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나는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놈을 쳐다봤다. 이상하게 맞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송여환을 향해 따져 묻고 싶어졌다.
‘눈을 뜨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 여기가 어디고, 상태가 어떻고, 뭐 그런 것들, 먼저 물어야 할 중요한 것들이 따로 있을 텐데? 가족들의 안부라든지, 네 커리어에 대한 문제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야.’
……하. 미친 새끼. 나도 모르게 탄식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잃어버렸던 입맛이 도는 착각까지 들었다. 무언가 뒤통수를 세게 한 대 후려 맞은 기분이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놈이 잡은 손을 살짝 흔든다. 대꾸하라는 의미 같아서 머뭇머뭇 입을 열려던 찰나,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뽀옹-
뭐지? 나는 소리가 들려온 아래쪽을 살펴봤다. 오버스러울 순 있으나, 수상쩍은 낌새는 확인해 보는 편이 나았다. 특히 브릭트스컴트의 막내 도련님이란 타이틀을 가진 송여환의 병실이라면 더더욱.
‘녀석은 아직 몸을 일으킬 수 없는 환자니까.’
다친 것도 내 탓이니 도움을 좀 줘 볼까 생각해서 자세히 살피기 위해 막 고개를 숙이려던 때였다.
“안 돼-!”
방금까지 골골거리던 녀석의 말문이 확 트였다.
“제발 나가아아!!”
그것도 굉장한 성량으로.
* * *
“여환아!”
“송여환!”
송여환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송여희와-송家 장녀- 송여강-송家 장남-이 함께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평소 호랑이라 불리는 매섭고 찬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둘은 그저 막내를 아끼는 형, 누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장 잡혀 있는 회의나 미팅, 점심 약속이 한가득했지만 그들에겐 무엇보다 가족 ‘송여환’이 먼저였다.
송여희는 턱선을 따라 똑떨어지는 칼단발을 찰랑이며 주치의에게 상태 보고를 들었고, 송여강은 소처럼 커다란 덩치를 수그려 연신 동생을 만져 대며 ‘아픈 곳은?’, ‘형 알아보겠어?’, ‘이거 몇 개야’ 따위의 무수히 많은 걱정을 쏟아 내었다.
그러나 정작 제일 기뻐해야 할 송여환이 이상했으니. 그는 초췌한 몰골로 입을 살짝 벌린 채 하얗게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혼수상태일 때보다 상태가 나빴다.
송가의 자랑이라 해도 좋을, 크고 예쁜 눈동자가 마치 작은 콩처럼 변해 어딘지 모를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흐윽’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여환아!”
송여희가 비명을 지르듯 송여환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송여강은 의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야 이 돌팔이 쉐끼야!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아! 애가 왜 우느냐고오!”
“그…… 큭, 억…….”
“X발뤄마, 말을 해애액!”
“으어어…….”
도떼기시장만큼 시끄러워진 병실 안.
“끄윽, 끄윽!”
송여환은 몇 시간 전, 어색한 얼굴로 ‘……간다’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진 낙유성을 떠올리며 더욱 서럽게 눈물을 쏟아 냈다.
“하, 내, 킁…… 흑, 흐윽! 내, 이미…… 흑, 이미지!”
‘들었을까? 들었겠지? X발 차라리 날 죽여라!’
송여환은 결국 엉엉엉 자지러지는 울음을 토해 냈고, 진실을 모르는 가족들만 애가 타 죄 없는 주치의의 멱살을 잡아 댔다.
* * *
폼생폼사 송여환이 일생일대의 굴욕적인 하루를 보낸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오늘.
띵- 동!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송여환은 굳게 닫힌 현관문을 쳐다보며 비장한 얼굴로 큼, 목을 풀었다. 그의 양손에는 앙증맞게 포장된 다육이 화분과 와인, 간단한 먹거리 따위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그는 오늘을 위해 피눈물 나는 재활 치료를 이 악물고 견뎠다. 말랑해진 근육들 기강 좀 잡아 주고, 푸석해진 피부 정신 차리라고 비타민 좀 쏴 주고, 유명 숍을 전세 내 헤어 케어와 왁싱까지 깡그리 싹싹 받았다.
참고로 오랫동안 잠들었던 ‘여환이의 여환이’를 위해 강남 비뇨기과까지 다녀왔으며 연애 장인 누나에게 부탁해 ‘부담스럽지 않은 플러팅’ 강의까지 전수받은 참이다.
준비는 만반이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
‘소개팅 가냐는 주변인들의 끈덕진 관심을 모두 뿌리치고 달려온, 다른 의미의 SS급 던전……. 오늘이야말로 클리어하고 만다.’
혹시 없어 보일까 봐 국어사전으로 있어 보이는 단어들도 좀 외워 왔다.
