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49)화 (49/115)

49화.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 같은 꼴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마 주제도 모르고 잘난 척 ‘청승 떨지 마, 등신 새끼’라 비웃어 댔겠지. 제발, 너나 잘해라. 제발.

“……모자란 새끼야.”

나는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며 중얼거렸다.

지선우. 이젠 그 이름만 떠올려도 심장이 덜컥인다. 형은 내게 참 독하다. 아니, 독한 건 현실인가? 그를 충분히 미워할 시간이 필요한데, 현실은 너무 빠르게 나를 재촉한다.

“하, 씹…….”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긴 숨을 뱉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다. 그때, 내 꼴을 가만히 보던 은발이 픽 웃으며 다가왔다.

[이런……. 우리 도련님의 상심이 매우 큰 것 같아 내가 다 마음이 아프군.]

나긋한 목소리를 끝으로 놈이 내 턱을 휙 잡아 올렸다. 억지로 마주하게 된 놈의 물빛 눈동자가 유독 밝게 반짝였다. 그러나 보석 같은 눈동자는 아름답다기보단 무언가 섬뜩하고 차가웠다.

[어리광은 부릴 만큼 부렸어?]

“…….”

[아, 참고로 난 야마가 돌기 직전이야.]

놈의 손을 쳐 내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현재 나조차 내릴 수 없는 당장의 선택을 놈이 내려 주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선우를 만나 후회한다 해도 그 후회의 핑계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한마디로, 두 번째 책임 전가였다. 그리고 놈은 기꺼이 나 대신 선택을 내렸다.

[가야지.]

“…….”

[너와 나의 전부를 찾으러.]

* * *

“여기에 선우 형이 있다는 거지?”

송여환이 주위를 훑으며 말했다.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 꼭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성의가 없었다. 돌아가기 위해 지선우를 찾으러 가야 한단 내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어깨를 으쓱인 놈다웠다. 은발 역시 딱히 긴장한 얼굴은 아니고.

아무래도 각오를 다지고 들어온 건 나 하나인 것 같다.

“…….”

동경의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의심스러웠다. 나는 앞서 걷는 두 놈의 뒤를 따르며 느릿하게 주변을 훑었다.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건 아마 착각이 아닐 테다.

‘왜 아무도 없는 거지?’

경비를 서는 경비병도, 나가라 소리치는 마을의 주민도 없었다. 분명 마을 입구에 발이 닿자마자 죽창이라도 날아오리라 예상했는데 말이다.

‘가짜가 뤙을 죽였고, 은발과 내가 도망을 갔으니 이들에겐 우리가 머리털 한 올마저 지워 버리고 싶은 원수일 텐데.’

거기다 은근히 맡아지는, 코를 찌르는 익숙한 비린내. 눅눅하고 역한 냄새는 내게 퍽 익숙한 것이었다.

‘피 냄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 가지를 확신했다. 이곳에선 틀림없이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꽤 많이. 아니, 어쩌면 전부.

육감이 경고를 알렸다. 동시에 손끝과 발끝에서 작은 전율이 일었다. 찌르르하게 울리는 감각이 소름 끼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둥둥 시끄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많은 싸움을 겪어온 탓에 몸이 알아서 곧 일어날 전투를 대비하는 거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침을 삼키며 찬 숨을 뱉어 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지선우에 대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다면 오히려 좋은 거다. 생각을 갈무리한 후 은발과 송여환에게 긴장하라고 알리려던 때였다.

“허억!”

[……?!]

둘의 모습이 이상했다. 송여환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은발은 딱딱하게 굳어 앞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두 사람의 기운이 심히 요동치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꼭 겁을 먹은 짐승들 같았다. 마치 자신보다 더 크고 강한 사냥꾼을 만나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처럼 볼품없고 초라했다. 둘은 자존심이 굉장히 상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으나 정작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문제는 저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거다. 기시감이 들던 찰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어.」

휘익! 굳어 있는 두 사람을 헤치고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하나의 인영.

「나의 주인.」

새카만 머리카락, 핏기 없는 피부. 놈에게선 인간의 것이 아닌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나를 향해 뻗어 나오는 손가락은 겨울나무의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고 창백했다. 슥, 턱과 뺨에 닿은 피부가 매우 차가웠다. 생명력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 존재처럼.

놈이 나를 보고 웃었다. 눈빛은 다정하면서도 흉포했다.

「그 육집 안은 따뜻해?」

놈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놈은 내 얼굴에 머무르던 손을 아랫배 쪽으로 자연스럽게 미끄러뜨렸다. 톡, 배꼽 부근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다.

‘X발!’

