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15)화 (15/115)

15화.

[ ‘너, 일단 사람 하나 죽여 줄래?’ ]

사람 하나 죽여 달라니. 역시 제정신 아닌 놈이었다. 나는 창고에 누운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는 기절한 듯 잠들어 있는 지선우가 있었다.

몇 분 전, 대화를 끝낸 가짜가 짧은 인사와 함께 사라지고 진짜 지선우가 돌아왔으나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기에 조용히 품에 안고 창고로 돌아왔다.

나는 손을 뻗어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미동도 없는 모습이 덜컥 불안함을 불러일으켰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가 춥지 않도록 내 몫의 낡은 천 쪼가리를 덮어 주는 것뿐이었다.

뤙 바오치호. 가짜가 말한 ‘사람 하나 죽여 줄래’의 ‘사람’을 맡고 있는 놈.

“동경.”

나는 동경의 패왕이라 불리는 남자를 작게 소리 내 중얼거렸다.

[ ‘서블과 척지고 있는 마을이야. 뭐, 라이벌이라 부르기엔 그쪽이 좀 많이 달리지. 거긴 세계수가 없거든. 깨끗한 물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 살기 팍팍해. 인원수도 서블보다 적고. 대신…… 뤙 바오치호가 있기에 위험해.’ ]

‘뤙 바오치호?’

[ ‘내가 말했지? 난 내 사람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그걸 위해선 뤙의 부재가 필요해. 녀석은 자얀을 노리고 있어. 정확히는, 서블을 흡수해서 몸집을 키우고 싶어 하지. 웃겨. 동경이 뒤떨어지는 건 거기서 무위도식하는 쓰레기들 때문인 걸 몰라. 뭐, 아무튼…… 자얀을 노리는 놈을 살려 둘 순 없어.’ ]

가짜는 심각한 표정으로 줄줄 말했다.

[ ‘동경은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해. 안 그래도 척박한 이 세계에서 살아남길 원한다면, 의식주 전에 경계해야 할 건 당연 적이지. 하지만…… 뤙은 강해. 인정하기 싫지만 자얀과 붙는다면 한쪽은 무조건 죽어. 난 그 50대 50에 자얀을 걸 수 없어.’ ]

‘…….’

[ ‘내겐 자얀이 꼭 필요한 사람이거든. 그러니 네가 가. 너는 할 수 있잖아. 뤙과 자얀보다 강하니까. 그렇게 내 불안을 하나씩 없애 주면 돼. 그로 인해 너와 이 아이가 무가치해진다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게. 약속해.’ ]

“……무가치.”

원래 세계에서는 어떻게든 가치 증명을 해야 했는데 이곳에선 오히려 무가치해져야 된다니 제법 웃겼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뤙 바오치호라는 놈을 죽이겠다고 수락을 하긴 했는데, 어떻게 지선우 몰래 할 수 있을까? 고민되는 건 그거 하나였다. 돌아가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걸 알게 되면 형은 무조건 반대할 테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렇게 되면 ‘나’는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

다시 떠올려도 가슴 한구석이 콕콕 아려 왔다.

“빨리 돌아가야 해.”

손을 뻗어 곤히 잠든 지선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형. 형이 사랑하는 건 나잖아. 그렇지?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지선우는 잠든 상태에서 건드리는 걸 싫어한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계속 불안하게 하니까, 이렇게라도 확인받고 싶었다. 굳게 닫힌 입술에 내 입술을 살포시 맞대고 눈을 감았다.

촉- 젖은 소리가 조용한 창고를 울렸다. 오랜만에 닿은 형의 입술이 너무 따뜻하고 달아서 눈가가 시큰해졌다.

“……지선우.”

쪽, 쪽, 짧은 버드 키스는 곧 짙은 탐욕이 섞여 깊고 집요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손은 그의 목과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혀는 끊임없이 입속을 헤집었다. 지선우가 무의식중에 으응, 목을 울렸다. 사랑스러운 신음이다.

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길게 이어진 은실이 창고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빛에 의해 반짝였다.

“나만 봐. 제발.”

꾹꾹 억눌렀던 소유욕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하, 자는 애 상대로 뭘 하는 거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지선우를 끌어안았다. 등을 느리게 토닥이며 그저 모든 일이 잘 풀리기만을 빌었다.

‘형이 날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어. 형이 나를 놓을 리가 없어. 형이 나를 버릴 리가 없어.’

“……돌아가자. 내가 더 잘할게.”

나는 점점 더 선명해지는 불안을 애써 부정했다.

