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39)화 (39/115)

39화.

“뭐?”

“각인이 깨졌다면 부작용이 있을 거 아냐. 없었어? 가만있어 봐. 쓰흐- 내가 가지고 온 약이…… 뭐 있지? 에스퍼 전용 안정제가 있던가.”

“야.”

“괜찮아, 안 써, 안 써! 물로 꼴딱 삼키면 돼!”

이게 지금 내가 약 먹기 싫어서 그러는 걸로 보이나. 왜 자기가 짜증이지?

“이상하다. 분명 형이 준 거 챙겼는데.”

중얼거리는 놈의 등짝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 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너 나한테 물어봐야 할 게 또 있지 않냐? 여기가 어디인지. 아까 그 괴물은 무엇인지. 하다못해 각인이 깨진 이유라도 물어야 하는 거 아냐?’

도대체 지금 내 부작용이 왜 중요한데. 분명 쟤가 이상하고 내가 정상인데. 저 새끼 하는 꼴을 보자면 쟤가 정상이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야.”

“어? 엄마 차 키가 왜 여기 있어. 아하, 저거…… 씁, 아니네. 어딨지?”

“야!”

“기다려 봐. 금방 찾아.”

등 위로 발을 척 올리며 불러도 놈은 엉덩이를 한 번 들썩이는 걸로 반응을 끝냈다.

누가 지금 약 찾아 달랬나? 내가 어지간해선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닌데, 이 새끼한텐 그게 적용되지 않았다. 악에 받쳐서라도 당장 멱살을 잡아 올려 구구절절 모든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이 X발 귓구멍 열고 내 말 좀 들어라. 버럭버럭 화를 내려고 했는데, 가방을 뒤적거리던 놈이 문득 말을 뱉었다.

“여기 얼마나 있었냐.”

팔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게 보였다.

“아까 같은 일은 몇 번이나 있었고.”

이를 악문 것 같은 목소리였다.

“밥은, 어떻게 했는데.”

하, 짧은 웃음을 끝으로 송여환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의 침묵 후 놈의 등이 크게 들썩였다. 꽤나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 같은데, 뒤돌아 있기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제야 널 찾았고?”

놈이 이상한 말을 한다. 물론 나랑 지선우가 실종 처리가 된 지 오래라면 협회의 부탁으로 송여환 역시 우리를 찾아다녔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놈이 날 찾을 이유는 없지 않나? 지선우라면 모를까.

나는 송여환의 등을 보다 뒤늦게 물었어야 했던 것들을 질문했다.

“나랑 지선우가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냐?”

돌아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라진 적 없어. 난 3일 전에 널 만났으니까. 성구 사거리에 A급 던전이 무더기로 열린 날 말이야. 기억 안 나? 우리 팀이 너 백업했잖아.”

3일? 말도 안 된다. 이곳에서 아무리 못해도 두 달 이상의 시간은 흘렀을 텐데. 하지만 뒤를 돈 송여환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이쪽이야말로 다시 한번 물을게.”

“…….”

“낙유성, 너 여기 얼마나 있었던 거야.”

……나는 놈의 태도를 보고 확신했다. 이쪽과 저쪽의 시간 흐름이 굉장히 다르다는 걸.

그 뒤로 나와 송여환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를 여럿 주고받았다. 나는 주로 어떻게 이곳으로 넘어왔는지,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따위를 물었고, 놈은 참 지조 있게도 내 상태와 지선우의 태도에 대해서만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게 왜 궁금한지 의문이 들었으나 기브 앤 테이크를 외치는 놈 때문에 나는 썩은 표정으로 ‘형이 크게 다쳐서 각인이 깨졌는데, 후유증인지 나에 대한 기억만 쏙 잊었으며 이상한 외국인 불법 체류자랑 짝인 줄 알고 있다’라고 대충 둘러댔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당장 돌아갈 수 없다 말했으나 놈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기에 나는 슬쩍 겁을 줘 봤다.

“한동안은 여기서 같이 먹고 자야 한다고. 집에 못 간다는 말인데.”

“……같이?”

멍청한 놈이 그제야 얼굴을 딱딱히 굳힌다.

“너랑, 같, 같이? 식사하고 자, 자자자, 자고, 자? ……헉, 씻어-?!”

그래,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나랑.

“어.”

“그, 얼마나?”

놈이 침을 꿀꺽 삼키곤 비장하게 물어본다. ……이거 진짜 돌대가린가?

“모르지.”

심드렁히 대꾸하자 송여환이 바닥을 쳐다보며 무섭게 중얼중얼 혼잣말을 해 대기 시작했다.

“잠자는 얼굴, 씻는 거, 모닝 인사까지? 뭐야, 이거…… 포상?”

X발, 왜 저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무슨 주문처럼 외는 모습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놈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지려던 찰나, 바위 뒤에서 머뭇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저기…….”

지선우였다.

“나, 가도 돼……?”

잔뜩 졸아든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아마 방금 전 송여환의 거친 행동 때문인 듯싶었다. 괜찮다고 해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아직 녀석의 파장이 불안정했다. 혹시나 지선우를 향해 또 사나운 모습을 보일까, 내가 먼저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아앗! 형니임~ 제가 아깐 너무 무례했죠?”

