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확실히 밤이 되니까 되게 쌀쌀하네……. 너 안 추워?”
“…….”
“무시냐?”
“…….”
“있잖아, 너희 말이야. 사이가 너무 안 좋아. 자얀도 자얀인데, 너도 그래. 그냥 웃어넘겨도 될 말들이면 좀 웃어넘겨. 으으, 나 화상 입는 줄 알았거든요? ……능력도 뤙이랑 비슷해 가지곤!”
“…….”
“내 말 듣고 있어? 낙유성, 유성아-”
“너.”
휙! 갑작스레 몸을 틀자 지선우가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꽤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는지 내 가슴팍 바로 앞에서 얼굴이 멈췄다. 그의 표정이 순간 어색해졌다.
“어, 어?”
올려다보는 까만 눈. 밤하늘, 달빛 아래 빛나는 하얀 피부. 어디로 보나 나의 지선우가 맞다. ……아니, 이젠 아니지.
“내 이름 부르지 마.”
뜬금없는 내 말에 지선우가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웠다.
“그럼 뭘로 불러.”
“야, 너, 저기, 많잖아.”
“웃긴 소리야. 이름을 두고 왜?”
“부르지 말라면 부르지 마.”
나는 숨을 한 번 고른 후 단호히 대꾸했다. 딱히 아까의 일로 화풀이하는 건 아니다. 지선우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길 바라는 건 진심이었으므로.
솔직히 지금 나는 약간의 방황을 하고 있다. 이미 ‘현대로 넘어가 형과 다시 한번 잘해 보자’라는 정해진 답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게 맞고, 그렇게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하루에 열두 번은 더 흔들렸다. 형이 밉다가, 이해가 됐다가, 또 원망을 하다가, 아무렴 어떠냐 싶어진다. 그게 점점 나를 미치게 했다. 그런 와중 날 잊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부를 때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면 가끔은 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지선우와의 관계라든지, 나의 삶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버텨야지, 버텨 내야지 다짐하는데 퍽 쉽지 않았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 자부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날이 나의 싫은 부분을 원치 않게 깨닫는 중이다.
그래서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선우는 그런 나를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싫어. 너 왜 나한테 화풀이해?”
우리는 달빛에 의지해 서로를 응시했다.
“화풀이 아냐.”
“거짓말하지 마. 너 나한테 가시 세우잖아.”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지선우도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는 나를 매섭게 쏘아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작은 머리로 뭘 그리 생각하는지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다. 시간이 길어지자 노기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그는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 껄끄러워하는 거 알아.”
“…….”
“모른 척하고 싶은데 너무 티를 내니까 나도 마냥 웃을 수가 없다, 야.”
“지선우.”
“아니, 내 말 들어.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전투에 도움이 안 돼서 그런 거야, 아니면 너희들에게 가이딩을 해 줄 수 없는 가이드라서 그런 거야? ……하,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얘기 좀 할게.”
지선우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실 나도 묻고 싶은 거 많아. 미안한데, 나 등신 천치 아냐. 자얀이 했던 모든 말을 믿고 너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뭐 어떡해?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어? 협회랑 연락할 수단도 없고, 당장 돌아갈 길도 모르는데!”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말이었다. 사실 그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 준 것도 아니니 이런 혼란스러움과 분노는 정당했다. 지선우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날 보더니 힘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에 걸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너희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알아. 특히 유성이 너.”
“난…….”
“네가 날 껄끄러워하는 것과 별개로 항상 날 챙겨 주잖아.”
지선우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멋쩍게 웃었다.
“널 보면 뤙이 생각나. 되게…… 음, 비슷하거든. 걔도 까칠한데 속정이 깊어. ……미안해. 너랑 뤙이 닮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유독 너한테 치대고 그랬나 봐.”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으음, 말하니까 알 것 같네. 낯선 사람이 거리낌 없이 달라붙으면 불쾌할 수 있지.”
흥분했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봤다. 선한 눈동자에 이기적인 내 모습이 담겼다.
“앞으론 적당히 눈치 있게 굴게. 함부로 다가가서 미안해. 산책 잘 마무리하고 돌아와.”
지선우가 몸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나를 집어삼켰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 쪽에서 밀어냈음에도 이상하게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겨우 그 정도로 나를 떼어 놓을 수 있구나. 나는 그게 안 돼서 이 지경이 됐는데. 감정을 그토록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거야? 내겐 너무 어려운데. 스스로 되돌아봐도 제정신으론 보이지 않는 트집이었다. 어쩌면 투정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게 저 사람에겐 저토록 쉬워 보이는 것이 너무도 배알이 꼴렸다.
‘늘 나만…….’
