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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34)화 (34/115)

34화.

‘낙유성. 나가 뒈져라, 제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당장 내 대가리를 총으로 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멀찍이 떨어져 지선우를 지켜 주는 것뿐이었다.

다가가면 혐오스러울 테니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어차피 이젠 다 X된 상황이다. 현대로 돌아가도 이런 개 같은 예비 성범죄자와는 엮이고 싶지 않겠지. 내 팔자를 내가 꼰 거다. 하소연할 자격도 없다. 감정에 휩쓸린 내 탓이다. 말 그대로 자업자득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나는 손질을 끝낸 괴물 시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은발이 했을 일이지만 이제는 내가 한다. 은발이 괴물 시체를 손질할 동안 나와 단둘이 남아 불안해할 지선우를 배려한 선택이었다. ……나라도 나 같은 새끼랑 둘이서만 있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역겨운 냄새를 폴폴 풍기는 시체 덩어리를 짊어지고 은발과 지선우가 있을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손질해 왔…….”

터덜터덜 걸어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다. 뭐지? 소변이라도 보러 간 건가? 두리번거리다 모닥불 옆, 누군가가 돌로 만들어 놓은 짧은 메시지를 발견했다.

“음식…… 기…… 다려 줘?”

이게 뭔 개소리야. 심각한 표정으로 돌멩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수풀 소리가 들리더니 한쪽에서 은발이 미간을 팍 찡그린 채 나왔다.

[젠장,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망할 꼬맹이는.]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놈은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욕설을 뱉어 냈다.

도대체 어딜 간 거야! 한시도 가만있지를 않네, 진짜! 심한 욕설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음식 기다려줘’라니. 이곳에서 괴물 말고 먹을 게 어디 있다고!

‘제발 무사해라, 제발!’

한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의 이름을 외쳐 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내 이름을 불러. 내가 아닌 그 새끼 이름이라도 좋아. 위치만 알려 주라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도대체 몇 시간을 뛰어다닌 거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같은 곳을 뱅뱅 도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나는 혹시 은발이 형을 발견하진 않았을까, 하는 작은 가능성을 떠올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하나의 커다란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으니.

‘이 길이 맞는 건가?’

내가 심한 길치라는 것 말이다.

역시 같은 곳을 돌고 있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나 보다. 형을 찾긴커녕 형이 날 찾아야 할 판국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 멍청함을 탓했다. 바로 그때, 오싹- 익숙한 듯 낯선 기운이 전신을 훑고 갔다.

‘……이거. 이, 느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갑자기 열린 던전과 보이지 않는 지선우를.

“……안 돼.”

그것만큼은 안 된다. 나는 오로지 감각에 의존한 채 던전을, 지선우를 찾기 위해 내달렸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던전의 입구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던전이라 보기에는 모습이 조금 달랐다.

내가 매일 내 집 드나들 듯 다녔던 던전의 연결 통로는 전부 포털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으로 날 끌고 왔던 붉은 포털처럼 말이다. 등급이 높든 낮든 그랬다. 실질적으로 만질 수 없는 ‘문’.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아공간’이 던전의 내부다.

이곳에 와서 계속 클리어했던 다른 던전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바닥에 붙은 거대한 두 개의 철문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으론 던전이 분명한데…….’

나는 홀린 듯 문을 쳐다봤다. 중앙에는 기묘한 무늬가 새겨져 있고, 곳곳에 이끼가 껴 녹이 슨……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문이다. 다만 그 너머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오래전, 재앙급 몬스터를 잡았을 때와는 다른 긴장감이 둥둥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이건 긴장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서워? 내가?’

문득 깨달은 사실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내려다본 손이 잘게 떨린다. 겁을 먹은 거다. 문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존재’에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오히려 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철문을 잡아 열었다.

끼이익- 낡고 음침한 소리와 함께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직접 만질 수 있는 입구라니. 어쩌면 이건 던전이라기보단 고대 유적이 아닐까.

텅, 텅, 텅!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반쯤 내려왔을 즘, 머리 위 유일한 빛이던 하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철문이 저절로 닫힌 거다.

젠장, 어두워. 나는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침착한 척 불꽃을 만들어 냈다. 화르르! 손안에서 일렁이며 나타난 작은 불꽃에 의지해 지선우를 찾고자 걸음을 재촉했다.