오스스 소름이 돋으며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더 놀라운 건 아주 조금 ‘그립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황스러운 감정이었다.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리곤 놈의 손을 쳐 냈다. 짜악-!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큰 손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게 보였다. 놈의 생기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손을 따라 도르르 굴러갔다.

‘징그럽긴.’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잠들었던 시체가 긴 원한을 풀기 위해 스스로 무덤을 파헤치고 나온 것처럼 어색했다. 뼈 마디마디에 기름칠이 덜 된 건지, 영 불쾌하기만 한 새끼다.

“치워.”

진심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이곳 새끼들은 기본적인 성교육조차 못 받은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새끼도 그렇고, 은발도 그렇고, 허락도 없이 남의 몸을 마음대로 지분거리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개새끼들. 아주 손목을 분질러 놔야 정신을 차리지.’

반응이 조금 더 격한 이유는 저 차가운 손이 닿은 부위가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욱신거려서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가슴 한편이 묘하게 아려서도 아니다. 그냥, 싫었다.

거기다 눈앞의 변태 새끼가 잔인한 학살의 주인공이었을 거라는 묘한 확신까지 드니 거부감은 배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지선우도 건드린 걸까?’

소중하든, 소중했든, 오랜 인연을 함께해 온 사람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는다면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특히나 내 인생에서 온 마음을 바쳤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야.”

「……너한테-」

지선우에 대해 물어보려던 찰나, 놈이 먼저 선수를 쳤다.

「묻는 게 아니야, 육집.」

“큭!”

까만 눈동자가 서늘히 빛난다 싶더니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긴 손가락이 내 목을 낚아챘다. 비틀어 버릴 듯 세게 조여 오는 힘은 매우 강해, 아무리 떼어 내려 발버둥 쳐도 꿈적하지 않았다.

꺽꺽, 절로 숨이 막혔다. 겨우 한 손뿐인데도 쉽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무슨 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초라한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내고 싶지만, 나의 오메가가 잠들어 있는 소중한 육집이니 가까스로 참아 내고 있는 거야. 천박하게 굴지 말고, 감히 내 손을 쳐 내지도 마. 네 보잘것없는 몸뚱이 안에 오메가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끄- 윽, 크……!”

「내가 먼저 깨어나 당신을 찾았더라면 이런 굴욕 따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못나서, 당신을 영원히 잃고 말았어.」

얼굴로 열이 몰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귀에선 삐- 긴 이명이 들려왔다. 젠장, 망할 자식. 이를 악물며 놈의 몸을 마구잡이로 걷어차고 후려쳤다. 그러나 놈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아주 그립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건 괴로워하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나를 보지만 나를 보는 게 아닌 얼굴이었다.

「그대가 많이 보고 싶어. 나의 반려.」

퍽! 놈이 나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거친 바닥에 얼굴을 박았지만 고통을 느끼기보단 부족했던 숨을 들이켜는 게 우선이었다.

“콜록! 콜록……!”

격렬한 기침과 함께 코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분명 썩 좋아 보이는 몰골은 아닐 거다. 나는 이를 빠드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비틀거렸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후, 숨을 고르며 통증이 이는 목을 잡았다. 목 안쪽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아주…… 제멋대로 가지고 노는군. 나는 잔기침을 뱉으며 생각했다. 열두 배는 꼭 돌려줘야 쌓인 화가 풀리겠다고.

「육집.」

놈의 싸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난 네 몸을 갈라, 그 안에 씨를 넣어 꽃을 피울 거다. 오메가가 제일 좋아하던 베타리아를 만개시킬 거야. 그렇게 너는 오메가의 육집이자 그를 기리는 꽃의 화분으로 영원을 사는 거다.」

「난 오메가처럼 너그럽지 못해. 너희들을 보면 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혐오가 밀려오지. 그래, 영원을 사는 데 네 조그만 머리는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놈이 또 무어라 한마디를 얹는 순간,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 떠들어 대는 주둥이를 막았다.

“자꾸 짖지 마.”

근접전은 불리하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벌려 태워 죽이-

「버릇이 없군.」

통하지 않네. 눈앞으로 다가온 주먹에 허, 실소가 흘러나왔다. 상처 하나 없는 건 좀 치사하지 않나?

뻑!

“큭!”

정면으로 후려 맞아 얼굴이 휙 돌아갔다. 나는 바닥으로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어 냈다.

‘내가 무슨 샌드백도 아니고…… 젠장.’

손등으로 코와 입가를 슥 닦아 냈다. 지금은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다. 인정하자, 이놈은 혼자서 잡기 힘든 상대다.

나는 곧바로 송여환과 은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내가 밀리고 있다는 시점에서 그렇게까지 도움이 되는 놈들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지금은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