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8)화 (8/115)

8화.

“미쳤어?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이내 최대한 부드럽게 멀리 떨어져 있어라 요구했다. 그런데 뭔가…… 지선우가 이상했다.

“형. 선우 형.”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묘한 위화감에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지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너…….”

나는 알 수 있었다. 지선우의 에스퍼이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지선우는 내가 아는 그 지선우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 “안녕.” ]

사르르 접히는 눈웃음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그의 웃음이 맞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지선우의 웃음이 아니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누구야.”

잔뜩 흥분한 채로 가짜를 향해 다가가 손목을 잡아챘다. 말간 눈이 나를 올려다본다. 그조차도 지선우와 미묘하게 달라 마음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당장 지선우 몸속에서 나가. 형, 선우야. 지선우.”

내 가이드를 되찾고자 간절함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가짜의 반대편 손목을 잡아 오는 다른 손이 있었으니. 하얗고 길쭉한, 아주 예쁜 손. 은발. 빌어먹을 새끼가 어쩌면 나와 같은 불안함을 담은 눈빛으로 가짜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저 새끼는 왜. 의문을 갖기도 전에 놈이 먼저 선수를 쳐 입을 열었다.

[……거짓말.]

놈의 얼빠진 표정에 가짜 녀석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걸 본 은발이 무언가를 확신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 “아파.” ]

가짜가 양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와 놈, 둘 다 미동조차 없자 가짜가 한 번 더 단호히 얘기했다.

[ “아파, 자얀. 손을 놔.” ]

……이상한 일이다. 가짜가 쓰는 언어 역시 처음 듣는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해가 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누가 내 귀에다 자동 번역을 해 주고 있는 느낌?

[아리아.]

놈이 손목을 놓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 게…… 된 거야?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

은발의 말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를 보는 가짜의 표정으로 미루어 두 사람의 관계가 썩 나쁘지 않다는 걸, 아니, 어쩌면 특별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에게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인내심이 없으니까.

“야. 너 뭐야.”

나는 가짜의 뺨을 한 손으로 잡아 돌렸다. 뽀얗고 말캉한 살의 감촉은 늘 그랬듯 사랑스러웠지만, 안에 있는 게 지선우가 아닌 다른 녀석이라 생각하니 속이 들끓었다. 둘이 뭔 염병을 떨든 관심 없는데, 일단 지선우 몸에서는 나오고 하지 그래?

날 선 내 눈빛에도 가짜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웠다.

하, 이걸 확 쥐어박아 버려? 그러면 충격으로 지선우 몸에서 튕겨 나가지 않을까. 점점 험악해지는 내 분위기에 반응한 건 가짜가 아닌 은발이었다. 성큼 다가온 놈이 내 손목을 세게 쥐고 가짜의 얼굴에서 떼어 냈다.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있는 힘껏 힘을 준 놈의 표정은 사나웠다. 아까가 영역을 침범당한 우두머리 짐승 같았다면, 지금은 제 것이 희롱당한 수컷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주 불쾌하고 화가 난 기색. 놈은 나와 치고받고 싸울 때보다 훨씬 더 흥분하고 있었다.

[아리아에게 손대지 마. 이 애새끼야.]

놈이 으르렁거렸고,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일단 죽고 시작할래?”

내가 놈을 향해 또 한 번 능력을 쓰려던 찰나.

[ “둘 다 그만해.” ]

가짜가 껴들었다.

“닥쳐.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나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선우야. 네가 아니라.”

그대로 무시하고 공격하려던 나를 멈춰 세운 건 가짜의 그다음 말이었다.

[ “이 안에 있는 아이의 소망이기도 해. 정말 네가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기를 바라거든.” ]

“X발, 진짜 돌아 버리게 하네. 야. 잘 들어.”

어느새 나를 붙든 은발을 거칠게 밀쳐 내고 가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럼 네가 붙어 있는 몸뚱이의 원래 주인을 내가 어떻게, 얼마나, 어지간히 아끼는지도 알 거 아냐. 그런데 뭘 믿고 자꾸 도발을 하지?”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것들이 X발 장난하나. 억지로 끌어 올린 입가가 경련이 날 것 같았다. 분노로 인해 머리에서 삐- 경고음이 들려왔다.

당장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나를 봐서인지, 가짜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제 멱살을 쥔 내 손을 살포시 덮었다.

[ “화내기엔 아직 일러. 너와 이 아이에게 해 줄 이야기가 너무 많거든.” ]

목소리는 지선운데 말투는 전혀 다르다. 쾌활한 지선우와 달리 이 녀석은 마치 귀족 같은 말투를 사용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언젠가 해외로 파견을 나갔을 때 만났던 귀족들처럼 기품이 있고 우아했다. 그러면서도 서늘했고.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계속 얘기해 보라는 뜻으로 눈썹을 까딱였다.