‘대응각, 아밀레이스, 형이상학적 유물론…….’
송여환은 철두철미한 스스로에 감탄하며 현관문 초인종을 또 한 번 눌렀다. 그러곤 재빠르게 몸 상태를 체크했다. 집에 있는 고양이 달래보다 더한 그루밍을 했다는 자각은 있지만, 원체 꾸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그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팍을 비롯해 상체를 더듬었다. 몇 년간 공들인 가슴근육이야 봉긋하고, 팔뚝은 딴딴한 게 손에 착 감기고, 복근은 이미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는 상태다.
‘감사합니다, PT쌤.’
거기다 얼굴은 뭐 아버지·어머니의 훌륭한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두말하면 입 아프다. 그 외의 부가적인 요소들은 그 분야의 고수들이 손봐 주었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지.
‘감사합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만약 이대로 일이 잘 풀려 결혼까지 하게 되면 입이 쩍 벌어질 만큼 거하게 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이 송여환의 이름을 걸고 평생을 은인으로 모시며 보답하고 살겠습니다. 음음.
사나이의 다짐과 함께 마지막으로 아들내미를 확인하는데…… 뭐야. 왜 벌써 자동 기립이야? 어, 뭐라고? 복도에서부터 유성이 형 냄새가 폴폴 났다고? 이런 변태 자슥! 넌 내 아들이 맞구나. ……오케이.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확실히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며 ‘넌 할 수 있어, 넌 최고야, 넌 잘생겼어, 넌 어리고 돈도 많아’ 따위의 자기 최면을 건 게 꽤 효과가 있었나 보다. 큰 거사를 치르기 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으로 약간 죽을 것 같은 걸 빼곤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아자자!”
사람이 큰일을 겪으면 변화하거나 성장한다던데, 송여환 역시 그랬다. 한 번 죽음을 경험해 보니 ‘앞으로’나 ‘때가 되면’ 같은 건 전부 겁쟁이들의 변명처럼 느껴졌다. 인생에서 중요하다 생각되는 일들은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미루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 계속 미루고 미뤘던 고백을 할 생각이다.
‘그래, 고백!’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었던 고백. 물론 누울 자리 봐 가며 발 뻗으라고, 현재 낙유성이 연애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그만둘 생각도 전혀 없었다. 핑계는 그동안 지긋지긋할 만큼 댔다. 도망도 많이 쳤고, 참기도 많이 참았다. 지금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용기를 낼 타이밍은 오지 않을 거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송여환은 입안에 고인 침을 느릿하게 삼켜 냈다. 욕심일지언정, 아니, 주제를 넘는 욕심일지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자 거센 풍파를 막아 줄 방파제가 돼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타인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사랑’을 직접 겪은 것이 결심의 큰 이유가 됐다. 송여환은 이제 낙유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뛰어넘을 사랑은 오로지 ‘죽음’ 그 이상의 것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선우 형님한텐 죄송하지만…….’
송여환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조금 밉게 말하자면, 지선우에 대한 인간적인 유감은 있었으나 그로 인해 낙유성이 외로운 삶을 살진 않았으면 했다.
송여환은 지선우가 배려 있고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지선우의 안타까움에 젖어 낙유성의 곁에서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서 새로운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걸, 이제 지선우가 아닌 송여환 자신이 해 줄 생각이었다.
‘아아, 뭐 나중에 여건이 되면 합의하에 아이를 입양하거나 보육원 봉사를 다니는 것도 보람차고 즐겁겠다. 신혼여행은 발리나 오키나와가 좋겠고, 집은 큰 마당이 딸린 3층짜리 전원주택으로 하고…….’
뭉게뭉게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던 바로 그때, 달칵. 현관문이 열렸다.
* * *
‘X발, 또 어떤 새끼야.’
술독에 빠져 사느라 밤낮이 바뀌어 이제 막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안 그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통인데 어떤 개자식이 대낮부터 띵동띵동 초인종을 반복해 울려 대니 오던 잠이 전부 달아나 버렸다.
“하, 요새 들어 참 찾는 새끼들이 많네.”
입술이 삐딱하게 비틀리며 빈정거림이 흘러나왔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굴러다니던 소주병 하나를 쥐어 잡았다. 오늘은 정말 누구 하나 죽여 버리지 않고선 못 참을 것 같았다.
‘너 X발 잘 걸렸다. 네 명줄은 네가 재촉한 거다.’
나는 상대의 대가리를 깨 버릴 생각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정작 보이는 건…… 선인장? 웬 앙증맞은 미니 선인장이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졌다. 흔히 다육이라 부르는 그것이었다.
화분 너머, 가려지지 않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사내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뭐야. 너.”
나는 기운이 빠진 채 물었다. 그러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송여환이 배시시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