“…….”

주위는 습했고 또 묘한 냄새가 풍겼다. 마른 꽃, 법당의 향초, 젖은 흙, 긴 역사를 가진 도서관 등등. 어디선가 맡아 봤을 법한 냄새들이 한데 섞여 나왔다. 그건 아주 은은하면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풍겼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간 안, 내 발소리만 터벅터벅 들려왔다. 기분 탓일까? 내가 만든 불꽃이 점점 빛을 잃어 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어둠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조금 더…….’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가는 방향이 정확한지 알기 위해 손안에 만들어 두었던 불꽃의 크기를 더욱 크게 키웠다. 움츠러들던 불꽃은 내 힘을 원동력 삼아 덩치를 더욱 크게 부풀렸다. 이젠 저 멀리까지 볼 수가 있-

“……!”

손끝부터 시작해 몸을 간지럽히듯 훅 올라오는 소름.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감각.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걸음을 멈추자 바로 앞, 새카만 구가 황금빛 띠에 둘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주변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뭐지?’

보고 있으면 꼭 빨려들어 갈 것처럼 깊은 아름다움을 지닌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크기가 컸다. 사방을 움직이던 그것이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아…….’

너무나 거대해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건 ‘눈’이었다.

“…….”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내 몸이 땀으로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어째선지 저 눈과 계속 마주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당장 지선우를 내놓으라 소리쳐야 하는데, 겨우 숨을 고르는 게 전부였다.

커다란 괴물을 본 적이 없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몸집이 큰 놈들은 매번 나타났고, 그것들에게 겁을 먹은 적은 결단코 없었다. 재앙급 몬스터와 전투를 벌일 때도 오히려 ‘크기가 크니 명중률이 올라가네’ 따위나 생각했지, 지금처럼 압도당한 적은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아직 싸워 보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저건 내가 그동안 상대해 온 것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저건 감히 몬스터라 이름 붙일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저것의 앞에서 나는 개미다. 만약 저것이 나를 불쾌히 여겨 밟아 죽이겠다 하면 나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

턱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도망칠까? 태어나 처음 달아날 궁리를 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생일대의 굴욕이었으나 그만큼 확실한 패배가 읽혔다. 먹어 본 자만이 맛을 안다고, 무수히 많은 전투를 해 왔던 나였기에 알 수 있는 예감이었다.

‘저건……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야.’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윙윙 울려 댔다. 도망쳐. 달아나. 뒤도 돌아보지 마. 잡아먹힐 거야.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나는 혀를 강하게 깨물며 머릿속을 지배한 두려움을 쫓아내야 했다.

나는 에스퍼다.

나는 에스퍼다.

나는 에스퍼다.

‘에스퍼는 가이드를 지키는 역할이다.’

고로 나는 싸워야 했고, 물러서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되찾기 위해 되지도 않는 송곳니를 드러내 ‘절대적 존재’에게 강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란 말이다.

“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막 말을 뱉으려는데, 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닮았군.」

「하나, 그놈이 아니구나.」

「너.」

「그놈보다 약해.」

겨우 네 마디. 네 마디로 놈에게 대항하려던 의지가 반이나 깎여 나갔다.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무너지게 만드는 존재가 가히 몇이나 있을까. 그동안 나를 마주했던 괴물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놈의 후예라 해도 믿겠군.」

황금빛의 눈동자가 사라지고 짧은 어둠이 내려앉은 찰나, 폭풍이 불었다.

휘이잉!

큭, 팔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참았다. 귀가 먹먹해지고, 몸이 휘청일 정도의 거센 바람이 지나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신화. 표현을 하자면 그랬다. 마치 신화 속 어느 한 장소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광경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웠다. 탁한 하늘 아래, 부서지는 태양의 빛줄기가 둥둥 떠다녔다. 푸른색과 회색이 오묘하게 섞인 물감 위로 금박을 뿌린 듯했다. 구름은 투명했고, 대지는 드넓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던 중 우뚝 서 있는 괘종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제일 밝은 태양 아래 자리 잡은 그것은 매우 커다랬고 또 오래돼 보였다.

홀린 듯 괘종시계를 향해 다가가자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파가 내게 준 보물. 건방지게 네가 손댈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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