다.
“결혼했습니다. 전부 사실입니다.”
그 말을 뱉자마자 촤르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이 아웅다웅하며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몸싸움을 벌였다.
도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단 제 남편을 감싸고 봤다. 그는 자신과 주원의 결혼이 얼마나 큰 뉴스감인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단 저희 좀 갈게요!”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기자들이 두 갈래로 쫙 갈라졌다.
도혁은 주원을 챙겨 항공사 카운터까지 달려갔다. 펑펑 정신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달리는 사진은 둘이 비행기에 오르는 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후우, 너무 놀랐다.”
“괜찮아?”
“전 괜찮아요. 형이 놀랐을까 봐 그게 걱정이지.”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아, 도혁은 주원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젠가 닥칠 일이었어. 우리 예상보다 좀 빠르긴 했지만.”
“하긴. 우리 공표하기로 했으니까요.”
도혁이 주원의 손등에 입 맞추고,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낀 손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실감 안 나?”
“네. 꿈꾸는 것 같아요.”
“어, 그러면 큰일인데. 이제 우리 부부야.”
주원이 살짝 능글맞게 말하자 도혁이 좋다고 웃었다.
“꿈 아니고요?”
“나도 꿈같지만 이거 현실이야. 신혼여행 가는 길이잖아, 우리.”
“아, 소리 지르고 싶다. 일어나서 만세 삼창하고 싶어 미치겠어요. 그러면 안 되겠죠?”
“내 귀에만 살짝 대고 말해.”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나가며 이륙 준비를 시작했다. 도혁과 주원은 손을 꼭 잡은 채로 날아올랐다. 이제는 영영 놓지 않을 손이었다.
오직 쉼터. SHu 제작. 공금. 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