* * *

가짜가 빙의하고 사라진 지 3일이 지났다. 그 말은 즉 쓸데없는 삼 일을 보냈다는 거다. 뤙을 죽이지도 못하고, 돌아갈 방법도 못 찾고.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번 빙의는 지선우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형은 본인에게 가짜가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아하하하!”

[으음, 선우는 의외로 호쾌해. 가끔 놀란다니까?]

“자얀 씨가 생각보다 좀생이 같은 거죠!”

[무슨 소리야? 내게 좀생이 같은 부분은 없어. 대목욕의 날에도 봤잖아?]

“으이구, 진짜!”

[아아, 아파. 아프다고, 선우.]

은발과 지선우의 사이가 전과 달리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X발, 내 앞에서 뭐 하는 거야.’

나를 제외하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지선우는 웃기지 말라며 은발의 팔뚝을 찰싹 때렸고, 놈은 배시시 웃으며 형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려 댔다.

“허?”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코웃음 쳤다. 그러면서도 찌질한 의심은 죽지 않고 살아나 계속해서 나를 괴롭혀 댔다.

‘벌써 감정이 공유돼 가고 있는 건가?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설마 점막 가이딩도 한 건 아니겠지. 불안해. 둘이 얼마나 가까워진 거지? 왜 저렇게 즐거워 보이는데.’

자꾸만 끔찍한 상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 탓에 늘 달고 다니던 위통이 또 시작된 것만 같았다. 쓰린 속에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답답한 숨이 터지고 마치 개미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서 있는 은발을 상상하고 말았다. ……변기를 부여잡고 토를 하고 싶어졌다.

“지선우!”

“그래서 핸드폰이란게 있, 아, 잠시만요. 응. 유성아, 왜?”

“나 피곤해.”

“아, 많이 시끄러웠어? 미안. 나가서 얘기할게.”

지선우의 대답에 나는 한쪽 눈가를 움찔하곤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둘이 나가서 무슨 얘길 하려고? 넌 여기가 아주 재밌나 보다? 아니, 저 새끼랑 있는 게 좋은 건가.

“가이딩.”

나는 돌아서려는 지선우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어?”

“가이딩해 달라고.”

“아…… 벌써?”

뭐? 나는 잘못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지선우도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됐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는 본인이 말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아…… 미안. 여기 사람들이랑 헷갈렸어. 하도 매일 해 달라고 졸라 대서…… 순번을 정해 뒀거든. 나도 꽤 피곤해서…….”

그러니까 지금 저 새끼들이랑 나를 같은 취급했다는 소리지? 네 진짜 에스퍼는 난데.

“…….”

“화났…… 어?”

“오늘 나랑 자.”

눈치를 살살 살피는 지선우를 향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뱉었다. 조금 울컥한 것도 있지만 그보단 우리 사이를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한 말이었다.

“어?”

“자자고, 오랜만에. 여기 와서 한 적 없잖아.”

지선우 역시 나랑 하는 걸 꽤 좋아하고, 성욕도 보기보다 있는 편이니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인 사이에 대놓고 구걸하는 게 조금 없어 보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뭐, 가끔은 이럴 수도 있는 거지.

“저 새끼 가면 나랑 시간 보내. 나 형이랑 하고 싶어.”

사실 나는 지선우가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다.

“……야, 그건 좀 그렇지.”

하지만 돌아온 건 난생처음 들어 보는 거절의 말이었다.

“뭐?”

믿을 수가 없어 나는 꽤나 형편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선우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한번 거절했다.

“그건 좀 아닌 거 같다고.”

그의 표정은 평소 가이드를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안달이 난 에스퍼 새끼들을 보던 내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발정 난 짐승 새끼를 흘겨보는 표정이었다.

‘지선우가 나를 거절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형의 ‘거절’로 가득 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왜?”

나는 약간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지선우의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토록 무섭던 적이 있던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괜히 서늘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어색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뭔지 모를 불안감이 마구잡이로 섞여 내 마음을 자비 없이 뭉그러뜨렸다. 일 초가 한 시간 같았다.

“아니, 하아…….”

머리를 짚으며 지선우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피곤하다, 귀찮다는 티를 내는 게 퍽 서운했다. 동시에 형의 태도에 귓가가 뜨거워졌다. 마치 막 성에 눈을 뜬 십 대나, 섹스에 눈이 돌아간 철부지 애새끼 같은 취급을 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우리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똑똑한 애가 왜 그래?”

“……나는 그런 거 상관없어. 형이 어떠냐고. 응? 하기 싫은 거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우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선우는 허리를 곧게 펴고 새끼손가락으로 눈썹을 긁적였다. 이내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유성아. 지금 그게 급해?”

지선우가 화를 꾹 참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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