[ “믿기지 않겠지만 이곳은 너와 이 아이가 살던 세계의 아주 먼 미래야. 같은 세계지만 다른 시간이지. ……이미 인류의 끝자락이 보이는.” ]

처음으로 가짜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당장 꺼질 촛불처럼 약하게 말이다.

* * *

가이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세상. 그게 지금 이곳이라고 얘기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렇게 표현했다. ‘인류는 한 번 멸망했었다’고.

확실히 언제부터라 얘기할 순 없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가이드’라는 존재가 먼저 사라졌으며, 그 후에 ‘에스퍼’라는 존재 역시 역사 속으로 지워졌다 한다. 당연한 순리다. 가이드가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에스퍼는 없으니까.

인간을 지키는 두 존재가 사라지자 괴물들은 기다렸다는 듯 인류를 집어삼켰고, 그로 인한 ‘인류 멸망’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몇백 년이 흘러 다시 과거의 에스퍼를 닮은 힘을 가진 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은발을 비롯한 머저리들.

그러나 몇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에스퍼에 대한 이해와 능력 활용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부족한 먹거리로 인해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없다는 것 등등. 모두 그렇다 쳐도 단 하나 넘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에스퍼’ 자체를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가이드’의 부재다.

괴물로부터 인류를 지켜 내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가이드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고대 서적을 읽을 수 있던 가짜, 오직 아리아 한 명뿐. 그렇기에 그녀는 역사에만 존재하던 신비한 힘 ‘가이드’를 찾아내려 노력했고, 결국 닿은 것이 시간을 넘는 금기의 술이었다.

[ “미안해, 정말. 사실 나도 이제야 주술이 발동될 줄 몰랐어.” ]

설명을 잇던 아리아가 쓰게 웃었다.

[ “너희들을 데려온 포털은 내 육체를 대가로 만들어 낸 거야.” ]

지선우의 몸으로 그녀가 내 뺨을 다정히 쓸었다.

[ “너와 이 아이에겐 끔찍한 일이겠지만…… 내겐 그런 방법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 여기 있는 에스퍼들은 당장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거든. 그럼 괴물은 고사하고, 우리끼리 서로를 죽이려 들겠지. 나는 내 가족들을 지켜야 했어, 내 사랑과.” ]

사랑이라는 부분에서 그녀의 눈이 은발에게로 향했다. 은발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 “거기다 시간의 흐름이 뒤틀려서, 내가 희생당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너희가 온 거라 자얀도 거칠게 대한 걸 거야. 그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내가 육체를 잃고 세계수가 된 후로 자얀은 조금 예민해졌거든.” ]

그녀는 주르르 얘기를 이어 갔다.

[ “동의 없이 너희들을 끌고 온 건 정말…… 다시 한번 사과할게. 미안해. 그래도 이해해 주면 안 될까? 내게는 정말로 너희가 필요했어. 선조 에스퍼의 강한 힘과 사라진 가이드의 힘이. 나를 위한 게 아니야. 인류를 위한 거야. 제발 나를, 우리를 도와줘.” ]

간절한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던 나는 계속 참았던 한마디를 꺼냈다.

“어쩌라고.”

동시에 내 뺨을 매만지는 손을 잡아 내렸다. 지선우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녀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으나 별다른 미안함은 들지 않았다. 사연을 줄줄 늘어놓는다고 내가 ‘그랬군요.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하고 도와줄 거라 믿었다면 그거야말로 너무 무책임하고 뻔뻔한 거 아닌가.

“네 말대로 동의 없이 끌고 와 놓고, 뭐? 이해를 해 줬으면 한다고?”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곤 혹시나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을까, 한 자 한 자 힘을 줘 속삭이듯 내 뜻을 전했다.

“꿈 깨.”

마치 모욕을 하듯, 비틀린 입꼬리가 내 모든 감정을 담아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따라 내 시선도 여러 번 움직였다. 새카맣고 맑은 눈동자는 지선우의 것이 맞았으나 평소와 달리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동정조차.

[ “그래. 이해되지 않을 거란 건 알아. 하지만 감정적으로만 구는 건 어리석은 거야. 잊었어? 여긴 너와 이 아이가 살던 세계의 미래야.” ]

“미래?”

그녀의 말을 따라 하며 손으로 입가를 느리게 문질렀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래……. 도대체 무슨 미래? 나는 그녀를 압박하듯 따져 물었다.

“나와 지선우가 살던 그 시절과는 너무나 먼 미래인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 상관없어. 어차피 남이야. 마음대로 사람 꼴 받게 납치해 놓고 구구절절 개 같은 사연 팔지 마. 너희가 어떻게 되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으니까. 왜. 이럴 줄은 몰랐나 봐?”

저기요. 무슨 만화 속 주인공처럼 희대의 영웅이라도 기대했나 본데, 착각하지 마세요. 왜 당신 정의를 나한테 들먹여요.

“그쪽, 대단치도 않은 몸뚱이 희생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네? 대답해 봐. 내가 왜 여기서 X발, 너흴 위해 X 빠지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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