열 받아 죽겠다. 내 안에 억눌러 놨던 무언가가 팍하고 터지는 것 같았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으, 앗.”
멀어지는 지선우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바삐 움직인다.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을 보자 약간의 통쾌함을 느꼈다. 이 표현할 수 없는 나쁜 마음은 뭐라고 명명해야 할까?
“뭘 믿고?”
“유, 성아? 유, 유성아!”
“어떤 근거로?”
“이거 놔. 왜 그래.”
어색하게 웃고 있지만, 충분히 겁을 먹은 게 보인다. 겨우 이 정도의 압박으로 무서워할 거면서 뭘 믿고 나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는 건데? 내가 누군지도 전부 까맣게 잊어버린 주제에.
한 손으로 지선우의 양 손목을 틀어쥐어 내게서 벗어나려는 걸 가볍게 제압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병신처럼 졸졸 쫓아와?”
“야, 읏…… 아파, 놔줘.”
“체급도 밀려. 힘도 밀려. 그렇다고 네가 능력이라도 있어? 뭘 믿고 X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응? 네 잘난 짝도 없는데 뭘 믿고!”
내가 듣기에도 지선우에 대한 집착으로 범벅이 돼 있는 끔찍한 목소리였다. 지선우가 움찔 몸을 떤다.
“불러. 네 잘난 짝. 지금 당장 내 앞에 갖다 놓으라고. 웬 개새끼가 추접한 짓거리를 하려 한다, 그러니 와서 묵사발을 내 줘라 하고 전해. 뭐 해? 나 좀 두드려 패 놓으라 전하라고!”
“유성아…….”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눈가가 뜨끈해졌다. 윽박지르고 언성을 높이는데, 어째 하면 할수록 내 마음만 찢어져 나갔다. 나는 혀로 볼 한쪽을 꾹 누르다 픽 입꼬리를 올렸다.
“하, 그 새끼가 올 수나 있을 거 같아?”
말을 뱉을수록 내 속에 쌓인 음습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울컥울컥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너 왜 그, 래, 아윽…….”
지선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 손목은 부러질 테다.
“신경 쓰인단 말을 해? 네가 나한테?”
내가 어떻게, 어디까지 참고 있는데. 왜 그런 날 자극해? 지선우의 고통 어린 표정과 신음이 내 추악한 면을 자꾸만 건드렸다.
“……흐…… 아, 나, 나, 아프게, 할 거야?”
결국 지선우의 눈에서 얇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그의 눈물을 핥아 올리곤 답했다.
“어. 할 거야.”
작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 끝 방울방울 매달려 있던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나는 그의 젖은 뺨으로 입술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숨과 숨이 얽히고, 내 거친 입술이 지선우의 보드라운 입술로 막 찾아들 때쯤.
“……너 왜 안 피해.”
탁한 목소리가 내게서 흘러나왔다.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쥐고 있던 지선우의 손목을 놓았다.
“울 정도로 싫으면서 왜 안 피하냐고.”
“……흐, 으.”
“왜 욕도 안 해.”
지선우가 발갛게 부은 손목을 보이며 눈물을 꾹꾹 닦아 냈다.
“나 네 짝 아니잖아. 발로 까 버리지, 주먹으로 후려치지, 왜!”
내가 힘을 쓰면 반항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괜히 그를 탓했다. 혹시나 저 작은 마음 안에 내가 있는 걸까? 그래서 본능적으로 날 받아들이려 한 걸까? 같잖은 희망을 품은 채 지선우를 몰아붙였다.
울음만 터뜨리는 그에게 답해 보라며 윽박지르자 끅끅 숨을 고르던 지선우가 겨우 한마디를 뱉어 냈다. 마치 벼락처럼 내 머리를 쿵 치고 지나간 한마디. 썩어 빠진 정신머리가 단숨에 되돌아왔다.
“윽, 흐으…… 유성아, 도와줘…….”
하…… 하하, 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유성아, 도와줘.’
툭, 툭. 일그러진 입가를 타고 또 하나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머리가 차게 식어 간다. 왜 ‘뤙’도 아닌 ‘유성’을 찾는 거야. 어째서 다 잊어버린 나를 찾으며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는 건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너는 나를 잊었으면서, 내가 악인이 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구나.
이를 악문 입술의 틈새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너를 위협한 사람의 이름을 왜 부르냐며 따지고 싶은데,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서럽게 우는 지선우를 끌어안고 사과하는 게 전부였다.
“미안. 미안해,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 * *
그날 밤 이후, 다시 여행을 떠나는 길. 지선우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굴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내가 다가가면 깜짝 놀라거나, 작게 손을 떨거나 하는 반사적인 반응은 차마 숨기질 못했다. 아닌 척하지만 무서운 거다. 당연한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