미친. 경악스러움에 구토가 일었다. 나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로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는 놈. 송여환의 머리와 엉덩이로 짐승의 귀와 꼬리가 살랑살랑 보이는 듯했다. 하긴 저 새낀 언제나 나를 제외한 사람에게 저 지랄을 떨어 댔다. 보기 X같게도.

“여환아, 이제 나 기…… 기억해?”

“네에? 형님! 제가 형님을 기억 못 할 리가요. 아깐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이해하시죠?”

“뭣, 뭐야아! 나 진짜 놀랐다고!”

지선우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나타났다. 그러곤 정말 속상했는지 송여환에게 장난스러운 주먹질을 해 대더니 이내 둘은 손을 마주 잡고 콩콩 뛰기 시작했다. 지선우야 워낙 조그맣기도 하고 앙증맞아 잘 어울리는데, 송여환 저 새끼가 떠는 애교는 정말 못 봐 주겠다.

나는 불쾌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은발이 형에게 개수작을 부릴 때와는 다른 분노가 치밀었다. 놈의 애교는 정말 살인 애교였다. 내 안에 잠재된 악랄함을 일깨웠으니까.

[흐응…….]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은발이 목을 울리며 송여환의 환장 애교 쇼를 보고 있었다.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주시하던 놈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러니까용. 혀엉!”

[으음- 아무리 봐도 애교는 내 쪽이 더 잘 부리는 것 같군. 아리아가 껌뻑 죽는 필살 애교가 있지. 보고 싶지 않나, 도련님?]

은발이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내게 윙크했다. ……둘 다 X같다는 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그냥 다 닥치고 꺼졌으면 좋겠다.

* * *

개똥도 약에 쓴다고, 썩 도움이 안 될 것이라 여겼던 송여환도 요긴한 쓸모가 있었다. 바로 놈이 가지고 온 가방. 그 안에 있는 각종 식품, 생필품, 여벌의 옷 덕에 말이다.

물론 넉넉하지는 않아 아껴야 했지만 당장의 불편함을 해소하기엔 충분했다. 특히 나와 은발은 드디어 아랫도리를 가릴 수 있는 바지를 얻었고, 몸집이 작은 지선우는 큰 티셔츠와 남은 드로어즈를 입는 걸로 합의를 봤다.

거기다, 제일 기대가 되는 게 있었으니. 바로…… 보글보글, 뜨거운 김을 뿜으며 끓고 있는 익숙한 음식이다.

“…….”

“라면 어디 안 도망가.”

쭈그려 앉아 라면을 끓이던 송여환이 나를 보곤 씩 웃는다.

“……별로.”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분명 굶주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오랜만에 맡은 자극적이고 매콤한 냄새에 절로 침이 고였다. 나도 모르게 배를 만지작거렸다. 창피한 줄 모르고 자꾸만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보글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머릿속에 오로지 라면 생각만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만약 송여환이 라면을 들이밀며 개처럼 짖어야 겨우 한 젓가락을 준다고 낄낄거려도 거절할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야, 야.”

말없이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자니 송여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씹, 진짜 짖으라 그러면 무슨 견종으로 짖지. 약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 해.”

“뭐?”

“빨리 아앙~ 해. 두 사람 오기 전에.”

“……?”

“억! 컥, 야, 야. 감히 멱살? 라면 떨궈? 떨군다?”

……그건 곤란하지. 내가 멈칫하자 놈이 코를 벌렁거리며 입술을 꽉 깨문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진짜 한 대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너무 먹고 싶다.

“아~ 해, 빨리.”

“…….”

“배고프잖아.”

“……내가 먹을 테니 줘.”

“안 돼. 그럼 너만 몰래 먹은 나쁜 새끼 되는 거잖아. 내가 먹여 줘야 공범이지.”

아무래도 날 놀리는 데 단단히 재미가 든 모양이다. 하긴 이 새낀 예전부터 어떻게든 날 엿 먹이고 싶어 했다. 뻔히 알면서 당해 주고 싶진 않았지만, 라면이라는 유혹이 너무 강했다.

결국 나는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놈이 주는 라면을 받아먹었다.

* * *

‘고자극. 뭔 먹는 모습까지 예쁘지?’

송여환은 솟아나려는 아들내미를 잠재우느라 죽을 맛이었다. 겨우 좋아하는 사람이 라면 받아먹는 걸로 흥분하는 개쌉변태쓰레기가 있다? 맞다. 그게 자신이다. 그는 아예 하늘을 향해 당당히 외치고 싶었다. ‘저는 낙유성이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봐도 아랫도리를 세우고 자지러지는 변태입니다!’ 하고 말이다.

……오랜 기간 좋아하는 상대에게 햄스터 고환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 이렇게 된다. 아무튼, 이런 자극적인 장면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다니!

‘조난 감사.’

낙유성이 안다면 당장 목을 따 버릴 생각을 하며 송여환은 실실 웃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과 반대로 라면을 후루룩 먹는 낙유성의 몰골이 너무 안쓰러워 보여 마음 한쪽이 찡 아렸다. 천하의 낙유성이 제가 주는 걸 고분고분 받아먹는다는 게 짜릿한 만족감을 가져왔으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굶었던 거지?’ 싶어 속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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